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이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 18:9-14)
“바리새인과 세리 비유”를 기록하면서 누가는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예수께서 들려주신 비유라고 했다.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비유라는 직접적인 표현을 피한 것이다. 어째서일까? 아마도 니고데모와 아리마데 요셉 같은 의로운 바리새인들을 의식해서가 아닌가 여겨진다. 역사가인 누가는 그들 두 사람을 위선자들인 바리새인의 대열에 합류시키기를 원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되는 것이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바리새인과 세리는 당시 유대사회에서 너무도 대조되는 이들이었었다. 바리새인들은 종교계의 지도자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이 로마로부터 해방되기를 원하는 민족주의자들이었다. 이에 반해 세리들은 사회적으로 배척당하고 멸시받는 민족의 반역자로 낙인찍힌 사람들이었다.
유대인들에게서 세금을 거두어 로마정부에 바쳤으며, 그러는 과정에서 부정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한 그들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네들은 동족을 괴롭히고 착취하며 로마정권에 아부하는 민족적 죄인으로서 취급받을 수밖에 없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충성하기 위하여 동족을 여러 가지 형태로 못살게 굴었던 사람들처럼 말이다.
어느 날 융합할 수 없는 바리새인과 세리가 기도하러 성전에 들어갔다. 그때 경건한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씩(9시, 12시, 3시) 기도 드렸다. 어느 시간이었는지는 몰라도 그들이 들어간 곳은 제사장들 아닌 일반인들이 들어갈 수 있었던 내부 성전이었을 것이다. 거기 들어선 바리새인은 “하나님,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사기꾼도 아니고 정직하지 못하거나 간음하는 사람도 아니며 또 거기 있는 세리와도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또 나는 일주에 두 번씩 금식하며 수입의 십 분의 일을 꼭 바칩니다.”라 큰 소리로 기도했다.
이 기도 속에는 자기 죄를 자백하거나 하나님께 간구한 것은 하나도 없다. 자신이 얼마나 의롭고 선하고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가를 자랑하는 내용뿐이기 때문이다. 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인데 그는 하나님 아닌 주위 사람들에게 그가 얼마나 경건하고 모범적인 신앙인인가를 알린 것이다.
바리새인은 그가 원하는 바를 하나님께 간구한 것이 아니라 그가 얼마나 의롭고 훌륭한 사람인가를 보고했다. 그의 기도 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믿음 같은 것은 찾아볼 수도 없으며, 그 스스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교만한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을 뿐이다.
뿐만 아니라 짧은 기도를 하면서 그는 자기가 다른 사람들 보다 얼마나 성결하고 월등한 인물인가를 밝히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율법을 무시하고 도덕적으로 또 윤리적으로 부적절하게 살지만 자기는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며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한다고 기도했기 때문이다.
그 기도를 들은 사람들은 그를 경탄하는 눈으로 쳐다보았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서글픈 미소를 지으셨을 것이다. 그가 한 것은 하나님께 드린 간구가 아니라 그 자신을 최대로 미화하여 발표한 것에 불과한 까닭이다.
성전에 있는 사람들 전부가 들을 수 있게 “거기 있는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한 것은 명백한 인권모독이었다. 지금 같으면 당장 명예훼손죄로 고발당했겠지만 세리에게는 그럴 힘도 없었고, 그 같은 모독은 마땅히 당해야 할 그의 숙명이라 여겼을 지도 모른다.
바리새인은 계속하여 그는 한 주에 이틀이나 금식하며 십일조 생활에 충실함을 밝혔다. 속죄일에 금식하는 것은 유대인들의 의무였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일 년에 한 번하면 될 금식을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에 하곤 했다. 대단한 열성이었다. 십일조를 바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 바리새인들은 십일조 생활에도 충실했다.
예수님은 그들의 금식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으셨다. 금식은 자신의 욕구를 억제하며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 수 있도록 스스로를 훈련시키기 위해 하는 것인데 바리새인들이 금식한 까닭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전시용이었던 것이다. 그들이 어김없이 십일조를 바친 것도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며 칭찬받기 위해서였다.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들은 십일조는 잘 바치지만 정의와 자비와 믿음을 저버린 위선적인 삶을 산다.”(마 23:23)고 질책하신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바리새인의 기도는 하나님께 드린 것이 아니라 자신을 부각시키기 위한 담화문 같은 것이었다.
바리새인과 같은 시각에 성전에 들어간 세리는 사람들 틈에 끼지도 못하고 멀찍이 떨어져 섰다. 로마정부에 고용되어 세금을 징수해야 했기에 동족들의 멸시와 경멸의 대상임을 그 스스로가 알고 있었던 까닭이다. 그렇다고 그가 하나님 앞에서 떳떳했던 것도 아니었다. 유대인이기에 율법을 준수하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 했는데도 하나님을 멀리 떠나 동족들을 괴롭히며 로마에 충성하는 그였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그는 괴로운 심정을 하나님께 아뢰고자 기도하러 성전에 들어간 것이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감히 설 수 없는 죄인이라는 죄책감 때문에 그는 하늘을 향해 눈을 들 수조차 없었다. 동시에 다른 사람들처럼 손을 높이 들고 기도할 수도 없었다. 때문에 그는 고개를 숙이고 가슴을 치며 “하나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 기도한 것이다. 그가 가슴을 친 까닭은 나라와 민족을 배반하고 로마정부를 위해 일하는 세리가 된 근원지가 가슴이었기 때문이다.
세리들은 원칙과 규정대로만 세금을 걷지 않았다. 책정된 액수 이상의 세금을 받아 엄청난 부를 축적한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세리들의 횡포는 힘들게 살아가는 유대 서민들의 삶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물론 그런 그들의 행위는 큰 죄악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전당 잡은 물건을 돌려주지 않거나, 도둑질하거나. 이웃을 착취하는 것은 죄악이라 말씀하셨으며, 남의 것을 강탈하면 빼앗은 것에 20%을 더하여 갚으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이다.(레 6:2-5)
여리고의 세리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 남의 것을 빼앗은 것이 있으며 4배로 갚겠다고 한 것은 그가 진정으로 회개한 증거였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눅 19“9)하신 것이다. 그 당시 세리들은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세금을 부당하게 부과했기에 보상을 하려해도 누구에게 얼마를 해야 할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성전안의 세리도 그들 중의 하나였으며, 그는 어떻게 기도하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그가 가슴을 두드리며 “하나님, 이 불쌍한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 기도한 것은 이런 까닭이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들은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많은 사람들이 바리새인의 유창한 기도에 감탄하며 율법대로 사는 그를 높이 평가했을 것이다. 하지만 고개 숙이고 통회의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의 자비의 손길에 자신을 맡기는 세리를 향하여는 “죄인이면 집안에 조용히 앉아 있을 것이지 거룩한 성전에는 왜 들어왔느냐?”고 멸시의 눈초리를 보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들으신 것은 세리의 기도라는 말씀이셨다. 어째서일까? 하나님께서는 입술의 기도 아닌 마음의 기도를 들으셨기 때문이다. 바리새인의 가슴은 그 자신의 의로 가득 차 있었지만 세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을 갈망하는 마음만을 지니고 있었다.
그 때문에 세리는 “하나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 기도했고, 그의 기도는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주소서.”(시 53:1)라 한 다윗의 기도를 닮은 것이었다.
부하 장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한 다윗이 그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드린 기도에 응답하여 그의 죄를 사하여 주신 것같이 하나님께서는 동족들의 피땀 어린 노력의 결실을 도둑질한 죄인을 받아달라는 세리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이다.
이 사실을 지적하면서 싸이몬 키스트메이커(Simon Kistemaker)는 “세리는 죄인의 신분으로 성전에 들어왔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나왔지만 바리새인은 죄인의 모습 그대로 성전을 나갔다.”고 말해준다.
이 비유를 마치시면서 예수님은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말씀하신다. 세상과 다른 하나님의 나라의 법칙을 다시 한 번 들려주신 것이다.
오늘 날 우리들 주위에는 이 비유에 등장하는 바리새인을 닮은 사람들이 많기만 하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비난하거나 정죄하는 대신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바라보며 그의 사랑의 손길에 우리들을 맡겨야 할 줄 안다. 그래야만 우리의 모든 죄악을 용서하시고 있는 모습 그대로 우리를 품어주시는 하나님의 품에 안겨 영생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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