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예수께서 “나는 생명의 빛이다.”고 말씀하신 것은 그가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을 때였다. 초막절은 유월절, 오순절과 더불어 이스라엘의 3대 명절 중의 하나로서 풍성한 결실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 드리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간 광야생활을 할 때 함께 하신 하나님을 자손대대로 기억하기 위해 지킨 명절이다.
이 의미 깊은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가신 예수님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 7:37)라 외치셨다. 그리고 초막절 행사가 절정에 달했을 때 선포하신 말씀이 그가 세상의 빛이라는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예루살렘 성전 안에 4개의 거대한 칸델라(밝고 큰 촛불)가 천정에 달린 곳에서 하셨다. 초막절 예식 중의 하나로 4개 칸델라에 불이 켜져서 어둡던 성전이 대낮처럼 밝아지면 거기 모인 사람들은 밤새 시편을 노래하며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 자리에서 예수님이 두 손을 높이 드시고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소리 높여 말씀하신 것이다.
이 말씀의 의미는 “지금 여기 밝은 빛을 발하는 칸델라는 밤의 어두움을 몰아내고 성전을 밝혔으며, 먼 곳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이 찬란한 불빛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새벽이 되면 이 불빛은 꺼져버릴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영원히 꺼지지 않고 타오르는 생명의 빛이니라.”였다.
떠오르는 태양은 캄캄한 세상을 광명으로 물들이며, 만물이 성장할 수 있도록 열과 에너지를 공급해 준다. 밤하늘에 빛나는 달과 별들은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이들에게 올바른 방향을 가르쳐 준다. 예수님은 그가 세상의 빛이시기에 죄로 어두워졌던 세상을 환하게 밝히시고, 그 속에서 길 잃고 헤매는 영혼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분이심을 만천하에 공포하신 것이다.
성경은 이 사실을 그리스도의 사명은 어둠 속에 갇혀있던 세상을 광명으로 인도하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해주며, 불의와 부정과 폭력으로 상처 입은 이들을 위로하고 치유하며, 포로 된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고, 눈 먼 자를 다시 보게 하는 것이라고 말해준다.(눅 4:18; 사 60:1)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비추기 전의 세상은 참으로 어둡고, 암울하고, 혼란했었다. 권력과 금력을 지닌 사람들은 온 세상이 마치 자기네 것인 것처럼 여기며 모든 일을 그들 마음대로 하며, 가진 것 없고 힘없는 사람들을 그들의 종속물로 취급하는 무지하고 악랄한 일들을 서슴없이 행했다.
하지만 예수님이 오시면서 인간사회에서 이런 모든 일들이 하나씩 사라져 가며, 모든 면에서 혁신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점으로 힘차게 흐르던 역사의 물줄기가 그 방향을 달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의 대열에 끼지도 못했던 어린이와 여인들의 권익이 인정되고 보호받기 시작했으며, 힘없고 미천한 사람들을 착취하며 핍박하던 악한 무리들이 설 곳을 잃기 시작했으며, 너무도 당연시되던 노예제도의 폐지까지도 논의되기 시작했다. 더 나아가서 소수의 지배층들만을 위해 존재하던 각종 제도들이 모든 사람들을 위한 평등한 것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도 예수님의 가르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예수님의 도덕관과 윤리관은 정의와 정직을 넘어서는 숭고하고 고상한 고차적인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 된 도리니라...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너희가 무슨 상을 받겠느냐?”(마 5:44-46)란 예수님의 가르침이 그 가장 좋은 예 중의 하나다.
예수님의 빛은 세상의 모순과 부조리뿐만 아니라 인간 개개인의 치부도 들추어 내셨다. 그들만이 성결하고 의롭다고 자신만만하던 사람들의 위선과 숨겨진 죄악들이 예수님의 불빛 앞에서 낱낱이 그 모습들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은 악의 세력에 의해 형성되고 지배되던 세상의 윤리와 도덕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밝히며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한국에도 잘 알려진 선교사 Archibald Campbell은 이 같은 예수님의 빛으로서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들려준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기 전까지 세상은 영적인 암흑으로 덮여 있었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라면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그들의 딸들과 누이들과 아내들까지도 사창가에 팔아 넘겼다. 인종차별, 인격모독, 가정폭력이 거침없이 행해졌으며, 힘이 곧 정의요, 이기는 사람이 정의의 사도였다. 영적으로 병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찬양하지 못하고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나날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예수님의 빛이 비치는 곳마다 어둠이 물러가며 불안과 공포가 사라지고, 고통과 슬픔으로 허덕이던 이들이 소망을 지니고 살게 되었고, 역경과 시련으로 인해 좌절하여 쓰러졌던 사람들이 다시 일어서는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예수께서 빛으로 다가오셨을 때 일어난 가장 획기적인 현상은 완악한 인간들의 마음이 변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기만이 옳고 의롭다는 자세를 버리고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게 되었으며, 자기중심적으로만 살던 이들이 이웃을 배려하기 시작했고, 세상을 향한 욕망에 사로잡혔던 마음들이 멀리 보이는 하늘나라를 사모하게 되었으며, 시기와 질투와 원망과 불평과 미움과 분노로 가득 찼던 가슴들이 다른 사람들을 용납하고 사랑할 수 있게까지 된 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는 예수님의 말씀이 역사한 결과인 것이다.
Archibald Campbell은 예수께서 주신 새 계명이 맺은 가장 대표적인 결실을 손양원 목사에게서 찾았다. “사랑의 원자탄”의 주인공인 손양원 목사는 1948년에 일어난 여수반란 사건 때 그의 두 아들을 죽인 공산당원을 관계당국에 청원하여 총살형에서 구해내어 양아들로 삼았다. 그리고 그 자신을 불법 남침한 북괴군들에게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한 후 총살당한 한국 교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목회자 중 한 분이시다.
인간의 죄 값을 지불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사랑이 그의 가슴에 깃들지 않았다면 그는 그의 아들들을 죽인 원수를 살려 양아들로 삼고, 그 자신은 괴뢰군들에게 죽임을 당함으로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랑을 실천한 주의 종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라 선포하신 것은 그와 하나님은 하나라고 밝히신 것이기도 하다. 구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을 “빛”으로 묘사하고 있다. 동방의 의인 욥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재 가운데 앉아서 “등불로 그의 머리를 비추시며, 그의 빛으로 암흑 속에서 그를 인도하시던 하나님”(욥 29:2-3)을 불렀다.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시 27:1)라며 “주의 빛과 진리로 나를 인도하소서.”(시 43:1)라 간구했다.
이사야도 “우리가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사 2:5)며 “영원한 빛이시며 영광이신 하나님의 빛”(사 60:1, 19)에 행하며 살자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호소했다.
미가는 “나는 엎어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 데에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이로다.”(미 7:8)라 선언하고 있다.
예수님이 그가 세상의 빛이심을 초막절에 밝히신 것은 빛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권능과 사랑이 그에게도 있음을 천명하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 특히 바리새인들은 예수께서 세상의 빛이란 사실을 받아드리려 하지 않았다. 어둠을 사랑하여 그 속에 거하는 그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이 나면서부터 보지 못하던 사람에게 광명한 세상을 보게 해줌으로써 그가 빛이신 것을 증명해주셨지만 그들을 어둠을 벗어나 빛 되신 예수님 앞으로 나오는 대신 예수님을 안식일을 범한 죄인이라 주장하고 나섰다.(요 9:1-41)
그런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엔 빛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대신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그들의 모습을 사람들이 경탄의 눈으로 보아주기를 바라는 지극히 인간적인 욕망이 숨어있었다.
때문에 그들은 그 같은 그들의 위선과 죄악이 예수님의 빛에 노출되는 것이 두려워 의지적으로 눈을 감아 버렸던 것이다. 수천의 알을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낳는 거북이와 달리 알 하나를 낳을 때마다 온 동네가 다 듣게 울어대는 암탉과 같은 존재들이 바리새인들이었던 것이다.
예수께서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함으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 3:19)라 하신 말씀은 생명의 길을 밝혀주시는 예수님의 빛을 외면하고 “회칠한 무덤” 같은 그들의 겉모습만을 드러내며 살기 원했던 바리새인들과 그들을 닮은 모두를 향한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빛이 있으라.”였다. 말씀대로 빛이 비추이자 하나님은 빛과 어둠을 나누셨다. 이 같은 창조의 과정은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멀리하거나 그를 떠나면 어둠 속에서 절망을 벗 삼아 살아야 한다는 귀한 진리를 말해주고 있다.
빛이신 예수님의 품에 안기는 이들은 기쁨과 화평을 누리며 길 잃지 않고 하늘나라를 향해 나갈 수 있지만 빛 없는 암흑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불안과 공포 가운데서 비참하게 살다 파멸되는 운명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그 같이 슬프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지 않으려면 빛이신 예수님이 비춰주시는 길을 따라 걸어가야 함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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