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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漢詩) 유감
leed2017
2020-02-21
나는 한시(漢詩)를 자유롭게 읽을 수 있는 실력이 없다. 우리말로 옮겨놓은 것을 보고 나서야 겨우 원문의 뜻을 이해하는 정도다. 그러나 한시를 무척 좋아한다. 같은 한시라도 여러 사람들이 제각기 다르게 우리말로 옮겨놓은 것을 보면 셋이면 셋, 넷이면 넷 다 다르지만 비슷해서 형제들을 만나는 것 같아 재미있다.
나는 송시(宋詩)와 당시(唐詩)도 잘 구별 못한다. 송시(宋詩)는 인생에 대학 철학적 음미가 강하고 화려한 수식이 적다는 것. 이에 비해 당시(唐詩)는 산문적이고 웃음과 눈물이 있고 인간의 체취가 물씬 풍기는 시라는 것은 안다.
송시가 머리로 쓴 시라면 당시는 가슴으로 쓴 시. 나는 이것을 내 나름대로 소화해서 동양의 연(軟)수필과 서양의 에세이 간의 차이로 생각한다. 나의 이러한 교과서적 설명도 어디에서 훔쳐온 개념적 설명에 지나지 않는 것. 예를 들어가며 설명할 정도의 이해는 없다.
한시에 관한 책을 읽다 보면 미친 듯 시에 대한 몰두와 집념을 가진 천재적 작가나 예술 애호가들에 관한 이야기가 가끔 나온다. 정민 교수의 ‘한시미학산책’을 보면 시인들 중에서는 미친 듯한 열정을 보인 기인(奇人)들이 여러 명 등장한다.
예로 당나라 때 유희이(劉希夷)라는 시인은 “해마다 해마다 꽃은 비슷하건만 해마다 사람은 같지 않네(年年歲歲花相似, 歲歲年年人不同)”라는 내용의 ‘대비백두옹(代悲白頭翁)’이란 시(詩)를 지었는데 그의 장인 송지문이 위 시구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자기에게 줄 것을 간청하였다.
유희이는 그러마고는 했으나 끝내 주지는 않았다. 이에 격분한 송지문은 하인을 시켜 유희이를 죽여버렸다. 죽으면서까지 시를 주지 않는 유희이를 나무라야할지 사위를 눌러 죽인 송지문을 나무라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시에 대한 광적 애착으로 생긴 비극임에는 틀림없다.
어렸을 때 집에서 들은 이야기다. 우리가 맨 처음으로 배웠을 천지현황(天地玄黃)이요 우주홍황(宇宙洪荒)이라고 시작되는 천자문(千字文)을 지은 주흥사(周興嗣)는 죽을 죄를 지었다. 밤사이에 좋은 글을 지으면 살려주겠다 하여 밤사이에 ‘천자문’을 짓고 수염과 머리털이 하얗게 되어버렸다는 얘기가 생겨난다. 스트레스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인가 ‘천자문’을 백수문(白首文)이라고도 한다.
이런 기행과 광기를 보면 이들 시인에게는 시를 짓는다는 것은 삶의 원동력이 되는 모양, 시를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모양이다. 수필은 시(詩)와는 다른 것이지마는 나는 논문이고 수필이고 이런 광기를 부려가며 써 본 적도 없고 이 정도의 광기나 애착을 가진 사람을 가까이 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옛날에는 시를 쓰는 사람들이 오늘에 비해서 무척 적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들이 가진 높은 사명감 때문에 영혼의 고뇌를 참아 가면서 오직 시를 위해 인생의 심혈(心血)을 다 쏟아 부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새는 날마다 새로 나온 시집(詩集)이 산 같이 쌓이고 너나 할 것 없이 시인 아닌 사람이 드문 세상.
세상에 이름을 얻은 시인이든 아니든 오늘도 시(詩) 같은 시를 쓰는 시인은 자기의 시적 열정을 발산하려고 피를 말리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가끔 들여다보는 당, 송때의 시(詩)는 물론 우리의 옛 시는 덜 추상적이어서 읽으면 무슨 소리인지 안다. 그러나 요즈음 쏟아지는 시(詩)들은 지나치게 관념적이랄까 추상적이어서 읽어도 읽어도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다.
그림으로 말하면 이 그림이 토끼를 그린 것인지 고슴도치를 그린 것인지 나 같은 사람 눈으로는 구별하기 어렵다. 그러니 이 토끼가 좋은지 저 고슴도치가 좋은지 판별은 말할 것도 없고…. (201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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