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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이야기(42)
leed2017
2014-10-23
*사진/정조 개혁정치의 산실이었던 규장각
조선 왕조를 통틀어 가장 훌륭한 업적을 남김 임금은 누구일까? 사람마다 의견이 다르겠으나 나는 4대 세종대왕이 가장 훌륭한 임금, 그 다음이 정조대왕이라고 생각한다.
조선왕조에 대한 사극(史劇) 각본을 많이 쓴 신봉승 님을 따르면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원통한 죽음을 가슴에 안고 그야말로 빛나는 업적을 남긴 성군이다.
사도세자의 비극은 처음부터 끝까지가 당파싸움의 희생이었다. 그러니 정조는 만약 아버지 사도세자가 억울하게 죽었다고 생각하는 그의 생각이 영조 귀에 들어가는 날이면 왕이고 뭐고 세자 자리에서 쫓겨나거나 목숨을 잃게 될 판이었다.
어린 세손이 들에 나가서 장난으로 칼춤동작이라도 한번 했다면 세손이 “역적모의를 했다”고 영조 귀에다 속삭이는 간신배들로 가득찬 조정―. 이런 인적 환경에서 외로운 정조는 왕이 되기 전 24년을 지뢰밭 기어가듯 숨을 죽이고 조심조심 살아온 것이다.
또 끈질기게 산(정조 이름)을 해치려고 한 인물은 66살 된 영조에게 시집을 온 새 색시 정순왕후였다. 이 어린 왕후는 노론, 그 중에서도 사도세자의 죽음을 지지하는 벽파(시류는 무시하고 당론에만 치우쳐 있다는 말) 세력과 함께 그칠 줄 모르고 세자를 모함하였다. 만약 이 세자가 왕위에 올라 아버지의 죽음을 지지 동조했던 사람들에게 보복의 칼날을 빼어드는 날이면 자기와 자기 친정은 물론 노론 세력은 끝이라고 생각했으니 그녀의 음해공작은 어느 정도 정당성이 있는 행동이었다.
이러한 노론 벽파의 세손을 살해하려는 갖가지 음모와 모략에도 불구하고 세손 산은 조선 22대 임금으로 등극하여 재위 24년간 세종대왕에 버금가는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룩하였다.
정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인 세손 시절은 물론, 그가 왕이 되고나서도 정조의 침실, 다시 말하면 임금이 잠을 자는 그 구중궁궐 침실에 노론 자객이 침입하여 늦게까지 책을 읽던 정조에게 들켜 달아난 적이 두 번이나 있었다.
정조가 세손 시절에 쓴 일기 <존현각 일기>에서 “잡거나 놓고, 주거나 빼앗는 것이 전적으로 저 무리들(노론 벽파)에게 달렸으니 내가 두려워 겁을 내고, 의심스럽고 불안해서 차라리 살고 싶지 않았던 마음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적었으니 자기 신변에 대한 불안이 얼마나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정조의 가장 빛나는 업적으로는 규장각의 설립을 꼽을 수 있다. 정조는 채제공, 홍대용 등 현신들과 더불어 규장각을 짓게 하고, 선각자 홍대용의 주청을 받아들여 출신 성분 때문에 출세를 하지 못하고 울분 속에 지내는 당시의 서얼출신, 이를 테면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같은 뛰어난 인재들을 기용하였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인사이다.
다산(茶山) 정약용, 이가환 등 소외된 남인 계열의 큰 인재들이 정조의 주위를 에워싸면서 홀연히 조정은 활기 넘치는 학술과 문화의 통의 장소로 변했다. 바야흐로 조선의 르네상스가 온 것이다.
이 같은 큰일을 추진할 때 정조 옆에서 그를 충심으로 보필한 핵심 인물은 채제공이라는 이름의 명재상이었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영조로부터 중벌을 받을 무렵 채제공은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대궐로 달려와 영조에게 사도세자를 벌주어서는 안 된다고 눈물로 호소를 한 명신이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으로 옮기고 수원에 성곽을 쌓아 신도시를 건축하였다. 수원성을 쌓는 데는 정약용이 고안한 기중기가 사용되었다는 것은 흥미 있는 얘기다.
내 몸에 병(病)이 많아 세상에 버림받아
시비 영욕을 오로다 잊어마는
다만지 청한일벽(淸閑一碧)이 매 사냥이 좋구나
※해설: 내 몸에 병(病)이 있어서 세상의 버림을 당하니 옳고 그름과 영화와 치욕은 모두 다 잊었지만, 다만 맑고 한가함을 즐기는 내 이 버릇 때문에 매[鷹] 사냥은 좋구나.
숙종 때의 명창 하계(霞溪) 김유기의 창작이다. 이름 높은 작곡가로서 시조를 잘했다. 김천택과 교분이 두터웠으며 해동가요에 시조 8수가 전한다. 숙종, 영조 때가 되면 김천택, 김수장, 김유기 등 명창들이 여기저기서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개인적인 얘기 하나. 고등학교 때 같은 반에 H라는 시조 창(唱)을 잘하는 녀석이 있었다. 그는 창(唱)으로 상당한 인기를 얻어 한몫 보던 녀석이다. 나도 창을 한번 해볼까 생각했으나 녀석이 하는 걸 봐도 이 마디에서 저 마디로 옮겨 가는데 한 5분은 걸리는 느림보여서 시작해 보기도 전에 포기해 버렸다. 고등학교를 떠난 후 창 분야에 녀석의 이름이 없는 것으로 보아 양악(洋樂)에 밀려 벌써 옛날에 그만 둔 모양이다. 좌우간 김천택이나 김수장 같은 명창들이 있었으면 좋아했을 녀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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