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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이야기(41)
leed2017
2014-10-16
*사진/경기도 화성시 안녕동에 있는 융건릉(隆健陵). 사적 제206호로 지정된 문화재로 장조(사도세자)와 그의 비 헌경왕후(혜경궁 홍씨)를 합장한 융릉(隆陵)과 그의 아들 정조와 효의왕후를 합장한 건릉(健陵)을 합쳐 부르는 이름이다.
영조는 어머니가 천민(무수리)이라는 신분 때문에 평생을 출신 성분에 대한 콤플렉스에 시달렸다. 자기 아들을 뒤주 속에 가두어 죽인 이해할 수 없는 행동도 이 콤플렉스에서 나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쨌든 영조는 즉위 초년에 일어난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여 83살까지 살았으니 조선 임금 27명 중 가장 오랫동안 왕위에 있으면서(51년 7개월) 가장 오래 산 임금이었다.
‘영조’하면 사람들이 가장 많이 떠올리는 이야기거리는 자기 아들을 뒤주 안에 가두어 굶겨 죽인 세칭 사도세자 이야기일 것이다.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해서 몇 마디 적어보자.
사도세자에 관한 시중(市中)에 나온 문헌은 많다. 다음은 대부분 역사학자들이 쓴 문헌을 읽고 내 나름대로 종합한 것이다. 세자는 아버지가 죽으면 자기가 임금 자리에 오를 사람이다. 그러니 임금 자리에 앉기까지는 입조심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도세자도 임금 자리에 앉기까지는 바보처럼 입을 다물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침묵을 지키기에는 너무나 뜨거운 무인 기질이었다. 세자는 너무 성급히 노론에 거슬리는 말을 했고, 실로 한 나라의 임금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이 막강한 세력 노론은 세자를 제거하기로 당론으로 정했다. 임금도 무서워하는 노론 세력에 임금 영조가 동조한 것이 비극의 씨앗이었다.
사람들은 뒤주 속 비극은 사도 세자의 정신병 때문이었다고 믿고 있다. 자기 말 안 듣고 반항하고, 이상한 짓 한다고 28살이나 되는 다 큰 아들을 뒤주 속에 가두어 죽였다면 그 애비가 정신병 환자인 것이다.
사도세자의 정신병은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恨中錄)>에서 쓴 시각이다. 어느 사가(史家)의 말처럼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이 <한중록>이 국정교과서에 실리고 다른 입장에서 본 것은 실리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 사람들은 혜경궁 홍씨의 시각(정신 이상)만을 진실로 믿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한 가지 잊어버려서는 안 될 것은 혜경궁 홍씨의 친정아버지, 즉 사도세자의 장인 홍봉한은 노론의 충성파로서 사위보다는 당의 이익을 더 중요하게 여기던 인물이란 사실이다. 당의 이익을 위해서는 나라고, 가족이고 모두가 뒤로 물러나야 한다고 믿는 열성 당원이 저지른 비극일 뿐이다.
뒤주에 갇혀 7일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 할아버지 영조의 팔에 매달려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애원하던 당시 11살 소년이 지금 임금(정조)이 되었으니 자기 아버지를 죽이는데 가담했던 사람들에 대해 원수를 갚고 싶은 마음이 왜 없었겠는가. <한중록>은 정조의 즉위와 사도세자 제거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이번에는 몰락 위기에 처한 혜경궁 홍씨의 친정을 복권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을 가진 책이라는 점을 감안하고 극히 제한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럼 왜 노론은 사도세자 제거를 당론으로 세웠을까? 어렸을 적의 사도세자는 영조에 의해 독살 당했다는 소문이 파다한 경종의 부인 어씨와 경종을 모셨던 궁녀들 밑에서 자랐다. 그러니 자연히 반(反) 노론적인 정치적 견해를 가지게 된 것이다. 한편 사도세자 제거를 당론으로 정한 노론은 끝없이 사도세자 헐뜯기에 나섰고, 사도세자의 비행을 끝없이 부풀려 아버지 영조에게 보고되었다.
한편 혜경궁 홍씨의 친정아버지 홍봉한은 과거(科擧)만 보면 떨어지던 낙방거사. 그러나 자기 딸이 사도세자의 부인이 되자 그 덕으로 대번에 과거에 급제를 한 사람이다. 나중에 사도세자가 왕과 노론의 비위를 거슬러 뒤주 속에 갇히고, 딸이 과부가 될 위기에 처했는데도 당(노론)의 이익을 따라 그 비극을 지지한 인물이었다. 이처럼 권력은 마약이다. 판단을 흐리게 한다.
사도세자가 죽은 후 조정은 두 세력으로 갈라졌다. 당초에는 세자 제거에 가담 지지를 했으나 세자가 죽고 난 다음에는 뒤늦게 세자의 죽음을 동정하게 된 홍봉한을 지지하는 부홍파와 홍봉한을 공격하는 공홍파로 나뉘어졌다. 공홍파의 주축은 당시 15살 어린 나이로 66살의 영조대왕께 시집 온 김한구의 딸 친정 세력이었다. 이 나이 어린 왕후는 사도세자를 죽이는데 적극 가담했고, 정조가 죽고 난 후에는 손자, 손자며느리를 비롯해 수많은 남인들과 천주교도들을 학살하였다.
사족(蛇足) 하나. 사도세자의 능은 지금 수원에 있다. 정조가 양주 배봉산에서 이장한 것이다. 서울에서 88리. 옛날에는 임금이 서울에서 80리 밖으로 나가는 것을 법으로 금했다. 지극한 효자 정조는 88리나 되는 수원을 80리로 우기고 수시로 한(恨)많은 아버지를 찾아 자주 수원에 행차했다.
갈 때는 오마더니 가고 아니 오는구나
십이난간 바잔이며 님 계신 데 바라보니
남천에 안진하고 서상(西廂)에 월낙토록 소식이 그쳐졌다
이 뒤란 님이 오시거든 잡고 앉아 새우리라
※해설: 갈 때는 다시 곧 오겠다고 하더니 가고는 아니 오는구나. 열두 난간 짧은 거리를 왔다 갔다 하며 임계신데 바라보니 남쪽 하늘에 기러기도 다 날아가 버리고 서쪽에 있는 마루에 달이 지도록 소식이 그쳤구나. 이 뒤에는 임이 오시면 꼭 붙잡고 앉아서 밤을 세우리라.
그야말로 가슴을 태우는 그리움이다. 아무리 다정불심(多情佛心)이라 해도 사랑도 지나치게 사랑해서 정도가 넘는 것은 위험하고 부담스러울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위 노래의 작가 김두성은 정조 때의 가인(歌人)으로 생몰연대에 대한 기록이 없다. 김두성 말고도 영-정조 이후의 많은 조선 후기 가객들, 이를테면 김무수, 김태석, 김수장, 김천택 등 가객들은 생몰연대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들이 일반적으로 한미한 집안 출신이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또 한가지 말해두고 싶은 것은 영조 말기에 이르러서는 당파 싸움의 정도가 도를 넘어섰고, 사도세자의 비극도 이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닌가. 이렇게 혼탁하고 어처구니 없는 시국에 영조의 패륜행위를 나무라는, 혹은 지지하는 시조 한 수를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은 좀 이상하다. 로마는 불타고 있는데 황제는 술잔을 들고 노래만 하는 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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