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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개의 캐나다를 꿈꿈다--퀘벡분리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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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캐나다를 목표로-- 퀘벡 분리주의

 

 

 

글 | 양경춘 (Kenny Yang)

 

 

 


 

 

대부분 집집마다 골치덩이가 하나씩은 있듯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 중 하나로 손꼽히는 캐나다에도 태생부터 안고 있는 문제 하나가 있다. 바로 캐나다 연방으로부터 독립을 꿈꾸는 퀘벡 분리주의이다. 물과 기름처럼 겉도는 영국계 연방주의자들과 프랑스계 퀘벡 분리주의자들의 갈등이 마치 역사적으로 한국과 일본의 관계처럼 골이 깊다. 최근 퀘벡당이 10여 년만에 다시 집권에 성공함으로써 현 캐나다 연방제를 놓고 불어권 퀘벡 분리주의자들과 영어권 연방주의자들 사이에 팽행한 긴장이 다시 조성되고 있다.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과 ‘풀레 프리 켄터키’>

 

 

세계 7대 선진국 중 하나인 캐나다에 이민와 살면서 주류사회의 두 뿌리 영국과 프랑스의 이질적인 분위기와 마주칠 때마다 사실 아직까지도 색다른 감정이 들곤 한다.

 

 

이민 초기 토론토서 몬트리올로 여행갔을 때의 황당했던 일들이 떠오른다. 킹스턴을 경유해 몬트리얼로 이어지는 401고속도로가 퀘벡주 경계에서 갑자기 20번으로 바뀌는가 하면 몬트리올에서는 교통표지판과 간판들이 불어로만 쓰여 있어 애를 먹었다. 다행히 ESL과 함께 기초불어 교육을 받고 있는 초등학생 아들의 도움으로 표지판의 지명과 동서남북 방향을 간신히 해독하며 진땀을 흘렸던 기억이 새롭다. 몬트리올 시내에서 숙박을 위해 호텔을 찾으려고 전화번호부 책을 뒤져도 온통 불어뿐이라서 마치 프랑스에 왔나? 착각할 정도였다.

 

 

점심때 시내를 돌며‘켄터키 프라이드 치킨’을 찾으니 ‘Kentucky Fried Chicken’ 이나 ‘KFC’간판이 보이지 않는다. 퀘벡 주에서는 기존 영어이름도 불어식으로 바꿔야 판매허가가 나오기 때문에 ‘풀레 프리 켄터키(Poulet Frit Kentucky: PFK)’로 표시하고 있었다. 토론토에도 진출해 있는 ‘레드 랍스터 (Red Lobster)’는 불어식으로 이름 바꾸기를 거절해 매장을 닫았다는 설이 있을 정도이다.

 

 

반면 정부의 각종 문서는 물론 가전제품 메뉴얼도 이중표기법에 따라 반드시 영어와 불어로 함께 제공하도록 되어 있어 불어를 쓰지 않는 다른 주들에서는 엄청난 낭비라고 비판받기도 한다. 영연방 국가의 일원으로서 ‘한지붕 두가족’으로 살림을 꾸려가고 있는 캐나다의 독특한 현실인 것이다.

 

 

<영국계와 프랑스계는 한일관계?>

 

 

영국계로부터 억압받던 불어권 퀘벡주민들은 자신들의 언어, 종교, 문화적 전통을 간신히 인정받긴 했다. 그러나 소수의 영국계 주민들이 퀘벡의 경제권을 장악해 상류층을 형성하고 다수의 불어계는 하류층으로 전락하게 되자, 프랑스계는 그들만의 고유한 정서를 유지하고 주로 영어권인 타 주와 차별화하는 데 주력했다. 퀘벡주를 캐나다로부터 분리독립시키자는 운동을 전개해 자신들의 의지와 힘을 보여주게 된 것이다.

 

 

‘Je me souviens’ 얼마나 서러웠으면 수백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퀘벡인들은 ‘나는 기억한다’ 라는 뜻의 이 모토를 자동차 번호판에까지 새기고 다닐까? 1759년 영국군과의 7년전쟁시 퀘벡의 아브라함 평원에서 패배했던 프랑스군이 치욕을 영원히 잊지 말자는 뜻에서 유래한 말이다. 불어를 사용하는 퀘벡이 영어권으로부터 항상 독립하고 싶어하는 것은 한국역사에서 일본의 식민지배 시기를 상기시킨다.

 

 

최근 캐나다 주류사회의 ‘뜨거운 감자’로 다시 부상하고 있는‘퀘벡 분리주의’의 배경과 현실, 그리고 실현가능성에 대해 알아본다.

 

 

 

 

 

 

 

<1812년 잊혀진 전쟁 게너낙퀘이 전투>

 

 

1812년 9월 21일, 깊은 밤 온타리오 주 킹스톤 시 동쪽의 게너낙퀘이(Gananoque) 근교에 수많은 인적들이 어두운 풀숲 속에서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미 육군 벤자민 포시스 대위가 이끄는 100여 명의 노스 캐롤라이나 소총부대였다. 그들의 목적은 게너낙퀘이를 점령함으로써 세인트로렌스에 주둔한 캐나다측 대영제국연합군의 보급을 끊는 것이었다.

 

 

“탕! 탕! 탕!” 드디어 미군측의 첫 총격으로 두 신생국가의 사활을 건 전쟁이 시작되었다. 캐나다측에서는 스톤 대령이 지휘하는 민병대들이 이미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공격을 감행한 미군은 오히려 민병대의 총격에 다수의 사상자가 났다. 스톤 대령이 소수병력으로 승리해 캐나다측 대영제국연합군 보급로를 지켜낸 것이다.

 

 

게너낙퀘이 전투는 바로 캐나다 군대의 본격적인 첫 전투였고 이 전투 이후, 비로소 캐나다가 국가로서 인정을 받게 되었다.
이후 2년 동안의 처참한 전투로 수많은 희생을 치룬 두 국가는 1814년 12월 겐트서약을 맺고 공식적으로 전쟁을 끝냈다.

 

 

1812년 전쟁을 통하여 앙숙관계였던 캐나다 내 영국계와 프랑스계가 처음으로 협력하여 미군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냈다. 이 전쟁은 캐나다 연방 출범의 긍정적 신호탄이 되었고 그 후로 캐나다로 이민 온 사람들은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캐나다인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커다란 의미가 있는데 왜 ‘잊혀진 전쟁’으로 불릴만큼 조용한가? 미국측으로선 현재의 우방국인 영국과 캐나다와 치른 전쟁이기 때문에 되새겨 봐야 득이 되지 않고 더구나 대영제국과 캐나다 민병대들이 자기네 수도 워싱턴으로 쳐들어와서 백악관을 불태워 버린 치욕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반면 1812년은 캐나다에 있어서는 굉장히 의미가 깊은 해로 부각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영국계, 프랑스계 및 원주민계 모두 합심하여 미국의 침략을 막아낸 캐나다 최초의 승전이었기 때문이다. 캐-미간(정확히 말하자면 영국령 캐나다와 신생국 미국간)의 1812년 전쟁 200주년인 2012년에 캐나다 하퍼 정부는 이를 기념하는 여러가지 행사를 대대적으로 주최함으로써 영-불계의 국민통합을 격려했다.

 

 

 

 

 

 

 

<퀘벡당 집권으로 분리논의 재점화>

 

 

캐나다 10개주 중 유일하게 공용어로 불어를 사용해 리틀 프랑스라 불리는 퀘벡주는 지난 해 9월 4일 주총선에서 분리주의를 기치로 내건 퀘벡당(PQ)을 제1당으로 선택함으로써 다시 연방으로부터 분리 독립을 추진할 것인지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퀘벡당은 전체 125석 중 54석을 확보해 50석의 자유당을 누르고 집권당으로 등극했으며 폴린 마르와 당수가 퀘벡주 수상이 되었다. 주총선 승리 기념 연설에서 마르와 신임 주수상은 “퀘벡의 장래는 독립국가가 되느냐에 달려있다” 라고 선언했는가 하면, 최근 “모든 퀘벡 주민들은 불어를 구사할 줄 알아야 한다”고 밝혀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한편 퀘벡주에서는 지난 1980년과 1995년에 연방정부로부터 분리 의사를 묻는 주민투표가 두 차례 실시됐으며 1995년 투표에선 1% 포인트도 안되는 간발의 차이로 부결된 바 있다. 이번에 새로 출범한 퀘벡 주정부는 연방정부와의 자치권 협상이 여의치 않을 경우 분리독립을 위한 주민투표를 조기에 추진하겠다고 공언하며 약 80%를 차지하는 프랑스계 주민들의 여론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한편, 퀘벡당 집권이 확정된 날 밤 11시경 마르와 대표가 몬트리올 시내 메트로폴리스 극장에서 승리 연설을 할 때 한 괴한이 총격을 가해 45세 남성 1명이 숨지고 30대 남성이 크게 다쳤다. 마르와 대표가 수백 명의 지지자 앞에서 영어로 연설을 시작하고 퀘벡은 독립주권 국가가 돼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이 나온 직후 극장 뒤편에서 총성이 터져 나왔다. 체포시 범인은 불어로 ‘영국계가 깨어나고 있다’고 외쳤다.

 

 

<영국계에 의한 프랑스계 식민지배>

 

 

캐나다에서 티격태격 여러 차례 반복되던 영-불간 전쟁은 1758년에 시작된 ‘7년전쟁’을 통하여 영국이 프랑스를 누르고 최종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신 프랑스 시대’가 끝나게 된다. 이 전쟁에서 영국군은 프랑스보다 두 배가 많은 3만 명의 병력과 30여 척의 군함을 동원하여 퀘벡시를 3개월 동안 공격했다. 최후 전투는 퀘벡시의 아브라함 평원에서 전개 되었으며 프랑스 사령관 몽캄장군이 전사함으로써 영국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파리조약과 함께 프랑스인의 지배는 끝이 나고 영국이 패권을 차지하게 된다.

 

 

패전 후 대부분의 프랑스 귀족, 관리 그리고 고위 성직자들은 소유하고 있던 모든 자산을 정리하여 프랑스로 돌아간다. 또 일부는 영국인의 탄압을 피해 미국 남부 루이지애나 또는 서부로 이주한다. 하지만 여전히 6만 여명의 프랑스 이주민들이 남아 있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농부들로서 역시 같이 남아있던 하위 성직자들이 그들을 돌보게 된다. 이들이 현재 퀘벡주를 비롯한 캐나다 여러 지역에 살고 있는 5~6백만 명의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의 조상인 셈이다. 영국인의 지배는 개척민인 프랑스인들에게 고통스러웠다.

 

 

두번째 퀘벡 역사의 전환점이 된 1763-1773년 동안, 퀘벡은 영국의 무자비한 통치하에 들어가 공공기관에서는 불어 사용이 금지되었다. 무역은 영국인만이 하게 되었고, 영국 법만을 사용해야 했던 퀘벡 주민들은 피정복자로서의 서러움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1774년 퀘벡헌장 제정으로 퀘벡에 거주하는 프랑스인들은 불어를 말하고 가톨릭을 믿고 실천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받게 된다. 영국 왕실에서 취한 이 조치는 퀘벡의 불어권 주민들이, 대영제국에 대항해 독립전쟁을 일으킨 미국인들을 따라 스스로 독립에 대한 의지를 다지게 될 것을 우려하여 취한 일종의 유화정책이었다. 영국인들이 실용주의 정책을 채택함으로써 소수 집단인 불어권 퀘벡인들은 미국의 독립에 대해 큰 관심을 갖지 않게 됐다. 게다가 당시 사회 경제적으로 우월한 영국계 퀘벡인들과 비교하여 열세의 위치에 있던 불어권 퀘벡인들은 독립을 주장할 만한 결집된 힘을 갖추지 못했었다.

 

 

<두개의 캐나다 - 로워, 어퍼>

 

 

한편 1770년대로 들어서면서 미국의 독립 전쟁으로 다수의 영국 왕당파들이 캐나다로 도피해 오자 영국령 캐나다는 이들을 환영하였다. 이들은 거주할 수 있는 영토를 요구했고 캐나다는 이들을 온타리오 지역에 거주시켰다. 왕권지지자를 포함한 영국계 캐나다인들은 원하던 대로 프랑스계인 퀘벡인들과 떨어져 살게 됐다. 자연히 로워 캐나다와 어퍼 캐나다로 분리돼 지금의 퀘벡주와 온타리오주를 형성한 것이다. 퀘벡은 일정 부분 자주성을 부여받아 불어 사용, 프랑스 문화 보존, 그들의 주종교인 가톨릭을 자유롭게 믿을 권리를 회복할 수 있었다.

 

 

 

 

 

<캐나다, 다시 하나로!>

 

 

그러나 한 국가 내에서 이러한 이중 체제는 1840년에 막을 내리게 된다. 몇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첫째, 온타리오주의 재정 적자가 퀘벡주에 비해 심하여 연방정부에서는 두 지역을 통합하여 이 문제를 해소하려고 했다.

 

 

둘째, 1832 년에 시작한 이른바 ‘퀘벡 애국자 반란’으로 인한 보안 문제였다.

 

 

셋째, 미국의 침입에 대한 방어 대책의 이유로 두 개의 캐나다는 다시 하나의 캐나다로 통합된다. 1840년대부터 미국과의 합병 문제가 대두되고 또한 광활한 캐나다의 동서부를 연결하는 철도 건설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아울러 국가발전에 필수적인 인구 증가 및 영토 확장을 통한 시장확보 등을 위하여 1867년 드디어 퀘벡, 온타리오 그리고 노바스코샤, 뉴 브런스윅 및 PEI로 구성된 새로운 캐나다가 탄생했다.

 

 

1867년 영연방 북미주법(BNAA)에 따라 퀘벡을 포함한 각 주정부는 광범위한 자주권을 부여받았다. 연방정부는 국방, 외교, 화폐, 우체국 등 캐나다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통치권을 갖는 대신 주정부는 지역경제개발, 교육, 보건, 문화, 의료서비스 등 주민의 사회복지 관련분야의 행정권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주정부 통치권의 상당 부분이 연방정부로 이양되었다. 퀘벡인이 큰 관심을 보였던 전국적인 불어사용 문제는 온타리오주의 반대에 부딪혀, 원칙적으로 불어가 국가적 언어지만 그 사용은 퀘벡주에 국한되었다. 1867년의 연방체제는 퀘벡주의 자치권 행사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지속적인 영어권 캐나다의 통치는 퀘벡인의 소득수준을 온타리오에 비해 27% 낮은 수준으로 끌어 내리고 결국 퀘벡 경제의 침체를 불러왔다.

 

 

<‘조용한 혁명’과 ‘퀘벡의 기적’>

 

 

1763년 영국 식민지로 편입된 프랑스계 퀘벡은 영어권 캐나다의 억압 아래 퀘벡인의 정체성을 잃고 열등감에 시달리며 자치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심한 상대적 빈곤 속에 빠진 비극적 역사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960년 퀘벡 자유당 당수 쟝 르사지 수상이 정권을 잡은 후 퀘벡의 판도가 달라졌다. 이른바 ‘조용한 혁명(Quiet Revolution: Revolution tranquille)’이 시작된 것이다.

 

 

조용한 혁명을 통하여 퀘벡주는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종교적 개혁을 이루었고 불어권 퀘벡인의 자존심을 다시 찾았다. 불어권 퀘벡인들은 이 혁명을 통하여 자신감 회복, 정체성 재확인 및 정치적, 기술적, 행정적 능력을 확보하게 됐다. 형편없이 낮았던 퀘벡주의 경제수준은 이웃 영어권 온타리오주를 따라잡고 ‘한강의 기적’에 비견되는‘퀘벡의 기적’을 일궈냈다.

 

 

 

 

 

 

 

<영국계가 프랑스계에 약점 잡혀>

 

 

영국계에 지배받던 프랑스계는 마치 일제의 만행같은 탄압을 받아 프랑스어 사용금지, 프랑스 문화금지 그리고 영국식 체제를 강요당했지만 자존심 강한 퀘벡의 프랑스인들은 엄청난 저항을 했다.

 

 

때맞춰 이웃 신생 미국에서는 영국을 상대로 독립전쟁을 선포하고, 고통받고 있는 퀘벡의 프랑스계에 러브콜을 보내 ‘함께 영국을 상대로 싸우자!" 고 권유했다. 퀘벡의 프랑스계는 전의를 불태우며 미국과 함께 탄압하던 영국계에 맞서 싸우려고 했다. 그 때 영국계 캐나다측에서 아주 달콤한 조건을 내세웠다.

 

 

‘미국에 동참하지 않고 우리와 협력하면 불어 사용과 프랑스 문화 다 인정해 줄께!’

 

 

영국령 캐나다측이 제안한 것을 퀘벡인들이 받아들임으로써 영국계 캐나다는 그때부터 퀘벡인들에게 항상 약점을 잡히면서 지금껏 살고 있는 것이다.

 

 

<‘두 개의 캐나다’ 가능한가?>

 

 

캐나다에서 유일하게 불어를 공용어로 쓰는 퀘벡은 최근 분리주의 정당을 제1당으로 받아들였다. 2012년 9월 열린 주의회 선거에서 퀘벡의 분리독립을 요구해 온 퀘벡당(PQ)이 지난 9년간 집권해 온 자유당을 제치고 제1당에 등극한 것이다. 퀘벡당이 집권하게 됨으로써 분리독립 추진이 탄력을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퀘벡당은 캐나다 연방정부로부터의 자치권 확대를 위해 노력할 것으로 보이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할 경우 주민들의 반발을 발판으로 분리독립 주민투표의 조기 실시를 모색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상하고 있다.

 

 

연방정부는 퀘벡의 자치권을 확대하는 등 융화정책을 취해 왔지만 퀘벡은 1980년에 이어 1995년에도 연방정부로부터 분리 의사를 묻는 주민투표를 실시하는 등 대응해 왔다. 그러나 두 차례 주민투표는 각각 19%, 1% 표차로 부결됐다. 향후 주민투표를 다시 해도 주민들의 태도가 변수가 될 것으로 보여 가결될지는 미지수 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한편 퀘벡주 이외의 지역에 거주하는 캐나다 국민 대다수는 만일 퀘벡주가 주민투표를 통해 궁극적으로 독립적인 자치국가를 구성하는데 찬성할 경우에 캐나다 연방으로부터의 분리는 이루어져야 하며 정치적, 혹은 경제적인 유대관계는 완전히 단절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전국적으로 시행한 여론조사 결과에 의하면 퀘벡주 이외의 지역에 거주하는 대다수의 캐나다인들은 퀘벡주의 독립 분리투표에서 분리주의자들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단지 과반을 살짝 넘는 51퍼센트의 찬성만으로는 부족하며 이보다 더 큰 차이로 승리를 거두어야만 한다고 믿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과연 퀘벡공화국을 볼 수 있을까? 아니면 여전히 주민투표 논의만 무성하다 그칠 것인가?

 

 

캐나다 주류사회에는 명백하게 두 개의 서로 다른 문화와 언어, 그리고 서로에게 질 수 없는 독립적인 자존심 두 개가 존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퀘벡당의 집권으로 ‘캐나다가 결국 쪼개 지는 게 아닌가?’라는 우려가 있으나 일부에서는 퀘벡 정치인들이 분열주의를 부추겨 정치적으로 이용한다는 지적도 있다. 그동안 퀘벡 정치인들의 벼랑끝 전술을 이용한 ‘채찍’작전에, 퀘벡의 분열을 원치않는 연방정부는 ‘당근’을 주며 달래는 관행으로 버텨 왔다고 볼 수 있다.

 

 

이번에 퀘벡당이 10여 년만에 집권에는 성공했지만 과반 의석은 확보하지 못해 당장 주민투표로 이어질 가능성은 우려와 달리 비교적 낮은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캐나다 연방은 영국계 주민과 프랑스계 주민들이 캐나다 건국의 주도권을 놓고 수백 년간 치열하게 싸운 역사를 통하여 ‘한지붕 두가족’으로 꾸려가고 있다. 이들이 진정으로 하나의 캐나다로 승화되기까지는 보다 더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

 

 

 

사진/이미지 출처:Google

 

본 글은 캐나다 '토론토 영락교회'에서 발행되는 계간 '영락'지 2013 봄호(1월27일자)에 동시에 게제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