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ekim
(목사)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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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비유-무익한 종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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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니라.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더라.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는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니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눅 17:1-10)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이었던 바리새인들은 겉과 속이 완전히 다른 위선자들이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그들을 가리켜 “회칠한 무덤 같아서 겉으로는 깨끗하고 아름다우나 안에는 죽을 사람의 뼈와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다.”고까지 말씀하셨다. 


그들은 재물은 자기들처럼 의롭고 능력 있는 사람들이 소유해야 한다는 물질관을 지니고 그네들의 부당한 탐심을 정당화하는 위선도 서슴없이 행했다.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불의한 청지기 비유”에 이어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를 들려주심으로 그릇된 물질관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 것인가를 알려주신 것이다.


그런 후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몇 가지를 경고해 주시는데 그것들은 직접적인 연관성을 지니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것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라면 마땅히 알고 실천해야 할 인생의 수칙과도 같은 것들이다. 제일 먼저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에게 죄를 범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악한 것인가를 말씀해 주신다. 


이기심과 악독한 생각에서 벗어나기 힘든 존재가 인간이기에 누구나 잘못을 범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누구라도 주위 사람들에게 죄를 범하게 하는 것은 목에 큰 맷돌 짝을 달고 바다 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같은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 죄악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신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이 지적하시는 “이 작은 자”는 철없는 어린 아이나 초 신자들은 물론 힘없고 미천한 이들을 가리킨다. 동시에 그때 유대인들이 멸시하고 천대했던 이방인들이나 사회적으로 버림받고 배척 받던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런 사람들이야 말로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 올바로 인도하여 구원의 길에서 이탈하지 못하도록 해야 할 대상인 것이다. 


이어서 예수님은 믿는 자들은 항상 형제의 허물과 잘못을 용서할 마음의 자세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베드로가 형제의 죄를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일곱 번의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 하셨다. 용서하는 마음은 믿는 자가 필수적인 성품이어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라면 언제나 또 무엇이든지 용서할 수 있어야 하되 용서하기에 앞서 죄 범한 사람을 “꾸짖고”, 그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면” 용서하라고 하신 것에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행위나 생각이 죄일진대 죄악은 믿는 자가 증오해야 마땅하며, 지은 죄를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는 귀중한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이때 제자들은 돌연히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 아뢴다. 제자들이 그런 청을 드린 까닭은 만약 그들에게 큰 믿음이 있다면 믿음이 연약한 이들을 더 정성껏 돌보며, 그들의 잘못을 용납하고,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요청에 예수님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째 뽑혀 바다에 던져지라.”해도 그대로 될 것이라 말씀하신다. 사랑과 용서는 믿음의 크기에 따라 행해지는 것이 아니며, 참된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신기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말씀을 해주신 것이다. 


믿음과 기도로 무장하고 전진하는 십자군의 정병들은 그 어떤 험산준령도 넘을 수 있으며, 아무리 간교하고 악랄한 사탄의 기습공격도 능히 물리칠 수 있는 것이다.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불치의 병에 걸리면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나 의학의 발달로 그때는 고칠 수 없었던 많은 병들이 더 이상 인간의 생명을 위협할 수 없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믿음이 없을 때는 할 엄두고 못 냈던 일들이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시는 믿음을 지닌 성도들 앞에서는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은 방해요서가 될 수 없게 되었다. 


연약한 형제들을 돌보며, 그들의 허물과 과실을 감싸주며 용납할 것과 믿음으로 세상을 정복하라 말씀하신 후 예수께서 들려주신 것이 “무익한 종 비유”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세 가지 질문을 던지신다. 하루 종일 일하고 돌아온 종에게 “시장할 테니 와서 밥 먹어라.”고 말할 주인이 있겠느냐? 종이 아무리 피곤하고 지쳐있을 지라도 주인은 “내 밥상을 차리고, 내가 먹는 동안 시중들다 내가 다 먹은 후 네가 먹어라.” 하지 않겠느냐? 시키는 일을 다 했다고 주인이 종에게 고맙다고 하겠느냐?


이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은 모두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에는 종들의 입장에 서서 그들이 이해하며 일을 시키는 주인은 없었으며, 그 누구도 자기를 위해 수고하는 종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고대사회의 주종관계는 주인은 종들을 마음대로 부릴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었고, 종들은 주인의 명령에 무조건 따를 의무를 가지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주인과 종 사이에는 “명령과 복종”만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 같은 주종관계는 오늘날의 사회에서 특히 서구사회에서는 통용될 수 없다. 고용주와 고용원 사이에는 상세한 고용계획이 체결되고, 고용원들은 그들이 결성한 노조를 통해 철저하게 그들의 권익을 보호받기 때문이다. 


이것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부당하고 비인간적인 종에 대한 갑질을 통해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와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의무를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하나님의 일꾼(종)이다(고전 4:2). 그러기에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권리가 주어졌지만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의무 또한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권리를 주장하려면 거기 따르는 의무를 수행해야 하고, 의무를 감당한 후 권리를 행사하게 되는 것이 권리와 의무의 상관관계인 것이다. 


예수님은 “무익한 종 비유”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어떤 자세로 감당해야 할 것인가를 일러주고 계시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특권의식을 버리고 그의 충성스러운 일꾼으로서의 의무를 수행할 마음의 자세를 확립해야 한다. 


천국에서 누가 크냐는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막 9:35)하시며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심으로 섬기는 자의 본을 보여주셨다.(요 13:1-17)


섬김이 주인을 향한 종의 기본태도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섬겨야 할 주인은 하나님 한 분뿐이라는 사실이다. 예수께서는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하심으로 이 점을 분명히 하셨다(눅 16:13).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정복한 후 여호수아는 마지막 설교에서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저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한 후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을 섬기겠노라.” 선언하였다(수 24:15).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기에 하나님만을 위해 우리의 생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이 비유가 말해주는 또 다른 진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목적이 상급을 받기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고대시대에 노예나 종들은 아무리 위험하고 힘들더라도 주인의 명령이라면 아무런 불평이나 항의도 하지 못하고 묵묵히 그리고 충성스럽게 수행해야 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어떤 대가나 상급을 기대하지도 않았고, 또 기대할 수도 없었다. 주인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의무이며 인생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의 일꾼으로 선택된 우리들은 어떤 환란과 핍박이 있을지라도 맡겨진 사명을 완수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그 일을 하게 하시는 하나님에게 우리가 하는 수고와 당하는 고난과 박해에 대한 보상을 요구할 권리가 우리에게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주셨으며, 그의 동역자가 되어 그의 역사운영에 동참할 수 있는 축복된 사명까지 주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며 “나는 무익한 종이다.”란 마음을 지니고 충성하는 것뿐이다.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다 천국 문을 두드리면 예수님은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며 두 팔을 활짝 벌려 우리를 맞아 주실 것이다. 우리가 정말 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와 사랑으로 주시는 그 상을 받는 순간 우리는 무익한 종에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유익한 종으로 변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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