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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懲毖錄)
leed2017

 

 <징비록>이란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당사 좌의정으로 선조를 모시고 의주까지 피난을 갔다 와서 일선에서 전투도 지휘하고 온갖 전쟁이 주는 화(禍)를 몸소 겪은 서애(西厓) 류성룡이 한문으로 쓴 회고기다. <징비록>의 징(懲)은 징계할 징, 비(毖)는 삼갈 비이니 징비(懲毖)는 "나의 지난 잘못을 반성하여 후환이 없도록 삼간다(子其懲而毖後患)"는 시경에서 따온 말이다.


 내가 <징비록>이라는 이상한 이름의 책이 있다는 것을 안 것은 고등학교 국사시간을 통해서다. 대학입시를 위해서는 징비록-류성룡, 동사강목-안정복, 어우야담-유몽인, 흠흠신서-정약용, 반계수록-유형원 등 책 이름과 저자의 이름을 연상하는 것이 그 당시 입학을 위한 필수적 지식이었다.(얼마나 외웠으면 아직도 입에 익어서 자연스레 나올까!) 무슨 책인지, 왜 썼는지에 대해서는 알 필요가 없는 수박 같핥기의 지식.


 1592년 4월 13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가토 기요사마(加藤淸正), 구로다 나가마사(?田長政) 등의 이끄는 왜군 15만 명이 부산 앞바다에 나타났다. 우리가 말하는 임진왜란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 쉰 한 살의 서애는 좌의정으로 벼슬살이를 하고 있었다.


 왜구는 부산성, 동래성을 차례로 집어 삼키고 18일 만인 5월 3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이렇게 나는 듯이 빨리 서울에 올 수 있었던 것은 전국이 무방비 상태였다는 말이다.

선조는 황급히 서울을 버리고 칠흙 같은 밤에 사정없이 퍼붓는 비를 맞으며 임진강을 건너 피난을 갔다. 이때 왕을 따르는 무리들은 서애를 포함하여 백 명도 채 안되었다고 한다.


 왕이 대궐을 떠나 피난길에 오르자 고된 노동과 신분적 멸시에 시달렸던 노비들이 노비문서를 보관하는 창고는 물론, 다른 건물에도 불을 질러 솟아오르는 불길은 하늘이 불타는 것 같았다고 한다. 일본 측 기록에도 왜군이 한강을 건너기도 전에 왕궁이 불타는 것으로 하늘이 붉더라고 적혀 있다.


 서울을 떠나 북으로 도망가는 임금을 보고 밭에서 일하던 어떤 농부 한 사람이 울부짖으며 “나라님이 우리를 버리고 가시면 우리들은 누굴 믿고 살아야 합니까?” 하고 화가 난듯 소리치더라는 것이다. <징비록>을 풀어 쓴 박준호 교수에 의하면 이 말은 정말 밭에서 일하던 농부가 임금의 행렬을 보고 한 말이라기보다는 서애 생각이라는 것. 즉 백성들과 합하여 결사항전의 의지를 보이지 못하고 허겁지겁 도망치기에 바쁜 겁보 임금에 대한 서애의 못마땅함을 이 농부를 등장시켜 간접으로 표현했다는 것.


 선조는 피난 중에 좌의정으로 있던 서애를 영의정으로 임명했다가 그날로 다시 해임했다. 하루 만에 승진-파직이 된 서애는 한동안 아무 직책 없이 임금을 호송하였다. 비록 아무 직책도 없는 신분이었지만 그는 최전선에서 병사들과 함께 묵묵히 전쟁을 이끌어 갔다. 이같은 서애의 백의종군은 시기와 모함으로 직위를 박탈당하고 감옥살이까지 하다가 백의종군하여 애국을 행동으로 보여준 충무공 이순신과 같다.


 서애는 <징비록>에서 하느님이 조선을 두 번 도와주었다고 했다. 첫 번째는 평양을 점령한 왜군이 무슨 일인지 당분간 북상을 하지 않음으로써 명(明)나라의 원군이 올 시간을 번 것이고, 두 번째는 이순신이 한산도에서 왜의 수군을 크게 격파시킴으로써 조선 해안지역과 전라도 곡창지대가 온전하게 되어 군량미 조달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선조 37년 임진왜란에 대한 논공행상을 내릴 때 문신 공신은 86명인데 비해 왜군과 직접 싸운 무신 공신은 18명에 불과했다. 86명의 문신 공신 중에는 내시가 24명, 선조의 말을 관리하던 사람들이 6명이나 되었다. 선조는 이순신처럼 목숨을 바쳐 왜구와 싸운 사람보다는 자기 옆에서 시중들어 주고 보살펴 주는 내시가 임진왜란에 더 큰 공을 세운 사람들로 본 것이다.


 이때 서애는 1등 공신에는 못 오르고 겨우 2등 공신에 올랐다.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는 이에 대해 불평 한마디 없었다 한다. 공신으로 지명된 사람들의 얼굴을 그려주는 화공(?工)이 서울에서 내려왔을 때 그는 영정을 그리지 않고 조용히 그를 돌려보냈다.


 난리가 끝나고 임금 선조는 피난 중에 자기 옆에서 묵묵히 자기를 보좌해 주고 윤두수, 이항복 대신들과 함께 전쟁에 관한 일을 신속, 유능하게 처리해주던 서애가 그리웠다. 왕은 몇 번이나 선물을 보내고 사람을 보내어 서울에 와서 자기를 보필해 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서애는 응하지 않고 고향에 있는 옥연정사(玉?精舍)에서 조용한 나날을 보냈다. 


 서애는 청백리(淸白吏)였다. 그가 죽었을 때 장사지낼 돈이 없어서 주위 사람들이 십시일반 거두어 주었다고 한다.


 우리 부부가 사는 방 2개가 있는 콘도미니엄 서재에는 내가 10여 년 전 서울 강남 어느 화랑에 들렸다가 사들고 온 하외 병산서원의 만대루(晩對樓)를 그린 큰 판화가 하나 걸려 있다. 만대루 좌우로는  서애의 시(詩) 두 수가 걸려있는 홍선옹 님의 작품이다.

 

 

지는 달은 희미하게 먼 하늘로 넘어가는데
까마귀 다 날아가고 가을 강만 푸르네


….


두 해 동안 전란 속에 떠다니느라
온갖 계책 지루하여 머리털만 희었네
서러운 눈물 끝없이 두 눈에 흘리며
아스라한 난간 기대어 북극만 바라보네

 

 

 오늘 나는 <징비록>을 읽었다기보다는 서애 류성룡이란 사람을 만나 술 마시며 웃고 밤이 늦도록 이야기를 나누다 방금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20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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