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한 해가 저물어가는 이때 “해마다 섣달이 되면, 지나간 열두 달을 되돌아본다.”라 한 시인을 생각하며 지난날들을 뒤돌아본다. 흘러간 세월을 회상할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여덟 살 어린 나이에 마산의 동남쪽 가포에서 피난생활을 하던 시절이다.
붉은 이리떼들이 수도 서울을 두 번째로 짓밟던 그 해 겨울에 우리는 남으로 향하는 피난민들의 대열에 섞여 대구를 거쳐 한반도의 최남단인 그곳까지 가게 된 것이다. 가포는 앞에는 파란 물결이 출렁대는 바다가 있고,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산골 마을이었다.
마산까지는 시오리가 넘는 먼 거리였기에 어머니는 거기서 오리 이상을 더 들어가서 있는 가포국민학교로 나와 누나를 데리고 갔다. 교장을 포함한 선생님 세 분이 전교생 96명을 1, 2 학년, 3, 4 학년, 5, 6 학년 세 반으로 나누어 가르치는 학교였다.
허름한 시골 기와집이 학교였으며, 우리가 서울서 살던 집 정원의 절반도 안 되는 좁은 마당이 운동장이었다. 이런 학교는 다니고 싶지 않다고 떼를 썼지만 어머니는 마산에 있는 학교는 너무 멀어서 다닐 수 없다며 나는 2학년에, 누나는 3학년에 편입시켰다.
내가 초라하기 그지없는 그 학교를 다닌 것은 2년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짧은 기간 동안에 내 인생의 기반이 다져졌으며, 그 2년 동안 내 가슴에 축적된 사연들은 많고도 귀하기만 하다.
집에서 학교까지 3킬로미터를 가자면 절반 이상은 왼편으로 바다를 내려다보며 걸어야 했다. 그 길을 매일 오가며 나는 바다의 신비와 질서를 체험하며 배웠다. 오른쪽에 솟아있는 산을 쳐다보면서는 철 따라 변화하는 자연이 보여주는 신기하고 오묘한 법칙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동네 아이들을 따라 산에 올라가 칡뿌리를 캐먹으며 빈 배를 채워야 했던 서글픈 시절이기도 했지만, 버들피리를 말아 불 수 있었던 낭만의 시기이기도 했다. 대나무에 줄을 매어 만든 낚싯대에 지렁이를 미끼로 사용하여 각종 고기들을 잡아 올리는 능숙한 낚시꾼이 되었고, 중 고등학생 시절 친구들을 놀라게 한 수영실력을 기른 것도 그 시절이었다.
나와 누나는 그 작은 시골학교에서 선생님들과 학생들의 인기와 사랑을 독차지했다. 학생들은 말할 것도 없고, 선생님들도 모르고 있었던 삼일절과 광복절 노래를 전교생에게 가르친 후부터 우리 남매는 가포국민학교의 보배와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3학년을 마치던 해 내 인생의 가장 훌륭한 선생님이었던 산과 바다 그리고 순박한 산골 아이들과 헤어져 부산으로 떠날 때 어린 내 마음에 찾아 들었던 서글픔을 난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2학년 때 나를 가르친 여 선생님은 밥 한 끼라도 먹여 보내겠다며 나와 누나를 그녀가 살던 셋방으로 오게 하여 저녁을 해주었다. 그날 그녀가 그 당시에 구경조차 하기 힘들었던 소고기 몇 점을 넣고 끓여준 시금치 국보다 더 맛있는 그 어떤 것도 난 아직까지 먹어보지 못했다. 내게는 해방되던 해 어머니 등에 업혀서 떠났다는 고향 황해도 안악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하지만 어린 시절 피난생활을 하며 2년을 살았던 가포는 내 고향으로 마음 속 깊이 자리잡고 있다. 그곳은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가 만발하게 핀” 이원수의 고향보다 더 아름답고 정다운 나의 고향이다.
정지용이 “넓은 들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줄 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박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을 잊지 못했던 것처럼 난 한반도의 남쪽 끝자락에 자리 잡은 바다와 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농촌 마을 가포를 결코 잊지 못한다.
마지막 달에 떠오르는 또 다른 잊을 수 없는 추억은 반백년 전 한국을 떠나면서 가졌던 “마지막 모임”이다. 대학시절 내게는 친형제 못지않게 가깝게 지내던 친구 일곱이 있었다. 그 중 다섯은 중 고등학교도 같이 다녔고, 나머지 둘은 대학에서 만났다.
우리들은 각기 고향이 달랐고, 성장과정도 같지 않았으며, 가정환경에도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모두가 특이한 성격의 소유자들이어서 어떻게 보면 서로 어울리기조차 힘든 사이들이었다.
그러나 우리들은 항상 같이 있었으며, 함께 행동했다. 현재 다섯은 한국에, 하나는 미국에, 또 다른 하나는 캐나다에 살고 있지만 대학시절에 구성된 우리들의 “칠우회”는 아직도 건재하다.
내가 캐나다로 떠나게 되었을 때 우리들 일곱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우리들은 버스로 뚝섬까지 가서 나룻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 봉은사에 올랐다. 절 안으로 들어간 우리들은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절밥을 시켰다.
이민으로 떠나는 나였기에 “마지막 수업” 같은 분위기가 조성될 수도 있었지만 우리들은 “마지막”이니, “다시 만날 날이 있겠지.”등의 이별에 관련된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즐거웠던 학창시절에 관해 이야기의 꽃을 피우다 보니 그 정점인 대학 4학년 때 덕수궁에서 열렸던 대학 카니발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그 날 우리들은 사중창단을 조직하여 19세기 미국민요 “Goodnight, Ladies"를 불렀다. 친형 같았던 맹인 성악가 조진걸 형이 승호, 춘배, 주로와 나를 2주간 맹 훈련시켰다.
마지막 연습은 그의 아버지 조신일 목사님이 담임하던 광희문 교회 마당에 있는 높은 미끄럼틀 위에 올라가서 했다. 무대 감각을 익히기 위해서였다. 휘황찬란한 조명을 받으며 덕수궁에 마련된 야외무대에 올라간 우리는 자신감을 가지고 여유 있게 실력을 발휘했다.
학생들은 재청을 외치며 우렁찬 박수를 보내주었다. 그날 사회를 담당했던 KBS의 최경환 아나운서는 “여러 번 대학축제 사회를 보면서 많은 노래들을 들었지만 오늘처럼 세련되고 화음이 잘되는 사중창은 들어본 적이 없다.”면서 우리에게 우승의 영광을 안겨주었다. 평생 잊을 수 없는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그날을 위해 특별히 우리들의 파트너가 되어 준 일곱 명의 S대 여대생들이 만면에 웃음을 띠우며 단에서 내려오는 우리를 맞아줄 때 우리의 어깨는 더욱 으쓱해졌다.
모두들 그 밤을 되새기며 즐겁게 떠들어댔지만 나도 그들도 헤어지는 슬픔을 떨쳐버릴 수는 없었다. 황혼이 물들기 시작하자 시키지도 않았는데 승호가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높은 바위 위에 올라가 그의 애창곡인 윤용하의 “보리밭“을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세찬 바람에 머리를 휘날리며 노래하는 그의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돌아보면 아무도 뵈지 않고 저녁 놀 빈 하늘만 눈에 차누나”로 노래가 끝내자 우리들은 말없이 일어나 어두움이 내리기 시작하는 봉은사를 빠져 나왔다.
23년 후 난 한국 땅을 다시 밝았다. 이미 머리가 희어지기 시작한 서로를 껴안으며 우리들은 사반세기 전의 너와 나를 확인했다. 송추에 가서 송어횟집에서 저녁을 먹으며 흘러간 날들을 이야기하다 봉은사엘 가고 싶다고 했더니 아무도 함께 가자고 선뜻 나서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다음 날 혼자 봉은사로 향했다.
뚝섬까지 갈 필요도 없었고, 나룻배를 탈 필요는 더욱 없었다. 봉은사가 목적지라고 했더니 어떻게 간지도 모르게 택시기사가 그 곳까지 날 데려다 주었기 때문이다. 23년 전에 절밥을 먹었던 봉은사는 “새 하늘과 새 땅”처럼 변해있었다. 친구들이 함께 오기를 꺼려한 까닭을 알 수 있었다.
“내 놀던 옛 동산에 오늘 와 다시 서니/ 산천의 의구란 말 옛 시인의 허사로고/ 예 섰던 그 큰 소나무 버혀지고 없구려”라 허무한 심정을 토로한 이은상을 생각하며 봉은사에서 걸어 나왔다.
또다시 26년이란 세월이 흘렀고, 마지막 달의 마지막 날들이 얼마 안 남은 이때 마지막 달에 연관된 추억들을 더 이어가고 싶지 않다. 다가오는 성탄절을 기쁨과 희망에 찬 마음으로 맞이하고 싶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죄로 어두워진 세상 속에서 서로 미워하고, 질투하고, 싸우며 멸망의 길로 치닫는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세상에 오신 날이 성탄절이다.
이 거룩하고 기쁜 날이 사람들이 먹고, 놀며, 즐기는 휴일로 변해버린 것은 참으로 슬픈 현상이 아닐 수 없다. 2천여 년 전 아기 예수를 베들레헴의 한 마구간에서 태어나게 한 인간들의 무지한 죄를 우리들이 다시 범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깝고 슬픈 일이기 때문이다.
성탄전야에 함께 모일 아들, 딸, 손자, 손녀, 며느리, 사위에게 성탄의 진정한 의미를 다시 한 번 일러주련다. 그리고 그들이 이날 오신 예수님을 가슴 깊이 맞아드릴 수 있도록 기도해 주어야겠다. 그래야만 며칠 안 남은 이 해의 마지막 달을 아름답게 마무리 하고 희망찬 새해를 맞이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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