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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도 까불면 나한테 죽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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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전에 올라가 하나님 앞에 선 바리새인은 “나는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누가복음 18장11~12절)라고 기도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의 대표로 등장하는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 즉 율법을 삶으로 구현하기 위해 세세한 목록을 정했다. 그리고는 이를 악물고 그것을 실천했다. 도덕, 윤리적으로도 주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래서 예수님의 비유에 바리새인에 대한 평가가 등장한다.

그들은 이런 ‘율법 지킴’을 무기 삼아 다른 사람들과 구별 짓기를 좋아했다.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과시하는 용도로 율법을 이용했다. 성전에 바리새인과 세리가 기도하러 올라갔는데,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눅 18장11절) 기도했다. 바리새인이 감사한 이유 중 하나는 ‘세리와 같지 않다는 점’이었다.

세리는 쉽게 말해 세무소 직원이며 당시 유대 사회에서 로마제국의 앞잡이로 유대 동족의 고혈을 빨아먹는 집단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었다. 돈 때문에 나라 팔아먹은 자들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성전에서 기도한 이후 의롭다 함을 받고 집으로 간 것은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한 세리였다는 데 있다.

 누가복음에서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비유 앞에는 과부와 재판장의 이야기가 있다. 예수님은 불의한 재판장과 과부의 비유를 결론지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라고 물으신다. 그리고는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셨다.

 눈여겨봐야 할 단어는 ‘택하신 자’다. 택하신 자와 믿음을 연결해서 생각하면 세상에는 택하심으로 말미암아 믿음을 내놓을 수 있는 자가 극히 적은 수라고 유추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물으신 것은 ‘거의 없다’는 의미다. 하나님 앞에서도 자신의 행위를 스스로 칭찬하며 당당했던 바리새인은 의롭다 함을 입지 못했고,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선택 밖에 있는 무리로 분류된다.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고상한 기도까지 했지만 실상 그들은 전혀 믿음이 없는 자들이었다.

 이처럼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누가복음 16장15절) 바리새인들의 특성을 성경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16장14절)이라고 지적한다. 이 단락은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 붙어 있는데, 예수님께서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듣고 있던 바리새인들은 이를 비웃었다. 성경은 그들이 예수님을 비웃은 이유에 대해 ‘돈을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풀이한다.

바리새인들은 마음 속으로 ‘우리는 십일조와 구제를 그 누구보다 열심히 할 만큼 돈을 좋아하지 않는데…’ 하면서 예수님을 비웃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비웃음에 대해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16장15절)이라고 지적하셨다.

 예수님은 불의, 토색, 간음하지 않고, 금식과 십일조에 열심을 부렸던 바리새인들의 그 행위(돈)가 바로 사람 중에 높임을 받으려는 수작이었으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아닌 재물을 섬기는, ‘돈을 좋아하는’ 행태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의 가치, 스스로를 높게 평가하고 또한 남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으려는 그 행위가 바로 재물, 우상을 섬기는 것이라는 지적이다.

 복음서에는 돈을 좋아했던 도둑이 또 등장하는데, 가룟 유다이다. 예수님의 수난을 앞두고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를 부었을 때 유다는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요한복음 12장5절)”고 꾸짖는다. 하지만 그의 속셈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는 도둑’(6절)이며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가기 위해서였다.

 유다 역시 바리새인과 마찬가지로 ‘태어나지 않았으면 더 나았을’(마태복음 26장24절) 하나님의 선택 밖에 있던 자다. 예수님은 제자들 무리 안에 굳이 유다를 포함시켜 교회에게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의 세상적 야망을 위해 평생 내달리는 자들이다. 가룟 유다는 당시 로마의 압제로부터 유대 땅의 해방을 추구하던 정치단체에서 활동했던 인물로 추정된다. 

 마태복음에는 마리아의 향유 사건 이후 유다의 배반이 그려진다. 그는 대제사장을 찾아가 은 삼십을 받고 예수님을 넘겨주기로 약속한다. 유월절 만찬에서 예수님은 제자 중에 한 사람이 자신을 팔아 넘길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이 모두 근심하며 “나는 아니지요”라고 물었다. 유다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예수님은 “네가 말하였다”면서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 넘길 것을 예언하셨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팔아 넘기는 배신행위를 멈출 힘이 유다에게는 없었다. 그 안에 이미 악마가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며, 구약성경에서 메시아가 친구로부터 배신 당할 것이 예언됐고, 그 예언은 정확하게 성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가룟 유다는 뒤늦게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범죄하였도다”고 뉘우쳤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돈, 즉 세상적 가치를 십자가보다 우선했던 제자의 최후다.

 그의 죽음에 대해 성경은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나니 일렀으되 그들이 그 가격 매겨진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가격 매긴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마태복음 27장9~10절)”고 기록한다.

 결국 바리새인이든, 가룟 유다든 복음 밖에 있는 자들도 모두 하나님의 언약 완성을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마땅한 역할을 수행한다. 그 역할이란 멈출 수 없는, 지독한 ‘돈 사랑’이다. 저주와 멸망이 마땅한, 불쌍한 죄인이라는 자아인식은 온데간데 없고, 세상에서 높은 자리에 올라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 하는 것이다. 겁을 상실한 채 “하나님 까불면 나한테 죽어”라고 말하는 어떤 목사도 그런 부류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역사 속에서 허용하시는 이유는 택함 받은 성도들에게 은혜와 복음의 이야기를 가르치기 위해서다.

‘사람 낚는 예수, 사람 잡는 복음’(부크크 출판사, 김용호 )에서 일부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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