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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환의 생활경제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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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의 건국 국부들(23)-잔 제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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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장(Chief Justice, 1789-1795)

1789년9월 워싱턴 미연방초대대통령은 외무장관직을 맡던 제이를 국무장관에 임명하려 했으나 제이는 사양했다. 워싱턴은 대신 대법원장직을 맡아달라고 부탁을 했고 제이는 흔쾌히 받아들여 10월 19일 미 초대 연방대법원장으로 임명되었다.

워싱턴은 제이 대법원장을 포함하여 6명의 대법관을 임명하였다. 일명 제이 코트(Jay Court)라고도 알려진 초대연방대법원은 제이 임직시 4건의 소송 판결을 처리했다.

그 중 1793년 소송에서 독립전쟁시 왕당파였던 치슴은 조오지아주정부가 자신의 재산을 몰수하는 조오지아주 판결소송을 연방대법원에 상소했다. 제이를 중심으로 연방대법원은 치슴의 손을 들어주었다.

조오지아주는 수정헌법 11조에 의해 개인은 주정부의 판결을 연방법원에 상소를 할 수 없다고 해석하였으나 제이는 연방사법부의 결정에 따라야 한다고 번복을 재강조했다. 즉 법의절대성에 의한 판결보다 소송의 공정성을 참작하는 연방사법부의 판례를 남겼다.

법보다 공정성이 더 중요하다는 제이의 판결은 2021년 2월 미연방 대법원이 트럼프 전 대통령 탈세 및 사기혐의수사에 필요한 서류를 뉴욕주 검찰총장에게 넘겨야 된다는 판결로 재 강조되었다.

현재 9명의 대법관 중 6명을 공화당 대통령들이 임명했다. 줄리아니의 진술에 따라 트럼프의 죄목이 들어나면 형사재판의 판결을 받을 것으로 해석된다.

 

제이 조약(Jay Treaty, 1794-1795)

1783년 파리조약대로 미국의 북쪽 항구와 5대 호수를 포함한 서북지역을 떠나지 않고 장악하고 있었던 영국은1793년과 1794년 영국이나 유럽을 향하는 미국수출을 방해하였다.

최악으로 군수물자를 싣고 프랑스로 향하는 300척 이상의 미국상선을 나포하여 선원들을 포로로 만들어 프랑스 해군과 해전을 벌dl게 했다. 이에 맞서 메디슨과 제퍼슨을 중심으로 하는 민주공화당은 영국과 무역전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미 독립전쟁시 미국을 도와주었던 루이 16세가 프랑스대혁명으로 처형당한 사실을 알게 된 해밀턴은 막강한 해군력을 가진 영국과 강화조약을 맺어야만 미국이 경제부국이 될 수 있고 훗날 영국과 대적할 수 있는 국방력을 키울 수 있다는 분석을 하였다.

따라서 해밀턴과 아담스 및 제이를 포함한 연방당은 친영정책을 고수했다. 무소속인 워싱턴은 연방당의 정책을 채택하여 해밀턴으로 하여금 강화조약내용을 만들어 제이에게 넘겨주고 제이를 영국행 특사로 임명했다.

1794년 11월 19일 제이는 영국런던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제이조약에 서명하였다.

1. 영국은 30척의 미상선 나포보상금 1,165만달러를 미국에게 지불하고 미국은 1775년 이전 영국에 진 빚 60만 파운드를 갚는다.

2. 영국은 5대 호수와 샴플레인 호수에 설치한 8개의 영국요새를 철수한다.

3. 미-영은 상호간 최우선 무역국으로 대우한다.

4. 미국은 영국의 반불무역정책에 동의한다.

5. 미국은 영국이 관할하는 케리비언 섬들과 제한적인 무역을 한다.

6. 미국이나 캐나다 원주민은 미국과 캐나다 국경의 제한을 받지 않고 이주할 수 있다.

다음과 같은 제이의 요청은 영국이 받아드리지 않았다.

1. 영국의 미국상선 나포중지.

2. 영국이 풀어준 흑인노예들에 대한 변상.

위 강화조약을 접한 제퍼슨을 포함한 민주공화당은 제이를 반역자로 몰고 미 국민들을 동요시켜 밤낮으로 곳곳에서 제이의 모의 화형식을 거행했다. 워싱턴은 1795년 6월2일 미 상원을 설득하여 20대 10으로 제이조약을 통과시켜 1796년 2월 29일 제이조약실효에 들어갔다.

칼자루를 든 영국과의 굴욕적인 제이조약으로 후에 미국이 전세계 패권국이 될 수 있었다.

참고로 1964년 한국에서도 박정희의 한일 협정은 굴욕적인 외교라고 국민의 울분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 협정이 한강의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는 사실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뉴욕주지사(1795-1801)

제이조약으로 인기가 하락된 제이는 1796년 대통령 선거에서 패했다. 그는 1795년 대법원장직을 사임하고 1801년까지 뉴욕주지사로 정치생활을 계속했다.

 

은퇴와 사망(1801-1929)

1801년 정계에서 은퇴한 제이는 뉴욕주 웨스트체스터에서 농사를 지었다. 불행하게도 1803년 5월 8일 45세의 부인 세라 리빙스턴 제이(1757-1802)가 사망했다.

1774년 제이와 결혼한 부유가정출신의 세라 제이 부인은 그들 사이에서 난 6자녀뿐만 아니라 제이의 눈이 먼 두 형제와 정신질환으로 고생하는 형제를 거의 혼자 돌봐야 하는 정신적 재정적 스트레스가 조기사망의 한 원인으로 해석된다.

1829년 5월4일 제이는 84세의 나이에 중풍으로 별세했다. 그의 유언대로 시신은 부인과 함께 뉴욕주 라이 제이 에스테이트에 안장되었다.

성격이 조용한 제이는 워싱턴이 인정한 미 역사상 최고의 영웅적 외교가로 인정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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