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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leed2017

 

 편지를 받아본 적이 옛날이다. 마지막으로 받아본 것이 작년 이른 봄, 한국에 있는 저명한 수필가 K선생이 보내온 것이다. 선생은 자기보다 10살 아래인 나에게 깎듯이 존댓말을 써가며 200자 원고지에 정(情)이 듬뿍 담긴 사연을 또박또박 적었다.


 “. 어느 제자가 연하장을 보내왔는데 한자로 花香千里行 情香萬里薰(화향천리행 정향만리훈 : 꽃의 향기는 천리를 가고 정의 향기는 만리에 풍긴다)라고 써왔습니다. 형의 글을 읽으면서 정이 너무 깊게 든 친구 같아서 며칠 동안 기뻤습니다. 5월에 한국에 오신다고 했는데 또 편지를 썼으니 받는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情香萬里입니다. ”


 내가 편지를 처음 써 본 것은 초등학교 때, 6.25 전쟁으로 일선에 나가 있는 국군장병들에게 의무적으로 써야 하는 위문편지였지 싶다. ". 살을 에이는 북풍(北風)은 몰아치는데 백만 조류(鳥類)만이 추위에 제집을 찾는 듯이 짹짹이며 희롱하는 자세…" 누구에게서 훔쳐온 구절인지 생각은 나지 않으나 훔쳐온 것만은 분명하다. '북풍' '희롱하는 자세' '백만 조류' 따위의, 아이 말이 아닌 이 유치한 표현은 전쟁의 포화가 멎을 때까지 2, 3년간 잘 써 먹었다.


 전쟁이 끝나고 나는 집을 떠나 타향으로 떠돌며 주머니가 빌 때는 용돈을 마련할 목적으로 아버님께 드리는 편지 부주전(父主前) 상서를 부지런히 썼다. 지금 시세로 한 10~20만원 벌어보자는 게 내 편지의 궁극 목표.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아버님께 드리는 편지는 사뭇 장중한 전주곡으로 시작되었다. 


 "아버님 내외분 기체후 일향만강 하옵시며 근력(筋力)도 좋으신지요. 자식들 때문에 주야로 노심초사(勞心焦思) 걱정하시고 고생하시는 아버님, 어머님을 볼 때 자식된 도리로 효도 못하는 것이 한(恨)스럽고 두중(頭重) 하옵니다. " 는 등의 되바라진 말. '노심초사'와 머리가 무겁다는 뜻의 '두중(頭重)'이란 말은 큰형님이 아버님께 드리는 편지를 훔쳐보고 실례해온 말이다. 별다른 할 말이 없을 때는 집에서 보신탕용으로 기르는 똥개 안부도 하다가 끝에 가서 슬쩍 돈 얼마만 보내주시면 학업에 도움이 되겠다는 말을 흘렸다.


 편지를 쓸 때 하고 싶은 말을 맨 뒤로 미루는 것은 나 뿐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의 공통점이지 싶다. 편지뿐만 아니라 사회교제 전반에 걸쳐 다 그런 것 같다. 청주 어느 대학에서 교단에 서고 있는 내 대학교 후배 P교수는 이 현상을 가리켜 한국사람들의 이러한 특성을 지적한 외교관 이름을 따서 ‘프랑시 법칙’이라 불렀다. 자기 신상에 대해 선생님과 상의하고 싶은 학생이 막상 선생님을 마주대하고 앉아서는 엉뚱한 이야기만 늘어놓다가 헤어질 때쯤에야 속 이야기를 우연 슬쩍 지나가는 말로 흘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학생 상담에서 아무리 학생이 제 발로 걸어 들어와서 상담을 청한 학생이라 해도 “무슨 일로 왔나? 내가 어떻게 도와주면 좋겠어?(What brought you here. How can I help you?)” 따위의 미국 상담 교과서에 실린 화법(話法)은 한국문화에서는 안 먹혀 들어간다는 것. 대신 날씨나 시국 이야기, 스포츠 소식 등 엉뚱한 이야기로 시작하면 나중에 진짜 이야기는 저절로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요새는 편지를 주고받는 경우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사라져가고 있다. 두 말 할 것도 없이 가장 큰 이유는 컴퓨터, 전화 등 교통수단의 발달 때문이다. 컴퓨터로 오는 편지를 받을 때면 나는 무슨 영수증이나 공지사항을 통보받는다는 기분이 들 때가 많다. 생화(生化)와 조화(造花)의 차이랄까. 내가 생각하는 편지란 쓴 사람의 손때가 묻어있고 그 사람 마음의 그림자를 읽을 수 있는 편지다. 내 고정관념 때문인가. 컴퓨터로 온 편지에서는 이런 감정은 느껴보기 힘들다.


 해방이 되기 꼭 7년 전, 백년설이라는 뽕짝가수가 불러 인기를 모았던 윤도순 작사, 전기현 작곡의 <일자일루(一字一淚)>라는 가요가 있다. 70년 묵은 곰팡내가 풍겨오지만 그 노랫말에 담긴 애절한 순정은 오늘날까지 살아 숨쉬는 순애보(純愛譜)다.

 

 


못 보낼 글을 적던 붓대 멈추고
하늘가 저 먼 곳에 꿈을 보내니
눈물에 젖은 글월 얼룩이 져서
가슴속 타는 불에 재가 되려네

 

일천자 글월이니 한방울 눈물
눈물은 내 마음의 글월이런가
글월은 내 마음의 눈물이런가
한 글자 한 눈물에 재가 되려네

 

 

 오늘 같은 깊은 겨울날에는 봄바람처럼 훈훈한 인정과 쓴 이의 손때가 묻은 편지를 받아보고 싶다. 우리가 사는 콘도미니엄 지하실 창고에 가면 그 옛날 45년 전 내가 검은 머리칼, 청운의 뜻을 품고 캐나다에 왔을 때 가족들과 친구들에게서 받은 편지를 모아 둔 상자가 하나 있다. 이 상자라도 꺼내서 헤쳐 보면 허기진 내 그리움이 약간이라도 위안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그 편지상자 속에는 내가 1966년 유학을 떠나 캐나다 밴쿠버에 왔을 때 어머님이 내게 보내신 글월도 있다. 어머님 가신 지가 올해로 35년이 되었고 편지는 그 음습한 창고 안에 그대로 있다. (20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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