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ekim
(목사)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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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비유-불의한 재판장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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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주소서’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 18:1-8)

 

 

“불의한 재판장 비유”는 “밤에 찾아온 친구 비유”(눅 11:1-13)와 마찬가지로 쉬지 않고 하는 기도는 반드시 응답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비유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의 그의 재림에 관해 믿는 자들이 알아야 할 것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고 계시다. 이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란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예수께서 답변하신 후에 하신 것이며, 비유를 끝내면서도 그가 다시 오실 때 사람들의 믿음에 관해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인간사회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에 대해 말해주는 이 비유에 등장하는 두 인물은 어느 도시의 재판장과 과부다. 먼저 재판장에 대해 생각하면 그는 유대인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그 당시 분쟁이 생기면 유대인들은 법정에 가기 보다는 장로들을 찾아가곤 했다. 그러나 꼭 법의 중재를 받아야 할 경우에는 원고와 피고가 선택하는 판사와 법정에서 지정하는 판사 셋이 그 사건을 다루게 되어 있었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판사는 한 명이기에 그는 당시의 유대 왕 헤롯이나 로마 정부에서 임명한 비유대인 이었을 것이다. 그런 판사들은 상부의 지시나 뇌물을 받으면 증거와 양심에 따라 해야 하는 재판의 원칙 같은 것은 무시해 버렸다. 때문에 “도둑 같은 판사”(Robber judges)"란 말이 나돌 정도로 그들에 대한 평판은 좋지 못했다.


과부의 청원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녀가 재판장에게 계속하여 요구한 것은 “내 원수에 대한 청원을 해결해 주십시오.”라고만 기록되어 있는 까닭이다. 유대사회에서 과부들은 외롭고 고독했으며, 그들에 대한 부당한 대우나 핍박은 많고도 심했다. 


과부의 재판장이 되어(신 18:5) 정의를 행하시는 하나님(신 18:5)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의지할 데 없는 과부와 이혼당한 여자들을 돌보라고 명하셨다. 그러나 많은 이스라엘의 권력자들은 뇌물과 선물 받기를 좋아하고 고아와 과부들을 돌보는 일에는 인색했다.(사 1:23) 


하나님께서 “과부와 고아와 외국인들을 억압하며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은 심판하겠다.”(말 3:5)고 경고까지 하셨지만 힘없고 가진 것 없는 과부들은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늘 억눌리고 짓밟히며 살아야 했다. 


이 비유 속의 과부가 변호사를 고용할 수 있었다면 쉽게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었겠지만 돈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는 그녀로서는 악명 높은 재판장을 찾아 다니며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호소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을 멸시하기로 소문난 재판장은 가련한 과부의 청원을 아예 무시해 버리려 했다. 하나님을 모르기에 불쌍한 그 여인을 돕는 것이 그의 의무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고, 그녀의 문제를 해결해 주더라도 그에게 돌아올 이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불의한 재판장은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았지만 과부는 계속하여 그녀의 청원을 들어달라고 매달렸다. 그러자 재판장은 “이 여자가 계속 성가시게 구니 그녀의 간청을 들어주어야겠다. 그렇지 않으면 이 여자가 매일 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라 생각하고 그녀의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성경에는 기록되어있지 않지만 재판장은 그녀가 매일 법정에 드나들면 그에 대한 평판이 나빠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이 비유를 들려주신 예수님은 불의한 재판장일지라도 단념하지 않고 매달리는 여인의 하소연을 들어주었다면 사랑의 하나님이 그가 택하신 자들의 간구를 어찌 안 들어주시겠느냐고 반문하시므로 믿음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된다고 말씀해 주신 것이다. 


따라서 이 비유와 “밤에 찾아온 친구 비유”의 핵심은 동일하다. 둘 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의한 재판장 비유”에는 “밤에 찾아온 친구 비유”에는 없는 내용이 담겨 있다. 처음 비유에는 “구하면 주실 것이요 찾으면 찾을 것이고 두드리면 열릴 것이라.”(눅 11:3)는 기도응답의 대원칙만이 기록되어 있지만 나중 비유에는 기도에 관한 가르침이 예수님의 재림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처음 비유에 등장하는 두 사람의 관계는 친구였다. 그러나 두 번째 비유의 주인공인 재판장과 과부는 완전히 남남이었다. 신분상으로 따지면 재판장은 특권층에 속했고, 과부는 사회로부터 버림받고 천대받는 가련한 존재였다.


따라서 어떤 면에서는 재판장이 과부의 청원에 손도 대지 않으려 했던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과부는 포기하지 않고 재판장에게 그녀의 청원을 들어달라고 호소하여 목적을 달성했다. 


재판장이 그녀의 청을 들어준 것은 앞으로는 판사의 직분을 올바르게 수행하겠다는 결의에서가 아니었다. 불쌍한 여자를 도와야겠다는 인간애의 발로도 아니었다. 연약한 과부를 돌보라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서는 더욱 아니었다. 그녀의 계속되는 청원에 더 이상 신경 쓰기 싫었고, 그녀로 인해 혹시라도 그의 명성에 악영향이 미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불의한 재판장은 그녀의 사건을 처리해 준 것이었다.


불의한 재판장은 올바른 동기에서 과부를 도와준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은 우리를 향하신 그의 인자하심이 한없이 크고, 그 진실하심이 영원하기 때문이다.(시 117::2) 


불의한 재판장이 불쌍한 과부의 청을 들어준 가장 큰 이유는 그녀가 매일 외쳐대는 하소연이 듣기 싫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리 밤낮으로 소리 높여 기도한다 해도 귀찮아서 응답해 주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언제 필요로 하는지를 알고 계시기에 그의 시간표에 따라 그가 택하시는 방법에 의해 우리의 간구를 들어 주시는 것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님의 기도가 “내 아버지시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로 끝나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우리의 기도가 속히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낙심하지 말고 인내하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마치시면서 “내가 다시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보겠느냐?”로 물으셨다. 이 비유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말씀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서두에서 언급한 대로 이 비유는 예수님의 재림과 연관되어 있다. 말세의 여러 가지 징조들에 대해 말씀하신 후(눅17:20-37) “불의한 재판장 비유”를 들려주셨으며, 비유를 끝내시면서도 그가 다시 올 때 사람들의 믿음에 대해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세상에 다시 오셔서 공의로 산자와 죽은자의 재판장이 되실 분이시다.(행 10:42) 그러므로 우리들은 우리가 간구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그 날까지 끄기 있게 기도하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 비유는 믿는 자 한 사람 한 사람이 항상 기도해야 함은 물론 교회적으로도 주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교회의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게 해달라고 기도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이 가르침은 교회는 어떤 상황에서도 세상과 타협하거나 세상에 동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예수님의 경고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천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영광 중에 다시 오셔서 모든 교회들이 믿음의 반석 위에 굳게 서 있으며, 믿는 자들 모두가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을 보기 원하신다. 


2,000여 년의 기독교 역사를 뒤돌아보면 믿는 자들이 세상으로부터 받은 고통과 박해는 크기만 하다. 그러나 십자군의 정병들은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천성문을 향한 행군을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 지구촌 구석구석까지 십자가의 불빛이 어둔 세상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교회는 아직도 세상의 핍박과 박해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갈보리 언덕에서 패배한 사탄의 잔당들이 갖가지 악랄하고 간교한 방법과 수단을 동원하여 교회의 파탄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굳건한 믿음 위에 서서 끊임없는 기도로 사탄의 계교와 유혹을 물리치며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내가 다시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보겠느냐?”물으시는 예수님 앞에 나아가 “예수님, 저희들은 쉬지 않고 기도하며 세상을 향한 모든 욕망을 버리고 사탄의 달콤한 유혹도 물리치며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라 보고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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