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ekim
(목사)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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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비유-잃어버린 아들 비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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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아들을 떠나 보낸 아버지는 눈물로 기도하며 그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생각해 보면 그는 참으로 아들들을 사랑하는 사려 깊은 아버지였다. 둘째 아들이 그에게 돌아올 유산을 미리 달라고 했을 때 그는 얼마든지 그 요구를 거절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사리판단이 부족한 아들의 잘못된 판단을 지적하며 달래거나 꾸짖어 보아도 생각을 바꿀 아들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에 일단 그의 말대로 해준 후 스스로 정신을 차릴 때를 기다리기로 작정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들을 떠나 보낸 아버지의 마음은 한시도 편할 수 없었다. 


잘못을 깨닫고 속히 집으로 돌아오게 해달라고 눈물로 기도하면서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아들이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하며 지내는지 알아보았을 것이다. 따라서 아버지는 아들이 가지고 떠난 돈을 물 쓰듯 하며 방탕한 생활에 묻혀 지내다 들판에서 유대인들에게 죽기보다 더 치욕적인 돼지를 치며 연명한다는 가슴 아픈 소식을 전해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가 사람을 보내 아들을 데려올 시도를 하지 않은 것은 그 자신이 스스로 깨닫고 돌아오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목자가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선 것은 양은 스스로 길을 찾아 돌아올 수 없는 동물이기 때문이었고, 여인이 등불을 켜 들고 잃어버린 은전을 찾은 것은 은전은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물건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인간은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존재이기에 아들이 제 정신으로 돌아오면 자신이 범한 죄를 깨달아 회개하고 돌아와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음을 알고 있었기에 그때가 속히 오기를 기도하며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창가에 기대앉아 아들이 떠나 걸어간 길을 바라보는 것을 일과로 삼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멀리서 그의 집을 향해 비틀거리며 다가오는 아들의 모습을 발견한다. 거리도 멀었고, 행색도 초라하기 그지없어 알아보기가 쉽지 않았지만 기다리는 아버지의 눈에는 틀림없는 그의 아들이었다. 


그러기에 그는 아들을 향해 달려간다. 이 광경을 무디 목사는 사랑의 망원경으로 아들이 걸어올 방향을 지켜보던 아버지는 지치고 피곤하고 초라한 아들의 모습이 그의 망원경에 포착되는 순간 농장주의 체면과 자존심을 송두리째 내어버리고 아들을 향해 맨발로 뛰어갔을 것이라 말한다. 


이상한 듯이 쳐다보는 사람들의 눈초리 같은 건 아랑곳 하지 않고 달려간 아버지는 아들을 껴안고 입 맞춘다. 그러자 아들은 아버지를 향해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범해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도 없습니다.”라며 그를 품꾼의 하나로 여겨달라고 말하려 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더 이상 그의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종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고 명령한다. 좋은 옷을 입히는 것은 그 당시 귀한 사람을 맞이하는 예우였으며, 반지를 끼워준 것은 그를 아들로 인정함과 동시에 아버지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한 것이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아들에게 신을 신긴 것은 그로 하여금 진정한 자유인으로서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기회까지 부여한 것이다. 


그 시대에는 노예나 가난한 사람들은 신을 신지 못하고 맨발로 다녔다. 탕자도 신발을 신지 못하고 멀고 험한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아버지는 좋은 옷을 입히고, 반지를 끼우고, 신발을 신게 함으로 그가 집을 나가기 전에 누렸던 그의 둘째 아들로서의 모든 권리를 행사하며 살 수 있도록 해준 것이다. 


그런 후 아버지는 종들에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성대한 잔치를 열라고 분부한다. 목자는 친구들과 이웃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잃어버린 양을 찾은 기쁨을 함께 나누었으며, 은전을 잃어버린 여인은 그것을 발견하자 동네 사람들에게 은전을 되찾은 감격과 기쁨을 알렸다. 탕자의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맞이하는 기쁨을 혼자만 간직할 수 없어서 많은 사람들이 함께 먹고 즐길 수 있는 잔치를 베푼 것이다. 


이 잔치를 준비시키면서 아버지가 종들에게 “내 아들이 죽었다 살아왔다.”고 한 말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죄악 된 삶 속으로 빠져 들어갔던 아들이 제 정신이 들어 회개하고 돌아온 것을 단순히 집을 나갔던 아들이 돌아왔다 하지 않고 “죽었던 아들이 살아서 돌아왔다.”한 것은 죄 속에 산다는 것은 살아도 죽은 것이요, 죄악을 벗어버려야만 살아있다는 것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비유는 돌아온 아들에 대한 유산문제가 어떻게 종결되었는지에 대하여는 언급이 없다. 그러나 그 문제가 어떻게 처리되었는가는 우리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용서받기 힘든 죄를 지은 아들을 아버지가 기쁨으로 맞이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비유는 탕자를 환영하는 잔치가 벌어지는 장면에서 끝나지 않는다. 풍악이 울리면서 즐거운 잔치가 시작되었을 때 밭에 나갔던 맏아들이 돌아온 것이다. 집안에 휘황찬란한 등불들이 켜있었고, 흥겨운 음악에 맞추어 사람들이 춤추며 즐기는 소리를 듣고 맏아들은 종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주인께서 그를 맞아드리고, 이같이 잔치를 베푸시는 겁니다.” 이 말을 들은 맏아들은 분노하여 집에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나와서 함께 들어가자고 하자 그는 “제가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섬기며 한 번도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한 적이 없건만 저를 위해서는 이런 자리를 마련해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놀아나며 아버지의 재산을 날려버린 아버지의 아들이 돌아왔다고 이 같이 잔치를 베풀어 주십니까?”라 항의한다. 


여기서 맏아들이 돌아온 탕자를 “아버지의 아들”이라 부른 것은 그가 “당신에게는 아들인지 몰라도 내게는 동생이 아닙니다.”란 의사표시다. 하지만 아버지는 맏아들을 나무라지 않고 “너는 나와 항상 같이 있으니 내 것은 다 네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잃었다가 다시 찾았으니 함께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말해준다. 


아버지는 반항하던 순종하던 모든 자식들을 똑같이 사랑한다는 것을 보이심과 동시에 맏아들도 회개하고 돌아온 동생을 용서하고 받아드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가르쳐준 것이다.


맏아들이 아버지의 말을 듣고 동생을 환영하는 잔치에 참여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예수께서 거기 관해 말씀하시지 않고 비유를 끝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불효막심 했던 둘째 아들을 위해 잔치까지 베풀어 주는 것을 못 마땅히 여기는 맏아들이 안으로 들어와 함께 즐길 수 있도록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들어간 것만은 확실하다.


죄악의 물결에 휩쓸리던 돌아온 동생을 반갑게 맞이하며 기뻐하자고 권면한 아버지였으니까 말이다. 선택은 맏아들에게 주어졌다. 사랑과 용서와 평안으로 가득 찬 잔치에 참여하여 함께 기쁨을 누리느냐 아니면 동생을 미워하고 아버지를 원망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어둠 속에 계속 서있어야 하느냐를 결정할 사람은 맏아들이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들려주시기 전에 “잃어버린 양 비유”와 “잃어버린 은전 비유”를 말씀하셨는데 세 비유 모두 하나님을 떠나 죄의 길로 들어서는 사람처럼 불쌍하고 비참한 존재는 없지만 죄의 길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환희와 기쁨과 행복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동시에 하나님은 죄는 미워하시지만 죄인들이 회개하기를 애타는 심정으로 기다리시며, 그들이 돌아오면 두 팔을 활짝 벌려 맞이하시는 사랑과 자비가 풍성한 분이심을 보여주고 계시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축출당한 후에도 사람들은 끈임 없이 하나님의 뜻에 도전하는 당돌함과 우매함을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불굴의 인내심을 발휘하시며 그들을 멸하는 대신 구원하기를 원하셨다. 


하나님은 하나뿐인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고,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죄 값을 치르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구원의 문을 활짝 열어놓으셨다. 하지만 구원의 문이 열렸다고 모든 사람들이 자동적으로 구원의 은총을 받는 것은 아니다. 지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사람들만이 구원의 은총에 동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이 놀라운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예수님으로 하여금 길 잃고 헤매는 죄인들을 찾아 나서게 하시고, 성령의 불울 밝히시며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암흑 속에 누워있는 사람들을 찾아 나서게 하셨으며, 하나님 자신은 죄의 사슬에 묶여 신음하는 불쌍한 영혼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것이다. 


그러다 죽음의 길을 벗어나 생명의 길로 들어서는 죄인들을 발견하면 달려가 맞아드려 천군천사들과 더불어 하늘잔치를 베풀고 환영하는 것이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세 비유는 구원의 역사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역사에 의해 행해짐을 보여주고 있다. “잃어버린 양 비유”에서는 성자 예수님의 구원의 행위를, “잃어버린 은전 비유”는 성령님의 구원의 역사를, “잃어버린 아들 비유”에서는 인류구원을 총괄하시는 하나님의 역할을 보여주고 계신 것이다. 


이들 세 비유를 읽으면서 우리는 오늘 날 세상에는 수많은 현대판 탕자들이 방황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중에 우리들 자신이 깨어있지 않나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행여 우리가 있는 곳이 온갖 풍요와 기쁨과 만족이 있는 하나님의 품 아닌 절망과 외로움과 고통과 굶주림이 있는 삭막한 들판이라면 즉시 그 곳을 빠져 나와 우리가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집으로 달려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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