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이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아담과 하와는 그들의 맏아들 카인에 의해 살해당한 둘째 아들 아벨의 시신을 부둥켜 않고 슬프게 울었을 것이다. 그 후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이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며 비통해하며 슬픔의 눈물을 흘렸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이며, 삶의 경계선을 넘어 죽음의 세계로 들어간 후 되돌아 온 사람은 없었다.
따라서 죽음은 퇴치할 수 없는 인간 최대의 적이었다. 그러기에 사람마다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며 떨면서도 죽음의 세계에 관해 알아보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 누구도 만족할 만한 해답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런데 2,000여 년 전 유대 땅 베다니란 작은 마을에서 예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으리라.”(요 11;11)고 죽음에 관해 명확한 답변을 들려주셨다.
예수께서 이 같은 말씀을 하신 것은 베다니에 살던 두 자매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가 죽었을 때였다. 예수님은 그들 삼 남매를 무척 사랑하셔서 예루살렘에 가실 때마다 거기서 가까운 그들 집에서 머무셨고, 그들도 언제나 예수님을 정성을 다해 모시곤 했다.
그들이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했는가는 마리아가 비싼 향유를 깨어 주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그 발을 닦은 사실에서도 잘 알 수 있다. 그런데 어느 날 나사로가 중한 병에 걸렸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이 사실을 즉시 예수님께 알렸다.
이 소식을 들은 예수님은 곧바로 베다니로 가시지 않고 계시던 곳에 그대로 머무신다. 그 곳이 어디며, 예수님이 어째서 나사로가 위독한 것을 아시고도 그냥 계셨는지는 알 길이 없다.
예수께서 그의 능력의 손길이 필요할 때 곧바로 행동하지 않으신 것은 이때가 처음이 아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어머니 마리아가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하자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요 2:4)란 반응을 보였으며, 그의 형제들이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가서 그의 존재를 알리라고 했을 때도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요 7:6)며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같이 예수께서 그의 어머니와 형제들과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청을 거절한 사실들로부터 우리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획과 시간표에 따라 일하셨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랑하는 나사로가 병으로 숨진 것을 아시면서도 하던 일을 계속하시던 예수님은 이틀 후에 “잠든 나사로를 깨우러 가자.”며 제자들과 함께 베다니로 향하셨다.
예수님이 베다니에 도착하였을 때 나사로는 이미 죽어 무덤에 들어간 후였다. 문상객들을 접대하던 마르다가 뛰어 나와 예수님을 맞이하며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거여요.”라 말했다. 오빠의 병이 심상치 않다는 전갈을 보내면서 그녀는 예수께서 즉시 달려오셔서 그를 낳게 해주실 것을 기대했을 것이다.
때문에 그녀가 한 말은 늦게 오신 예수님을 원망한 것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소식을 듣는 대로 오시지 않은데 대한 원망이라기보다는 예수님이 빨리 오셨으면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그녀의 예수님을 향한 신뢰와 믿음의 표현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고 여겨진다.
마르다의 말을 듣고 예수님이 “네 오빠가 다시 살아나리라.” 말씀하시자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저도 압니다.”라 대답한다. 그녀의 답변을 그 당시 유대인들이 부활에 관해 일반적으로 지녔던 생각이었다.
구약에 나타난 뚜렷한 부활신앙은 아브라함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외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기 위해 모리아 산에 오르면서 함께 간 종들에게 “하나님께 경배하고 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라.”고 명한다.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산에 올라가면서 아브라함이 그를 데리고 오겠다고 한 것은 하나님께서 죽은 이삭을 살려주실 것을 그가 믿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아브라함의 이 같은 부활신앙을 지니고 있었던 인물이 구약시대에 또 있었다는 뚜렷한 기록은 없는 것 같다. 다만 욥이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겠습니까?(욥 14:14)라고 사후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부활에 대한 소망을 나타낸 기록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죽음은 생의 종말이 아니고, 마지막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난다는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기에 마르다는 그녀의 오빠도 그 날에는 다시 살아날 것을 믿는다고 말한 것이다. 예수님은 당장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겠다고 하셨지만 마르다는 먼 훗날에 나사로가 살아날 것이라 답한 것이다. 그런 마르다에게 예수님은 ”내가 부활이며 생명이라.“ 말씀하셨다. 그런 후 무덤에 누워있는 나사로를 일으키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을 맞이하면서 마르다는 “주께서 계셨더라면 나사로는 죽지 않았을 것이라.” 말함으로 그녀는 예수께서 죽음을 물리치실 권능의 소유자이심을 믿는다는 고백을 했다. 그에 대해 예수님은 그는 “부활이며 생명”이시기에 당장 나사로를 살아나게 하겠다고 선언하셨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으나 부활하여 승천하신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살아있는 자들도 그들과 함께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여 항상 주와 함께 있을 것이라.“(살전 4:16-18)고 성경은 말해주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무덤에 당도하신 예수님은 나사로의 시신이 이미 부패하기 시작했다고 말하는 마르다에게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않았느냐?” 하신 후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자 죽었던 나사로가 얼굴에 수건을 쓰고 손발이 베에 묶인 채 무덤에서 걸어 나왔다. 예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신 것은 나사로만이 아니다. 예수님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과 나인성 과부의 아들도 살리셨기 때문이다(막 5:35-43; 눅 7:11-17).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야이로의 딸은 죽은 지 몇 시간 만에, 나인성 과부의 아들은 죽은 지 하루나 이틀 후에 장지로 가는 도중 살아났지만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난 후에 무덤에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죽은 지 몇 시간 혹은 하루나 이틀 된 사람이 살아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말 할 수 있겠지만 죽은 지 나흘 된 사람이 살아난다는 것은 유대인들의 관점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사람이 죽고 나면 사흘간은 그 영혼이 주위에 떠돌지만 그 후에는 사라져 버린다고 믿었다.
따라서 숨이 끊어진 후 나흘이 지나면 영혼마저 떠나고 육신은 썩기 시작하기 때문에 그런 상태의 나사로를 살리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죽은 자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영원한 생명이심을 증명하신 것이다.
십자가 없는 기독교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십자가는 “생명” 아닌 “죽음”일 뿐이다.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은 주께서 행하신 모든 기적들의 완성이며, 기독교의 교리 자체이기도 하다.
부활과 생명이신 예수님 안에서의 죽음을 영원으로 들어서는 첫 발 걸음이다. 그렇다면 이 영원한 세계에서 우리는 어떤 형체를 지니게 될 것인가? 이 의문에 대한 성경의 답변을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전 15:50)이다.
천국에서는 이 세상에서와 같은 형체를 지닐 수 없다는 의미다. 이에 대해서 성경은 “마지막 나팔소리가 날 때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가 순식간에 홀연히 변화하리라.”(고전 15:51-52)고 말해 준다.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변화할 것인가에 대한 성경의 답변은 직선적이지는 않지만 믿는 마음으로 읽는다면 간단하면서도 명확한 것이다. 해와 달과 별들은 하늘에 떠서 그 기능을 발휘하게 지어졌으며, 물고기는 물속에서 살 수 있는 형태를 갖추었으며, 새들은 하늘을 나를 수 있도록 그리고 야생동물들은 험한 산속에서 생존할 수 있도록 지음을 받았듯이, 하늘나라에서 영원토록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 우리들은 신령하며 썩지 아니할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이 될 것이라는 것이 성경이 말해주는 우리들의 모습이기 때문이다(고전 15:35-49).
사도 요한은 우리들의 변화할 모습에 관해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 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라.”(요1 3:2))라 들려줌으로 영생을 누릴 이들은 예수님을 닮은 모습으로 변화될 것이라 말해주고 있다. 이는 부활이며 생명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현세에서도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살아야 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상을 향한 욕망과 미련을 버리지 못한 연약한 믿음의 소유자들이었다. 그들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을 용기도 없었으며,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당한 의도나 의지도 없는 비겁한 무리이기도 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부터 그들은 놀랍게 변화되어 죽기까지 충성하는 부활의 증인들이 되었다.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들에게도 그런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그렇게 변화되기를 원한다면 우리 모두는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음을 앎이라.”(고전 15:58)란 말씀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실천해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