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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수건
leed2017

  

 오래간만에 아내와 함께 백화점 구경을 갔습니다. 여기저기 목적 없이 돌아다니다가 어느 옷 가게에 들어갔지요. 진열대에 놓인 손수건이 눈에 띄길래 색깔이 하얀 놈으로 몇 개 골라 집어 들었습니다. 나는 낙동강 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시골뜨기라 그런지 손수건 같은 것을 챙겨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도시 아이들의 세련된 행동은 없습니다.


 손수건은 옛날부터 이별의 상징입니다. 이별-눈물-손수건의 삼위일체이지요. 여명기에 장세정이라는 가희(歌姬)가 부른 ‘연락선은 떠난다’는 노래가 있습니다. 해방전 부산과 일본 시모노세끼(下關)를 오가던 여객선을 노래한 것이지요. 그 노래에 손수건이 나옵니다. 그냥 손수건이 아니라 눈물 젖은 손수건입니다.


‘쌍고동 울어울어 연락선은 떠난다 / 잘가소 잘 있어요 눈물 젖은 손수건 / 진정코 당신만을 진정코 당신만을 사랑하는 까닭에 / 눈물을 흘리면서 떠나갑니다 / 아이 울지 마세요 울지를 말아요…”


 장세정의 청초하고 색기(色氣) 어린 목소리는 강제 혹은 반강제로 일본에 끌려가 혹사당한 노동자, 부푼 꿈을 안고 신학문을 배우려는 젊은이들을 떠나보내는 부모 형제 친지들의 슬픔을 애절하게 토해냈습니다.


 솔직히 나는 공항이나 기차 정거장 같은 데서 손수건을 흔들며 정든 사람을 보내는 장면은 한 번도 본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 상상의 세계에서 ‘손수건’은 정든 사람을 보내며 흔드는 하얀 노스탤지어(nostalgia)의 깃발입니다. 헤어지는 마당에서 손수건은 단순히 눈물을 닦아내는 구실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눈물의 시원(始原)인 정(情)을 확인해 주고 연결해주는 매체(媒體)입니다.


 한국 E여대에 있을 때 내 연구실에 꽃이나 사탕을 들고 오는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이들을 받곤 했습니다. 사탕을 너무 많이 먹으니 몸에 해롭겠구나 걱정하던 중 동료 한 사람이 웃으면서 “이제 메뉴를 바꿔 보는게 어때요” 하는 농담성 충고를 받고 와인(wine)으로 바꿨습니다. 바늘 도둑이 소 도둑으로 한 단계 뛰어오를 찰나입니다. 이 후로 학생들은 사탕대신 와인을 가져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학생들을 착취하다가는 내가 탐관오리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스쳐갔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 학생들이 가져오는 정표(情表)에서 따뜻한 인정을 느끼곤 했습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작은 정표를 뇌물로 생각하고 거절한다는 것은 자기의 윤리, 도덕관에 대한 자신감이 없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사랑과 정(情)은 오누이와 같다는 이론을 내놓은 수필가가 있습니다. 내가 틀렸는지도 모릅니다마는 나는 사랑의 감정 이전에 아침 안개처럼 사방에서 조용히 스며들어 퍼지는 것이 정(情)이라고 봅니다. 사랑이 한 낮 이글거리는 태양이라면 정은 은은한 달빛입니다. 사랑의 감정에는 색정(色情)의 의미가 짙지마는 정(情)은 이 사랑의 색정은 물론, 부모 형제 친구에 대한 사랑, 스승과 제자 간의 정분(情分), 고향의 강이나 뒷동산 같은 자연이나 물건에 묻은 손때 등 모두를 포함하는 말입니다. 삶이란 곧 정(情)을 교환하는 과정이지요. 사람은 정 때문에 웃고 사랑하고, 정 때문에 울고 서러워하고, 미워합니다.


 이 세상에 정(情)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이 있을까요. 외로워서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낫다는 사람도 결국 정(情)에 주린 그의 마음을 쏟아 놓을 사람을 아직 만나지 못했다는 말과 다름이 없지요. 이처럼 사랑의 발원지가 되는 정(情)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라고 해서 외면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옛날 군사정권의 분탕질이 한창이던 어느 스승의 날에 학생들이 선생님 가슴에 꽃 한송이도 달아들이지 못하게 한 것이 생각납니다. 그야말로 빈대 한 마리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격이지요.


 사랑받던 손수건이 이제 해가 갈수록 사람들로부터 푸대접을 받고 있는 것 같아 애석한 마음이 듭니다. 우선 이별의 슬픔으로 눈물 닦을 일이 급격히 줄어들었습니다. 미국 뉴욕 가는 길이 전라도 목포 가는 것쯤으로 생각되는 세상, 정든 사람이 목포를 간다고 눈시울을 붉힐 사람이 있을까요?


 현대 생활은 정(情)이 나타나는 모습도 옛날과는 다르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가깝게 지내던 친구의 영결식장에서 찬송가를 부르면서 밀린 세금, 치과 약속, 식료품, 아이들 캠핑 보낼 준비 등을 걱정해야 합니다. 한가로이 친구를 잃은 슬픔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지요. 이처럼 현대 생활은 우리를 잠시도 가만 두지를 않습니다.


 부푼 꿈을 안고 김포공항을 떠나던 날이 생각납니다. 나는 손 흔들어줄 가족도 없는 사람 모양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비행기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습니다. 나중에 누나가 전해주는 말씀을 따르면 어머니는 나를 태운 비행기가 하늘 저쪽으로 사라질 때까지 아무 말씀 없이 그쪽 하늘만 바라보시다가 누나가 건네주는 손수건을 받으시더랍니다. 꼭 47년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201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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