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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봉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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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加人 강신봉
전 캐나다한인총연합회장, 전 토론토한인회장, 요크한국인학교 설립교장, 김치캐나다사장, 전 스코필드박사동상건립위원장,전 무궁화사랑모임창립회장, 토론토흥사단창립지부장, 대한민국국민훈장목련장, 역사문화원장

캐나다 문협회원.현 GTA한카노인대학장
http://skang3441.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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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14
[광복절] 일본인들은 왜 욱일기를 휘날리나

문제적 깃발 통해 본 한-일 관계

15일로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지 68돌을 맞게 되지만, 한-일 관계는 걸핏하면 격랑에 휩쓸리곤 한다. 최근 한-일 간에 떠오른 새로운 이슈는 이른바 '욱일기 논쟁'이다. 한국에선 욱일기를 '전범기'로 규정하며 일본에 사용 자제를 요구하고 있지만, 일본에선 국기인 일장기와 다름없는 자국의 상징이라며 절대 응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욱일기가 두 나라 사이에 민감한 현안으로 떠오른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지난해 8월 런던 올림픽 남자축구 동메달 결정전에서 박종우 선수가 일본을 꺾은 뒤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씌인 종이를 들고 세레모니를 한 것이 계기였다. 이에 대해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박 선수의 행동을 '경기장에선 허용되지 않는 정치적 행위'라고 지적하며 징계 방침을 밝히자, 한국 누리꾼들이 일본 체조선수들의 유니폼에 욱일기의 도안이 사용된 것을 문제 삼으며 반격에 나섰다.

 


이후 욱일기 논쟁은 축구 한-일전이 벌어질 때마다 재연되고 있다. 런던올림픽 직후인 지난해 8월 일본 도쿄에서 20살 이하 한-일 여자 축구대표팀 경기가 열렸을 때도 다시 한번 큰 논란이 일었고, 지난달 28일 서울에서 개최된 동아시아 축구대회 때는 두 나라 정치권까지 나서 막말을 주고받는 사태로까지 발전하고 말았다.

그라운드서 불붙은 제국주의 논쟁
한국선 "전범기 사용 자제" 요구
일본쪽 "자국 상징 깃발일뿐" 맞서
악화된 한-일 관계 더욱 얼어붙어

욱일기 논쟁이 독도, 위안부, 개인 청구권 등 한-일간의 기존 현안들과 구별되는 점은 대중에게 인화성과 전파력이 강한 '스포츠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아도 아베 일본 총리의 잇따른 망언과 일본 각료들의 야스쿠니신사 참배 등으로 악화된 한-일 관계에 욱일기가 기름을 붓고 있는 형국이다. 일본 정부가 "욱일기 사용에 문제가 없다"는 쪽으로 정부 의견을 정했다는 보도(<산케이신문> 6일치)가 나왔지만, 이 문제를 방치했다간 축구 한-일전이 있을 때마다 한-일 관계가 경색되는 상황이 되풀이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대체적인 여론은 욱일기는 일장기처럼 일본을 상징하는 전통적인 깃발인데 한국이 너무 과민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쟁이 끝난 뒤 60여년 동안 아무 문제 없이 사용해 온 깃발을 이제 와서 문제 삼으니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도 나온다. 우리는 이 욱일기를 어떻게 봐야 할까?


욱일기가 갖는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선 일본이 근대 국가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메이지 유신' 때로 시선을 돌려 봐야 한다. 1868년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국가를 향해 첫발을 내딛은 일본에게 가장 큰 문제는 각 번(지역)별로 흩어져 있던 영주들의 군대를 한데 묶어 '천황의 군대'를 만드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 1879년 천황을 위해 숨진 이들을 기리기 위한 야스쿠니 신사가 만들어졌다. 야스쿠니 신사를 통해 각 지역의 다이묘들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군인들은 이제 천황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황군이 됐다. 이를 통해 일본은 "죽어서 야스쿠니에서 만나자"는 신앙을 만들어 수많은 병사들을 전쟁터로 내보낼 수 있었다.

그와 함께 천황의 군대를 떠받치는 수많은 행정 조처가 뒤따랐다. 구체적으로 새로 만든 군대의 병제는 어떻게 할지, 군복의 모양은 무엇으로 어떻게 통일할지, 장교와 사병의 계급을 어떻게 구분하고 뭐라고 부를지, 군기는 어떤 모양으로 만들지 등의 문제였다.


이런 역사적 배경 속에서 일본 정부는 1870년 5월15일 태정관 포고 355호를 통해 욱일기를 일본 육군의 정식 깃발인 '육군어국기'(陸軍御國旗)로 채용한다. 그와 함께 구체적인 모양도 정해진다. 이에 따르면, 욱일기는 가로 4척4촌(134.2㎝), 세로 5척(152.5㎝)의 네모난 모양에 태양을 상징하는 빨간 원인 '히노마루'를 중심으로 주변으로 16개의 광선을 쏘는 모양으로 규격화된다. 히노마루에서 발산되는 광선의 수가 왜 16개가 됐는지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천황가의 문장인 국화의 꽃잎이 16개인 데서 그 이유를 유추해볼 수 있다. 예전부터 일본 민간에서 축복을 기원하는 의미로 사용된 욱일기의 문양에 천황의 위세가 사방으로 확산된다는 의미가 결합된 것이다. 이후 욱일기는 1899년 칙령 제111호를 통해 육군뿐 아니라 해군기인 군함기로도 채용되게 된다. 모양은 육군기와 대체로 같지만 히노마루가 약간 왼쪽으로 치우친 게 특징이다.

일본은 이 욱일기를 앞세워 러-일 전쟁(1905년)에서 승리하고, 그 여세를 몰아 한반도를 병탄(1910년)했으며, 만주사변(1931년)을 도발하고, 중-일 전쟁(1937년)과 태평양 전쟁(1941년)으로 전선을 확대해 나간다. 그래서 일본인들의 마음속 욱일기는 일본인의 기상이 세계를 향해 뻗어나아간다는 의미이고, 동시에 한국과 중국 등 아시아 주변국들에게는 '일본 침략의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문제는 일본이 패전한 이후의 '전후 처리'였다. 일본 육·해군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과 함께 해체됐다. 그러나 욱일기 문양은 여전히 일본 육상·해상 자위대의 깃발로 살아남았다. 이 중에 육상 자위대 깃발에 새겨진 광선의 수는 8개로, 애초 16개였던 옛 육군 시절과 조금 달라졌지만, 해상 자위대의 깃발은 일본 해군 시절의 것을 그대로 이어받아 사용하고 있다.


그 사이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2002년 8월14일 방송된 일본의 공영 방송 <엔에이치케이>(NHK)의 '다큐 스페셜'이 그에 대한 해답을 제공하고 있다. 일본의 해상 자위대는 소련 봉쇄를 위해 일본의 해군력을 재건할 필요가 있다는 미국 정부의 판단에 따라 옛 해군 인사들이 다시 모여 만든 조직이라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을 보면, 일본 해군을 재건하기 위한 옛 해군 간부들의 비밀 연구는 일본의 패전 직후인 1948년 1월부터 시작됐다. 이 연구를 주도한 주인공은 해군의 군령부(한국의 합동참모본부)와 해군성(한국의 해군) 등에서 요직을 두루 거친 요시다 에이조 해군 대좌(한국의 대령)였다. 그러나 요시다 등이 아무리 완벽한 연구 결과를 내놓는다고 해도 일본을 점령하고 있던 승전국 미국이 승인하지 않았다면 해군의 재건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때마침 터진 한국전쟁이 모든 상황을 바꾸어 버렸다.

이후 일본은 미국의 전면적인 협력과 지원을 업고 1952년 4월 지금의 해상 자위대의 전신인 해상 경비대를 창설한다. 육상 자위대가 옛 일본 육군과의 관계를 단절하기 위해 육군 출신 인사들을 받아들이지 않은 반면, 새로 만들어진 해상 경비대의 간부들은 대부분 옛 해군 출신들로 충원됐다. 결국 반공과 냉전의 토양 위에서 지난 과오를 전혀 청산하지 못한 채 과거의 역사와 전통, 깃발까지도 그대로 이어받은 새로운 조직이 탄생한 셈이다.
육·해상 자위대 깃발로 남은 욱일기
주변국엔 전쟁 반성 않는 상징물로
일본선 '욱일기 부정' 한국에 반감만
일각선 "양국 차분한 접근을" 주문


일본의 해상 자위대가 옛 일본 해군의 깃발뿐 아니라 조직과 전통을 고스란히 계승하고, 대부분의 일본인들이 이에 대해 별다른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다는 점은 최근 욱일기 논란의 본질을 잘 보여준다. 욱일기의 이면에는 '청산되지 못한 전쟁 책임'과 그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일본'이라는 전후 일본의 중요한 특징이 녹아 있는 셈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욱일기는 전쟁 전의 침략의 상징에서 전후 '평화 일본'을 떠받치는 양대 축인 육상·해상 자위대의 깃발로 '세탁'될 수 있었다. 일본 자위대도 이 점에 신경이 쓰였는지 누리집에 "(해상 자위대기의 모양을 새로 정하기 위해) 세차례 공모를 했지만 지금의 도안보다 나은 게 없었고, 이미 해외에서도 욱일기가 일본을 상징하는 깃발로 받아들여지고 있어 옛 깃발을 계승했다"는 해명을 달아두고 있다.


이렇듯 70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나면서 욱일기는 일본인들의 삶 속에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게 된다. 일본판 '위키피디아'의 설명을 보면, 욱일기는 현재 일본 축구 대표팀, 빨강을 상징색으로 쓰는 일본 프로축구팀 '우라와 레즈' 등의 응원기로 쓰인다. 그밖에 일본의 대표적인 진보 신문인 <아사히 신문>의 사기도 욱일기의 모습을 본뜬 것이다. 이렇듯 오랜 역사와 광범한 활용, 전후 청산의 실패로 인해 일본의 욱일기를 나치의 하켄크로이츠(철십자)와 같은 것으로 보는 시각은 현재의 일본인들로서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는 의견도 있다.


심지어 일본 우익을 대변하는 <산케이 신문>은 "국기와 거의 다름없는 깃발을 적대시하는 외국 정부(한국)나 군(한국군)과 충실한 협력이 가능할 리가 없다"며 서로 협력하며 살아야 하는 한국과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할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욱일기를 부정하는 한국과는 상종할 수 없다는 태도인 셈이다.


일본의 이런 수구적인 태도는 한국에서도 강경론과 원칙론을 부른다.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욱일기가 최근 들어 한일 간의 중요한 쟁점이 된 배경엔 지난 10여년 동안 우경화의 길로 달려온 일본 사회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라며 "그 깃발 아래서 2000만명이 넘는 아시아 민중들이 숨졌는데 이 깃발이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말했다.

그 때문에 한-일 두 나라 모두 이런 문제를 좀더 차분하게 다뤄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서울에 주재하고 있는 한 일본 언론 특파원은 "욱일기를 일절 사용하지 말라는 요구는 일본인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러나 이번처럼 한국을 자극하기 위해 욱일기를 갖고 나온 일본 응원단의 행동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동시에 그는 또 "한국이 역사 문제에서 일본을 비판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한국인들이 조금만 더 일본인의 입장을 이해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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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13
이황 이퇴계...생후 7개월에 부친을 여의고, 후실이었지만

이황 이퇴계(李滉 李退溪) 명인전 #38

1501(연산군 7)~1570(선조4) 69세

제공: 강 신 봉


이황 선생의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 퇴도(退陶, 도수(陶수),

시호는문순(文純), 본관은 진보(眞寶), 조선 중기의 문신이요 학자이다.

 

 


경북 안동군 도산면 온혜리에서 좌찬성 이식(李埴)의 7남 1녀중 막내 아들로 태여 났다.

생후 7개월에 부친을 여의고, 후실이었지만

현부였던 생모 박씨의 가르침으로 총명한 자질을 키워 나갔다.

 

12세 때에 숙부 이우로 부터 <논어>를 배웠고,

14세때부터 독서를 하여 도연명의 시를 즐겨 외웠으며,

20대에 들어서는 침식을 잊고 주역에 몰두하다가 건강을 해쳐 병치레를 해야 했다.


27세때에 진사에 합격을 하였고, 모친의 소원에 따라 과거에

응시하기 위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이듬해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그리고 33세 때에 재차 성균관에 들어가 <심경주부>를 탐독하였다.

34세, 1534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사가 되었고,


37세 때에 모친상을 당하여 고향에 가서 3년간 복상을 하였고,

39세에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가 곧 사가독서에 임명되었다.

 

 

 

낙동강 상류 토계의 동암에 양진암을 짓고

산운야학을 벗삼아 독서에 전념하는 생활에 돌입하였다.


이 때에 토계를 퇴계라고 개칭하고 자신의 아호로 삼았으니,

그의 나이 46세 때의 일이다.


48세 때에도 여러가지 중앙관직을 받았으나

다 거절하고 지방직을 택하여 충청도 단양군수 경상도 풍기 군수를 역임하였다.


49세 되던 해에는 다시 관직에서 물러나

퇴계의 서쪽에 한서암을 짓고 다시금 구도생활에 침잠하였다.


52세에 성균관 대사성에 제수되자 취임하였고,

이후 홍문관 부제학, 공조참판등에 임명되였으나 모두 고사하고,

낙향을 하여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학문 정진에 전념하였다.

 

 

 

이 때에 자신의 아호를 도옹이라고 개칭하고

이후 7년간 서당에 기거하면서 독서, 수양, 저술에 매진하면서 제자양성에 온 힘을 기울였다.


13대 명종은 그의 학문과 인품을 높게 추앙하여

조정에 나올 것을 종용하였지만 이황은 학문에만 전념을 쏟아 부었든 것이다.


임금은 초현부지탄(招賢不至灘: 현인을 초빙하였으나 오지 않으니 한탄스럽구나!)

이란 제목으로 시를 짓고 이를 병풍에 그려 밤낮으로 처다 보았다고 한다.


이후 명종이 돌연 병사하고 선조가 즉위하였다.

그는 여러 차례 관직을 고사하였으나

끝내 거절할 수가 없어서 68세의 노구에 대제학의 중임을 맡고

선조에게 통치철학이 되는 <무진육조소>를 올렸다.

 

 

 

이후 선조에게 <논어집주>와 <주역>등을 강의하였고

마지막 봉사로 <성학십도>를 저술하여 선조에게 바쳤다.


69세에 이조판서에 제수되였으나 사양하고 낙향한 후

이듬해에 평상시대로 매화에 물을 주게 하고,

침상을 정돈시킨후 일으켜달라 하여 단정히 앉으니 조용히 그대로 세상을 떠났다.

그 때에 70세였다.


그가 죽자 선조는 3일간 정사를 폐하고 애도하면서

그를 영의정의 예로 장사를 지내도록 하였다하니

임금이 얼마나 그를 아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황 이퇴계가 지은 저서는 너무도 많다:

주자대전, 심경주부, 태극도설, 논어집, 천명도설, 연평답문,

숙흥야매잠주의 논문, 역학계몽전의, 백록동규집해, 태극무변, 등등이 있다.

 

 

 


이황은 이 같은 만학을 통해

조성 성리학의 최고봉에 이르는 한 편, 동양 유학의 한 산맥을 이룰 수 있었다.


젊어서는 학문을 위한 준비에 게으르지 않았고,

중년에는 스스로의 가치관을 실천하였으며,

노년에는 이를 바탕으로 학문을 쌓고 제자들을 길러

맹자가 말하던 인생삼락을 철저히 즐긴 사람이다.


영남학파 이황의 철학은 기호학파 이이 이율곡과 더불어

조선 500년 역사에 쌍벽을 이루는 최고봉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학풍을 따른 학자로는 당대의 유성룡을 비롯하여,

김성일, 기대승, 조목, 이산해, 이강이 황준량 등을 위시한 260여명에 달하고,


나아가서는 성혼, 정시한, 이현일,

이재, 이익, 이항로등을 잇는 영남학파 및 친영남학파파 사류 모두이다.

 

 

 

이는 조선 주리철학의 한 산맥을 형성하였으니

실로 한국 유학사상 일대 장관이 아닐 수 없다.


그만큼 이황의 산은 골이 깊고 봉우리가 높았던 것이다.

산이 높아야 골이 깊고, 골이 깊어야

넓은 강을 낼 수 있다는

이치가 바로 이황에 적합한 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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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13
허균(許筠)과 홍길동전

허균(許筠)과 홍길동전 명인전 #39

1569(선조 2)~1618(광해군 10) 49세

제공: 강 신 봉


허균의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 또는 학산(鶴山), 성소(惺所), 백월거사(白月居士)이다.

그는, 서경덕의 문하생으로 학자요

문장가로 명성이 높았든 동지중추부사 허엽(許曄)의 셋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허엽의 후취인 강릉 김씨로서 예조판서 광철(光轍)의 딸이다.

 

 

 

임진왜란 직전에 일본 통신사의

서장관으로 일본을 다녀온

허성(許筬)이 이복형이며, 허봉과 허난설헌은 동복형제이다.


5세 때부터 글을 읽기 시작하여

9세가 되였을 때에 이미 시를 지을 줄 알았다.

12세 때에 아버지를 잃고 더욱 시공부에 전념하였다.


학문은 유성룡에게 배웠으며,

시는 三唐詩人의 하나인 이달(李達)에게서 배웠다.

20세가 되던 1589년, 선조 22년에 생원시에 합격을 하였고,

25세(1594년)때에 庭試文科에 급제하여 검열,

시강원 설서등의 관직에 제수 되였다.


선조 40년(1607)에는 봄부터 가을까지

매월 3번씩 무려 27번이나 文臣月科에 장원을 할 정도로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였다.

 

 

 


26세(1594 선조 27) 때에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고 28세(1597) 때에는 重試에 장원을 하였다.

29세에 황해도 都事가 되였는데

서울의 기생들을 끌어 들였다는 죄로 탄핵을 받고 여섯달 만에 파직되였다.


후에 춘추관기주관, 형조정랑을 지내고

33세에(1602) 司藝, 사복시정(司僕恃正)을 역임하였고,

원접사 이정구의 종사관이 되어 활약하였다.


35세(1604)에 수안군수로 부임하였다가

불교를 믿는다는 탄핵을 받아 또 다시 벼슬길에서 물러 났다.


37세(1606) 때에는 명나라 사신 朱之蕃을 영접하는 종사관이 되어

넓은 학싯과 글재주로 이름을 떨첬고,

누님 허난설헌의 시를 주지번에게 소개하여 이를 명나라에서 출판케하였다.


이후 삼척부사가 되였으나

염불과 참선을 한다는 이유로 세번째 탄핵을 받았다.

다시 공주목사로

기용되어 庶流들과 가까이 지내다가 네번째 파직을 당했다.

 

 

 


그 후에는 부안으로 내려가

산천을 유람하며 기생 梅窓을 만났고 천민출신의 시인 유희경과도 교분을 나누었다.

40세( 1609년), 광해군이

등극하였을 때에 명나라 책봉사 이상의(李尙毅)의 종사관이 되였다.


이 해에 첨지중추부사, 형조참의가 되였다.

이듬해( 1610), 殿試의 시관으로 있으면서

조카와 사위를 합격시켰다는 (네번째) 탄핵을 받아 전라도 함열(咸悅)로 유배되었다.


이후 몇년간은 泰仁에 은거하였다. 44세(1613) 때에 계축옥사가 일어났다.

평소에 친교가 있던 서류출신의 서양갑, 심우영이 처형을 당하자

신변의 위험을 느낀 허균은 이이첨(李爾瞻)에게 부탁하여 대북(大北)파에 참여하였다.


이 해에 동지겸진주부사로 중국 명나라에 다녀 왔다.

이 때에 많은 책을 가지고 왔는데

그 중에 천주교 기도문과 지도가 섞여 있었다고 한다.


49세(1618) 8월에 남대문에 격문을 붙인 사건이 일어 났는데,

허균의 심복 현응민이 붙였다는 것이 탄로났으며,


허균과 기준격을 대질심문한 결과 역적모의를 하였다 하여,

허균은 그의 동료들과 함께 저자 거리에서 능지처참을 당하였다.


그의 묘는 경기도 용인시 원삼면 맹리 능골에 있다.

 

 

 

허균에 대한 평가는 총명하고 영발하여 문장과 식견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지만,

그의 사람됨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행동을 경박하게 하고

인륜도덕을 어지럽히며, 이단을 좋와하고, 행실을 더럽혔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몇 차례에 걸친 파직처분은 이를 증명하는 것이다.

한편 그는 혁명가적인 기질을 갖고 있었으며, 그러한 관련의 글을 많이 저술하였다.


확실한 정설은 아니지만 그가 국문학사상

그 첫 소설인 <홍길동전>을 지은 것으로, 이식의 澤堂集을 통하여, 인정되고 있다.


특히 그의 생애와 그의 논설 豪民論(백성을 무서워 해야 한다는

이론)에 나타난 이상적인 혁명가상을 연결시켜 볼 때에

그 구체성이 홍길동전으로 나타났다고 볼 수가 있을 것이다.

 

 


홍판서와 홍길동

 

그의 문집 官論, 政論, 兵論, 遺才論등에서 그는 민본사상과 국방정책,

신분계급의 타파, 인재등용, 붕당정치의 배척을 이론화하였다.

 

 

그는 유교의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불교와 도교 사상도 깊이 연구하였고 심취되여 있었다.


그의 작품은 아주 다양하다. 문집 성소복부고(惺所覆부고)는

자신이 편찬하여 죽기 전에 외손에게 전하였다고 하며,

그 부록에 은둔생활 방법에 대하여 쓴 <閑情錄>이 있다.


25세에 쓴 시평론집 학산초담(鶴山樵談)과 인생말년에 쓴

성수시화는 시비평의 안목을 잘 보여 주고 있는 자료이다.


반대파에 의해서도 인정받은 그의 시에 대한 감식안은

시선집 국조시산(國朝詩刪)을 통하여 오늘날 까지도 평가를 받고 있다.

 

 

 

이 박에 허문세고, 고시선, 당시선, 송오가시초, 명사가시선, 사체성당

등 시선집이 있었다고 하나 모두 전해짖는 않는다.


또 임진왜란의 모든 사실을 적은 東征錄은

선조실록 편찬에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


그 외에도 계축남유초, 을병조천록,

서변비로고, 한년참기 등이 있었으나 역시 전하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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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13
사임당 申씨..............우리의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현모양처

賢母良妻 사임당 신씨(師任堂 申氏)명인전 #40

1504 ~1551 48세

제공: 강 신 봉

 

 


우리의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현모양처의

어머니를 꼽으라면 단연 사임당 신씨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이 이율곡 선생의 어머니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분은 조선시대의 여류 문인이자 화가였고 남편을 훌륭한 사람으로 이끌은 良妻였다.


그녀의 품행은 타의 모범이 되였고,

체취에서 흘러 나오는 정서적 지성미가 주변 사람들로 하여금 감탄케 하였다.


4남 3녀, 7남매의 어머니로서 뿐이 아니라,

어려서 부터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고 자수와 바느질 솜씨도 아주 뛰여 났으며,

남편의 출세를 위하여 고독의 삶을 초월한 결심은 대단하였다.

 

 

 

사임당은 1504년(연산군 10년) 강릉 오죽헌(북평촌) 외가댁에서,

신명화의 둘째 딸로 태어나, 외조부의 가르침을 받으며 자라 났다.


19세에 李元秀와 결혼하였다. 결혼 몇달후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친정에서 3년상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 왔다.


이후 시가인 파주 율곡리에서 생활을 하기도 하였지만,

자주 강능에 내려가 홀어머니의 말동무를 해 드렸으며,

이 시기에 셋째 아들인 이율곡을 강능에서 낳았다.


38세가 되던 해에 시집살림을 주관하기 위하여

서울 청진동에서 살다가 48세 되던 해에 삼청동으로 이사를 갔다.


그 해에 남편이 평안도로 부임을 하기 위하여

아들과 같이 떠나 갔을 때에 사임당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사임당의 뛰어난 예술가로서의 재능은

일직부터 나타나 이미 7세 때에 안견(安堅)의 그림을 보고 사숙하기도 하였다.

 

 

 

그녀의 주된 그림 소개는 풀벌레, 花鳥, 매화, 난초, 산수화등으로,

이러한 畵題를 통해

나타난 그림은 마치 생동하는 듯한 섬세한 사실화이다.


그 뿐만이 아니라 글씨와 詩,

문장에도 주위의 격찬이 끊이지 아니 하였다고 한다.


율곡은 후에 어머니의 행장기를 저술하였는데,

여기서 율곡은 어머니의 예술적 재능, 우아한 성품

그리고 정결한 지조등을 소상하게 기록하였다.


사임당은 넷째 아들 우(瑀)와 큰 딸 매창(梅窓)

을 자신의 재능을 계승한 예술가로 키웠다.


대표작으로는 자어리도(紫魚里圖),

산수도(山水圖), 초충도(草蟲圖), 연로도(蓮鷺圖)등이 있다.

 

 

 

사임당 詩의 대표작으로는 <母親>,

그녀가 서울에서 강능에 계신 홀어머니를 그리워 하면서 지은 것이다.

 

천리가산만첩봉(千里家山萬疊峰)

산이 첩첩, 내 고향 천리길이건만


귀심장재몽혼중(歸心長在夢魂中)

자나 깨나 꿈 속에서도 돌아 가고파


한송정반쌍윤월(寒松亭畔雙輪月)

한송정 호수에 외로이 떠있는 달


경포대전일진풍(鏡浦臺前一陳風)

경포대에 부는 한 줄기 바람


사상백로항취산(沙上白鷺恒聚散)

흰 갈매기는 모래위에서 모였다가 흩어지고


파두어정각서동(波頭漁艇各西東)

고깃배들 바다위로 오고 가는데


하시중답임영로(何時重踏臨潁路)

언제 강능길 다시 밟아서


채복반의슬하봉(綵服斑衣膝下縫)

색동옷 입고 어머님의 슬하에서 바느질 할꼬

 

 

19세에 결혼한 남편 이원수는

학문과 예술등 모든 면에서 사임당만 아주 못하였든 것 같다.


사임당은 어느날 남편과 마주 앉아

서로 각각 헤어저서 10년간 학업을 닦은 뒤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하였다.


미침내 이원수는 부인을 처가에 두고 서울로 떠나게 되였다.

굳은 결심으로 성공을 하고 돌아

오라는 권고의 말을 되새기며 먼 길을 떠나려 하지만,


처가인 오죽헌에서 20리 밖에 아니 되는

성산까지 갔다가 날이 저물기를 기달려 다시 집으로 되돌아 왔다.


둘째 날은 40리를 갔다가 집으로 또 되돌아 왔고,

3일째 되던 날에는 대관령 반쟁이라는 곳까지 갔다가 역시 되돌아 왔다.

 

 


오죽헌 이율곡상

 

사랑하는 부인의 곁을

떠나지 못하는 이원수의 애타는 마음이 그러 하였다.


하지만 사임당은 단호하게 “대장부가

한 번 뜻을 세우고 10년을 작정하고 학업을 닦으러 길을 떠났건만,


이같이 세번이나 잇달아 되돌아 오신다면

당신이 장차 무슨 인물이 되겠소이까?” 하고 하품을 느끼니 이원수가 대답을 하였다.


“학업도 학업이지만 나는 도저히

당신을 떠나서 10년이란 긴 세월을 따로 있을 수가 없소이다.” 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사임당은 바느질 그릇에서

가위를 끄집어 내어 남편 앞에 두고,

“만일 당신이 이 같이 나약하고, 무능력 하시다면,


나는 이 세상에

희망이 없는 몸이라 어찌 더 오래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이 가위로 머리를 자르고 여승이 되여 산으로 가든지,


아니면 불측한 이야기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음이 더 좋을 듯 합니다.”

이 말 한 마디에 이원수는 눈이 번쩍 띄여,

그 날 밤에 부인과 작별을 하고 서울로 와서 공부를 하였다고 한다.

 

 

 

허나 원래 머리가

뛰여 나지 못하여 평생을 그저 평범한 관리로 지냈다고 한다.


사임당의 본명은 “신인선”이다. 사임당은 당호(堂號)이다.

당호란 본채나 별채를 구별하는 이름이다.

그리고 당(堂)은 안주인이 기거하는 건물을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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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13
캐나다현충일 (돌아오지 않은 병사의 마지막 詩)

2011.11.11


11월 11일은 이곳카나다의 현충일입니다.

온타리오 브램턴시 Meadowvale Cemetery에 위치한

한국참전용사 516기 전몰장병의 위패가 모셔진 "위령의 벽"에서

현충일 추모식이 거행 되였습니다. 그 식전의사진들입니다.


카나다는 1949년 한국정부를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한 이래


1950년 한국전쟁 발발시 총 26,791명의

카나다군이 UN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516명의 전사자와 1042명의 부상자를 내며

한국의 자유수호에 커다란 기여를 해준 고마운 나라입니다.

 


이 식전에는 캐나다 한국전 참전용사가

10명 밖에 참석하지를 못하였습니다.

작년에는 30명쯤 되였는데, 차츰 연세가 고령화 하여,

금년에는 그리 적은 분들이

오시게 된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두 분은 휠체어를 타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 행사는 캐나다의 KVA주관으로 계속하기가 어려울 듯 합니다.

여기에는 우리 한국 향군 50명과 가족들 30명,

토론토총영사를 비롯한 정부관계자 5명,


그리고 캐나다 현역 군인을 포함한 정부요인 20여명,

브람톤 시민 200여명, 브람턴 학생 단체 400여명,

경찰 30명, 소방대원 20명,

의료봉사요원 10명등 800여명이 참석을 하였습니다.


그 학생들은 우리의 애국가와

아리랑을 우리의 말로 연습을 하여잘 불러 주었습니다만

그 노래를 정녕 들어 줄 사람은 100명도 아니 되었습니다.


열심히 준비를 한 학생들에게 대단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보다 많은 우리 동포들이 참석하여 주실 것을 기도 드립니다.

 

 


헌화를 하는 데에 관계요인들 외에,

한무명의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가평전투에서

숨진 피터 스미스 상등병의 딸이라고 하였습니다.


자기 아버지가 한국땅에서

세상을 떠날 때에 자기는

어머니의 뱃속에 있었든 유복녀라고하드군요.


아버지의 훈장을 가슴에 달고 나와서

아버지의 영령앞에 화환을 올리며 눈물을 닦는

그 여인을바라볼 때에나도 눈시울이 뜨거워 젔습니다.


이후 나는 이 여인과 별도로 인터뷰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애달픈 내용의 글을 별도로 써 보았습니다.

"돌아오지 않은 병사의 마지막 시" 를 읽어 주십시요.

 

 

<돌아오지 않은 병사의 마지막 詩>

--- 2011년 11월 11일 현충일

기념식장을 다녀와서---

 


이 지구 반대편,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 가평이라는 마을 산골짜기에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외로운 언덕 위에 하늘을 보고 누어 있는 한 병사가 있었습니다.


그의 철갑모는 반쯤 벗겨저 있었고, 그의 손에는 아직도 무거운 총이 쥐어저 있었습니다. 그는 아직도 눈을 감지 못하고, 하늘을 울얼어 보며 못다한 임무를 저주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군화는 반쯤 시냇물에 잠겨 있어서 송사리 떼들의 밥이 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허리띠에는 아직도 두 개의 수류탄이 꽃혀 있었습니다. 그는 캐나다의 군복을 입은 22세의 젊은 병사였습니다.


그는 그렇게 1951년 4월 어느날 그 곳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시신이 전우 부루스에 의하여 거두어 진 것은 한 달이 지나서였습니다. 그렇게 죽어 간 그 병사는 <피터 스미스 상등병> 이였습니다.

 

중공군의 집중공격이 들어 올 때에 부루스 일등병이 다리에 총을 맞고 쓸어 젔습니다. 피터는 그를 업고 그 맑은 물이 흐르는 산속 시냇물을 건느고 있었습니다. 중공군의 계속공격으로 이번에는 피터가 쓸어젔습니다.


불행하게도 피터는 그 자리에서 불귀의 객이 되였고 부르스는 다행히도 다시 살아 났습니다. 부르스가 야전병원으로 후송되여 다리를 고치고 나서 피터를 찾으러 갔을 때에 피터는 아직도 그 산속 시냈가에 누워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뱃속에 든 한 아이를 남기고 피터는 그렇게 한국 전쟁터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피터의 아내는 한 평생을 재혼하지 아니하고 뱃속에 있던 딸, 그러니까 피터의 유복녀 딸만을 의지하고 살아 왔습니다. 그 딸이 아버지의 영령앞에 화환을 드리는 모습을 나는 보았습니다. 너무도 감격스럽고 아름다웠습니다. 눈시울이 뜨거워젔습니다. 가슴이 메어저 왔습니다.

 

한국전에 참가하여 숨을 거둔 아버지의 그 무공훈장을 가슴에 달고 나와서 아버지에게 화환을 증정하드군요. 이후 나는 그 여인을 찾아가 인사를 하고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 여인은 이야기 끝에 나에게 복사한 종이 한 장을 건네 주었습니다.


자기 아버지가 죽음의 땅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자기의 엄마에게 보내 온 최후의 편지라고 하였습니다.


2011년 11월 11일 브램턴 미도우베일 묘역, “위령의 벽”에서 거행된 현충일 행사장에서 있었든 일입니다. 나는 집에 와서 그 여인이 준 종이를 펴 보았습니다.

 

사랑한다는 절절한 편지의 마지막에 영국의 서정시인 Robert Burns의 정렬적이고 뜨거운 시 “A Red, Red Rose”(붉고 붉은 장미여)가 맑은 글씨로 적혀 있었습니다. 한 줄을 쓰고 생각하고 또 한 줄을 쓰고 그리워 하던 모습이 역력하게 그 글씨 체에 배어 있었습니다.

 

 

Oh my love is like a red, red rose, that’s newly sprung in June.

Oh my love is like the melody, that’s sweetly played in tune.

As fair art thou, my bonnie lass, so deep in love am I;

And I will love thee still, my dear, till all the sea go dry.

 

And the rocks melt with the sun; and I will love thee still, my dear.

While the sands of life shall run, and fare thee well, my only love!

And fare thee well a while! And I will come again, my love,

Though it were ten thousand mile!

 


이렇게 아름다운 시를 보내면서 “일만 마일이라 할지라도 나는 다시 돌아 온다”는 약속의 구절을 사랑하는 아내에게 보냈지만 피터는 “never returned soldier”가 되였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행복은 이렇게 숨을 거둔 병사들의 죽음의 대가입니다. 두 손을 모아 명복을 빌어 드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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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13
대한민국의 기적-한국을 아십니까?

대한민국의 기적-한국을 아십니까?

 

부모세대가

일궈온 우리대한민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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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13
군기념일... 누가 이땅을 소중히 여겼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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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13
참배(현충원)...역사의 교훈을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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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13
참배(대통령)...역사의 한모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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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13
다산실학마을...역사의 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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