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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향만리(情香萬里)
leed2017

 


꽃의 향기는 천 리를 가고 정(情)의 훈기는 만 리를 간다
(花香千里行  情香萬里?)

 

 

위의 시구는 십여 년 전 한국에서 수필가 김시헌 선생이 내게 보낸 편지에 쓰신 것으로 참 멋있는 구절이다 싶어 적어 두었던 것이다. 김시헌 선생은 수필계의 원로로 가을이면 청머루 다래가 무르익는 내 고향 태산준령 안동 고을에서 자란 어른. 무뚝뚝하게 보일 정도로 말수가 적고 조용하신 분이다.


 그런데 정이 만 리를 가도 훈기를 잃지 않는 것은 좋으나, 우리는 정을 너무 소중히 여긴 나머지 정의 '노예'가 되어 정(情)이 생활 구석구석에서 우리를 짓누르고 있어도 우리는 별 구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정을 주고받는 데서 삶의 의미를 찾는다. 우리는 정 때문에 웃고 정 때문에 운다. 정 때문에 미워하고 정 때문에 서러워한다.


 정이란 사람뿐 아니라 우리가 자주 얼굴을 대하는 물건, 산이나 강 같은 자연이나 고양이 같은 동물에서도 정을 느낄 수 있다. 정(情)은 일방통행로로 갈 때가 많다. 우리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불렀던 <졸업식 노래> 제 2절은 "잘 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 선생님 저희들은 물러갑니다. "로 시작되지 않는가. 


 머리를 맞대고 공부하다가 장난치고, 싸움박질하고, 공부시간이면 꾸벅꾸벅 졸던 그 7X8m 공간을 이제 떠나야 한다고 울먹이는 순정(純情)! 지금 이 노래를 흥얼거려 보는 이 순간에도 강물에 실려간 63년 세월이 까닭 모를 설움이 되어 가슴을 치고 올라오는 그 어떤 감정의 응어리를 느낄 수 있다.


 정을 가장 정직하게 느낄 수 있는 경우는 서로가 헤어질 때다. 시조시인 이호우 님의 <이향사(離鄕詞)>를 보자.

 


이미 반평생을 날로 하듯 겪은 설움
이러니 저러니 해도 무던히 치렀건만
가야 할 북녘 하늘은 몹시 추워 보인다

 

선영 모신 산도 이미 멀리 돌아지고
산협을 울어예는 귀 익은 시냇소리
모르고 살아온 그 정(情) 빙 눈물이 돌구나

 

인정은 이리도 설은데 산하는 그냥 그 모양
봄이 오면 집집이 또 꽃은 피려니
내 가고 남은 날엔 인연 아니 지으리

 

 

 함께 있을 때는 깨닫지 못하다가 헤어지는 순간이 되면 눈물이 고이는 것은 정이 가진 매력이다. 정의 앞뒤에는 항상 그리움이 따른다. 대중 가수 송대관의 <정때문에>에는 다음과 같은 노래 사연이 실려 있다.

 


정 주고 떠난 사람 그리워서 울긴 왜 울어
추억을 뿌려 놓은 당신이기에.
그까짓 것 미련이야 버리면 그만인 것을
끈끈한 정 때문에 정 때문에
괴로워 혼자 울고 있어요.

 

 

 정이란 나와 부대낌으로 생겨난 과거가 남긴 마음의 찌꺼기. 그러니 사람이건 동물, 자연 그 무엇이건 오랜 세월에 걸쳐 서로 부대끼다 보면 정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운 정 말고도 미운 정(情)도 있는 것이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아리랑>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펴낸 김연갑 님의 <<아리랑>>을 보면 우리가 얼마나 정에 매달려 사는 사람들인가를 금방 알 수 있다. 다섯 수만 살펴보자.

 

 

가는 데 쪽쪽 정 들여 놓고서
이별 잦고 잦아서 나는 못 살겠네

 

울타리에 앉은 새는 바람 불어 염려요
당신하고 나하고는 정 떨어질까 염렬세

 

서울의 종로 네거리 솥 때우는 아저씨
우리들의 정 떨어진 것은 왜 못 때워 주나

 

친구는 남이련만 왜 이다지 다정하냐
한 시라도 못 보면 그리워서 나 못 살겠네

 

눈물로 사귄 정은 오래 가지만
금전으로 사귄 정은 잠시 잠깐이라네

 

 

 정은 그리움이요 으스름 달밤. 정은 어떤 논리로 무장된 창(槍)으로 찔러도 상처받지 않는 끈질감과 끈끈함이 있다. 연약해 보이나 강한 것이 정이다.


 새해가 온다고 야단들이다. 카드나 전화로 안부 묻기에 바쁘다. 서로의 정을 확인하는 수단이다. 그것도 옛날처럼 안부 사연을 손으로 쓰는 게 아니라 몇 초에 몇 만 리를 간다는 컴퓨터 메시지로 보낸다. 


 그래도 정은 말이 없다. 김시헌 선생의 편지에 만 리를 가도 그 훈기를 잃지 않는 것이 정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만리를 가도 그 훈기를 잃어버리지 않을 뿐 아니라 만 년 세월이 흘러도 정은 변하지 않지 싶다.(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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