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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맞이꽃의 신비/최문애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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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거미가 내리면 우리 부부는 뜨거운 대낮을 피해 선선한 바람이 부는 저녁 시간에 산책한다. 달빛 아래 우리 집 안뜰에 노란 꽃 한 송이가 솟아오르는 것이 눈에 띈다. 수많은 꽃봉오리가 몇 초마다 꽃잎을 열며 팍팍 소리를 낸다.

우리 집에는 매해 여러 가지 꽃이 피고, 지고 또 핀다. 그러나 요즘 나는 이 많은 꽃 중에 밤에만 피고 지는 달맞이꽃의 신비에 푹 빠져 산다. 새벽에 일어나면 물주며 꽃들에게 안녕 인사 나누고 저녁에는 새로 태어날 달맞이꽃 맞이로 바쁘다. 달맞이꽃은 이름대로 달이 뜨면 꽃이 피고 달이 지면 꽃을 닫는다. 더 정확히 말하면, 달맞이꽃은 해질 시간에 꽃을 피우고 해 뜰 새벽녘에 꽃을 닫는다. 그러나 비 오는 날과 바람 부는 날은 예외로 더 일찍 꽃을 피우고 더 늦게 꽃을 닫는다. 내가 본 달맞이꽃은 시원하고 어둑한 날씨를 좋아한다.

 

따뜻한 날씨가 이어지자 남편은 가장 먼저 잡초 제거 작업을 했다. 먼저 민들레꽃의 솜털이 사방에 날지 못하게 그것을 뿌리부터 뽑았다. 뽑아낸 잡초 중에 놀랍게도 이 식물만은 제발 뽑지 말라고 부탁한 것까지 죄다 뽑았다. 아마 남편은 이 식물을 민들레로 착각한 모양이다.

언뜻 보면, 이 식물은 민들레처럼 생겼다. 그러나 달빛에 하늘거리는 노란 달맞이꽃의 신비를 보았다면 결코 남편은 뿌리째 뽑지는 아니했을 것이다.

 

잘 살펴보면, 달맞이꽃의 잎새는 민들레보다 길고, 가늘고, 끝부분은 피침처럼 뾰족하고, 가장자리에 톱니가 많이 나 있다. 저녁 바람 따라 꽃대는 하늘로 치솟고 봉오리는 창검처럼 뾰족하다. 식물의 키는 손의 반 뼘 정도 작고, 땅 가까이 넓게 퍼지며 자란다. 식물의 너비는 손의 세 뼘쯤 넓고, 원형 중심으로 각기 잎새가 다섯 겹쯤 겹치며 큰다. 하트형의 꽃잎 4 개가 활짝 펴면 십자가 모양이 된다. 짙은 초록색 잎새 밑에 따닥따닥 많은 봉오리가 붙어있다. 5 월 중순부터 늦여름까지 많은 꽃을 피운다. 해 질 녘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꽃봉오리들의 모습은 잘 훈련된 병사들 같다.

 

‘그리움 또는 기다림’이란 낭만적인 꽃말을 가진 이 식물은 달을 기다리며 꽃을 피운다고 하여 달맞이꽃 또는 월견초라 부른다. 저녁 바람 따라 달맞이꽃은 신들린 무녀처럼 춤을 춘다. 어찌 보면 진통하는 산모 같다. 걸친 겉옷을 다 찢어내고 꽃잎을 열면, 가슴 한가운데 네 개의 더듬이를 가진 암술 하나가 우뚝 서 있고 그 둘레에 8 개의 수술이 은은한 레몬 향기를 내며 나방과 밤 곤충을 유혹한다. 짧은 여름밤에 종족 보존을 위해 고심 분투하다 새벽이 오면 누더기처럼 쭈글쭈글한 빛 바랜 꽃잎을 반쯤 접고 미수 지난 노인처럼 힘없이 그때를 기다린다.

 

꽃봉오리들이 소리 내며 새 생명이 탄생할 때는 너무 신비로워 감탄사가 저절로 나온다.

이렇게 작은 몸에 이렇게 많은 봉오리가 해 질 녘 거의 같은 시각에 꽃잎을 열고, 동트기 전 거의 같은 시각에 꽃잎을 닫는다. 인간에게처럼 식물에도 생체시계가 있다고 믿는다. 이 꽃은 영어로 저녁에 피는 장미 Evening Primrose 라 한다. 어둔 밤에 나방이나 밤 곤충의 눈에 잘 띄게 이 꽃은 하얀색에 가까운 연노랑 색을 가졌다. 북미주 원주민들이 약초로 쓴다는 이 식물의 원산지는 북미주로 약 125 개 종류 중 하나가 나의 정원에서 자란다.

 

달맞이꽃은 왜 많은 꽃처럼 꿀벌과 나비가 일하는 대낮에 피지 않고 달과 별이 뜨는 밤에만 꽃을 피울까? 뜨거운 대낮에는 어떤 미동도 없다가, 저녁 바람이 불면 어디서 힘이 솟는지 여기저기 불끈불끈 꽃송이들의 잔치가 열린다. 아기 손만큼 큰 꽃송이들이 색과 향기로 밤 곤충을 유혹하여 씨앗을 맺는 일이 이들의 생존 전략이라니 얼마 전 오스카 여우 조연상을 받았던 한인 여배우의 인터뷰가 생각난다.

‘이혼 후, 홀로 자식들을 먹여 살리려니 돈이 필요해서 어떤 배역도 마다하지 않고 다 맡아 연기했더니 감사하게도 이런 상까지 받네요.’ 얼마나 진솔한 말인가! 달맞이꽃의 생존 전략을 듣는 것 같다. 종족 보존을 위한 이 꽃의 치열한 분투가 바로 우리를 낳고, 길러주신 우리 모든 어머니의 분투가 아닐까? 경쟁이 심한 대낮보다 선선한 밤을 택해 자연 법칙에 순응하는 이 꽃의 이야기가 바로 우리 어머니들의 삶의 이야기다. 고작 몇 시간 한 송이 꽃을 피워, 씨앗을 맺는 달맞이꽃의 생존법은 곧 자식을 위한 우리 어머니들의 헌신적 삶을 말한다. 이런 점에서 달맞이꽃이나 우리 어머니들은 삶의 경쟁에 승리자며 말 없는 영웅들이 아닐까? 차세대를 준비하는 이들의 지혜로운 전략이야말로 어떤 시상이나 악상이나 철학을 초월한 자연법칙의 존엄성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된다.

 

새벽이 오면 찢기고 빛바랜 달맞이꽃의 주름진 처연한 모습은 인생의 모든 고초를 다 이겨낸 우리 어머니들의 지친 바로 그 모습이다. 초저녁에는 그리도 곱고 빛나더니, 옛적에 나도 너처럼 그렇게 곱고 빛났던 시절이 있었다. 어두운 밤에 하얗게 지붕을 덮었던 박꽃처럼 나도 어두움을 환히 밝히는 등불이 되리란 꿈도 꾸었다. 그러나 너의 새벽처럼 이제 나의 그때가 오고 있다.

달맞이꽃의 신비는 알면 알수록 끝이 없다. 비록 왜소하고 천덕꾸러기 민들레처럼 보여도, 이 꽃의 무궁무진한 신비는 아마 오래오래 사람들의 관심사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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