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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友情)
leed2017
2020-11-09
우정관계가 이루어지자면 둘 사이의 신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는 것입니다. 신뢰없는 친구는 있을 수 없습니다. 신뢰란 서로 믿고 의지하는 마음을 가리키지요.
나는 어린시절, 경상북도 안동 예안면 소재지에 있는 예안국민학교를 다녔습니다. 4학년 때 서울로 전학 갔다가 6.25사변이 일어나 500리 길을 걸어 예안으로 돌아와서 5, 6학년을 마쳤으니 2년은 내 학년 아이들과 머리를 맞대고 공부를 한 셈이지요. 6년을 같은 반 아이들하고 같이 책 읽고, 노래 부르고, 공차고, 싸움박질하고, 소풍가고, 학예회, 운동회를 하다보면 아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의 아버지, 어머니, 누나, 동생까지 서로 알게 됩니다. 개나 고양이 같은 말없는 미물들도 6년을 같이 있으면 정이 들텐데 하물며 사람이야-. 그래서 초등학교를 함께 다니던 아이들은 언제 어디서 만나도 말할 수 없이 반갑습니다. 우리에겐 서로 신뢰가 있지요. 청순 무구하던 그 옛날로 돌아가서 그 시절 그 마음으로 얘기를 나누는 것이니 어찌 신뢰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나이가 50, 60, 70으로 옮겨오면서 우정을 나누기는 점점 어려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체면도 차리고, 이해타산도 하게 되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도 생각해 봐야 하는 등 챙겨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한마디로 마음에 때(垢)가 너무 많이 끼여서 그렇지 싶습니다.
저명한 수필가 금아(琴兒) 피천득은 ‘우정’이라는 수필에서 친구가 없는 것 같이 불행한 일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우정을 얘기하기 위해서는 관중과 포숙아의 얘기를 빼놓을 수 없지요. 관중 포숙아는 둘이서 장사를 같이한 적도 있고 커서는 서로 다른 나라의 임금을 모시는 재상이 되어 두 나라 간에 서로 싸운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차이를 떠나서 둘은 서로의 재능을 인정해주고, 서로 믿고 도와주었습니다. 고등학교 고문시간에 당나라의 시성 두보가 지은 시(빈교행: 가난한 때 사귀는 우정에 대한 글)에는 당시 세상 사람들의 경박하고 친구사이에 신의가 없음을 한탄하여 “그대들은 관중과 포숙이 가난할 때 우정을 보지 않았느냐?”라고 하며 이들의 우정을 칭찬하던 글을 읽던 생각이 납니다. 관중과 포숙아가 다정한 형제처럼 살았을 때는 지금부터 2,500여 년 전 중국의 춘추(春秋)시대. 지금보다는 몇갑절 더 단조롭고 생활이 복잡하지 않던 시대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우정을 지키며 다정하게 살다간 이름난 사람은 누굴까요? 아마도 한음(漢陰) 이덕형과 백사(白沙) 이항복을 꼽을 수 있지 싶습니다. 이 둘은 당시에 매우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서 탈없이 자라서 평생 막역한 우정을 지켰습니다. 세상에 알려진 것처럼 백사와 한음은 아주 어릴 때부터 불알친구가 아니요 백사가 23살, 한음이 18살, 둘 다 결혼을 하고 나서 교우가 시작되었지요. 그러나 둘 다 격랑의 세상에서 난세의 재상으로 나랏일을 하느라 정신없이 뛰어다니던 큰 인물들입니다.
한음이 죽었을 때는 백사(이항복은 오성부원군에 봉해져서 오성대감이라고도 불립니다)는 벼슬을 떠나서 노원에 물러나 있었습니다. 한음의 부음을 들은 백사는 용진에 직접 가서 벗의 시신을 염습해주고 장례를 치러주었다 합니다. 그는 한음의 죽음에 대해 절절한 애도의 시 한편을 남겼습니다.
외진 산 숨어 들어 말없이 지내다가/흐느끼며 남몰래 한음을 곡하노라 … /사람들 살피면서 말 바꾸기 좋아하네(流落竅山舌欲? …薄俗?人喜造言)
당시는 편지 한 조각이나 취중에 한 말 한마디 때문에 화를 당한 사람들이 많았을 정도로 살벌한 분위기였습니다. 오늘날의 박정희, 전두환 군사독재 시절과 같지요. 상가라고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오고 간 인정보다는 서로의 신뢰가 두텁게 쌓인 사이로 볼 수 있는 사람으로는 포은(圃隱) 정몽주와 삼봉(三峯) 정도전을 들 수 있습니다. 이들은 어릴 때의 정이 두텁다기 보다는 서로 엇갈리는 방향의 길을 걸으면서도 서로의 재능을 인정해주고 두터운 신뢰감을 이룩했습니다. 포은은 고려왕조가 별 탈없이 이어나가기를 꾀하는 보수개혁파인 반면 삼봉은 모두 뒤집어 엎어 버리고 새 왕조의 창업을 꿈꾸는 혁명아. 바로 이 점이 두 사람이 서로 다른 행보를 걷기 시작한 시발점이지요.
두 사람은 동갑내기였습니다. 열정이 끓어오르던 포은은 시원시원하게 판단을 내리는 톡톡 튀는 성격의 소유자. 삼봉은 매사에 조심스럽고 신중한 사상가로 함부로 입을 열지 않았으며 섣불리 나서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두 사람 중에 어느 하나가 아프면 문병을 가고 꽃피고 새 우는 봄이 오면 벚꽃 아래서 함께 술을 마셨으며 눈 오는 밤 산사에 모여 같이 설을 쇠기도 했다는 내용이 이승수가 쓴 책에 적혀 있습니다. 삼봉은 포은을 자기 스승처럼 존중하면서도 그의 30년 지기임을 자랑합니다.
포은은 당시의 귀족층 가문에서 축복받으며 태어났고 삼봉은 그 반대로 천민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포은은 당대의 석학으로 이름을 날린데다가 정치적 수완 역시 탁월하여 쓰러져가는 고려왕조의 대들보를 거의 혼자 힘으로 떠받치고 있던 인물. 그의 동갑내기 봉화에서 온 삼봉을 만났을 때 삼봉의 재능과 배포, 도량이 보통사람이 아니었음을 한눈에 알아본 것이지요. 그 후 이 둘은 신분상의 차이를 극복하고 둘이 꿈꾸던 개혁과 포부에 부풀어 포은은 선죽교 다리 위에서, 삼봉은 친구 남은의 집에서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할 때까지 우정은 계속되었습니다.
좋은 친구란 믿음이 앞서야 합니다. 서로를 생각해서 상대가 말을 꺼내기 전에 배려를 해주는 따스한 취향이 있어야 하지요. 금아의 말을 빌리면 우정의 가장 큰 비극은 불신(不信)에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진실한 우정을 나눌 기회가 자꾸 줄어듭니다.
요새는 자주 주거지를 옮겨가며 살지 한군데 눌러앉아 사는 사람은 드뭅니다. 입학시험이나 취업, 면접에서는 “네가 되는 날이면 내가 떨어진다”는 식의 경쟁의식이 늘어가는 사회지요. 옛날 죽마고우도 심사가 뒤틀리면 형틀에 매달아 고통을 주는 세상. 이 모두가 불신에 휘발유를 뿌리는 격입니다.
1249년 전에 이 세상을 다녀간 시성 두보는 친구 사이에 신의가 없음을 한탄했습니다. 앞으로 1000년 세월이 흐르고 나면 어떨까요. 그때 사람들은 우정에 있어서 신의가 더 늘어났겠습니까. 내 생각으로는 그때 사람들은 오늘날 우리의 우정을 부러워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위안으로 삼고 살아가는 수밖에 없지요. 인간의 문명이 발달할수록 정(情)이 오가는 우정같은 것은 별로 대접을 받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201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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