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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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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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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5
참새 다리의 먼지 떨어내기


이리 떼 사이로 보내지는 양과 같은 신세/ 회당에서 채찍질을 당하고/ 권세자들 앞에 끌려가고/ 죽는 데 내어줌을 당하고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고/ 박해를 받아 이 동네, 저 동네 떠돌고.

 

‘어떤 사람들’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미움과 박해를 당하는, 상상조차 어려운 그런 대접을 기쁘게 받아들이며 사는 존재들이 있을까.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이야기다.
마태복음 10장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세운 뒤 세상으로 보내시며 “사람들을 삼가라,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17절)”고 하셨다. 
마태복음 10장과 비슷한 내용이 기록된 마가복음 13장, 누가복음 21장에서는 예루살렘의 파괴를 비롯해 ‘재난의 징조’를 묻는 제자들에게 대답하시며, 앞으로 닥칠 시련을 말씀하셨다.
실제로 제자들은 물론 초대교회 성도들도 예수께서 말씀하셨던 고난을 그대로 받았다.  
공회는, 당시 유대교의 최고법원, 산헤드린이었다. 사도행전 4장에 베드로와 요한이 복음을 전하다 공회에 끌려가 재판을 받은 이야기가 나온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 증언했을 때 공회원들은 베드로와 요한에게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겁박했다.
회당은 율법 등을 가르치는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이다. 그런 곳에서 예수의 제자들이 채찍질을 당할 것임이 예고된 것이다.

 

이 일의 근원은 ‘나로 말미암아’(18절)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22절)’에 있다. 예수 때문에 제자들이 고난을 당하도록 이미 프로그램 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또 제자들에게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한복음 15장 18~19절)”고 하셨다. 이처럼 제자들이 미움과 고난을 당하는 이유는 선명하다. 소속이 다르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의 기록처럼 세상으로부터 오는 질시와 박해는 예수께서 먼저 몸소 겪으셨다. 
“집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그 집 사람들이랴”(마태복음 10장25절). 
당시 유대사회의 지도자들은 예수를 향해 바알세불이라고 불렀다. 누가복음 11장에는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때 주변 사람들이 “그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 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힐난했다. 심지어 예수께서 귀신 취급을 당하셨다면 그분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제자들을 향한 세상의 시선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런데 예수께서도 유대인 지도자들을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일갈하셨다. 소속이 다른 데서 발생하는 정면 충돌이다.

 

더 심각한 이야기는 마태복음 10장 후반부에 나온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34~36절).”
환하게 웃는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찬양하는데 익숙한 기독교인이라면 기겁할 만한 성경의 구절이다. 예수 때문에 세상은 화합하는 것이 아니라 갈라지고, 쪼개지고, 칼을 휘두르게 돼 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여기서 멈추실 생각이 없으셨다.
제자들에게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37~38절)”고 하셨다.
‘합당하다’는 단어는 ‘어떤 것과 비슷한 가치가 있는’, ‘~과 맞먹는’, ‘칭찬 받을 만한’ 등의 뜻을 담고 있다. 이것이 예수께서 세우신 제자들의 선발 기준이다. 부모자식, 즉 세상 어떤 무엇보다 예수를 더 사랑하지 않으면 자격 미달이다. 따라서 예수의 제자들은 오직 예수만 사랑하며, 예수님처럼 반드시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게 돼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런 이야기는 제자들을 세우고,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에게 가라”고 하시면서 말씀하신 내용이다. 그들을 보낸 이유는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기 위해서다. 
어찌 보면 제자들에게 도달 불가능한 자격 기준을 세우신 이유는, 먼저 사람들의 됨됨이를 보고 제자를 세우지 않았다는 것을 반증한다. 또한 그것은 제자의 자격조건을 예수께서 강제로 부여하시겠다는 의미도 된다. ‘제자 완성’의 자리로 예수께서 직접 끌고 가시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제자로 ‘합당하게’ ‘칭찬 받을 만하도록’ ‘예수님처럼’ 빚어내시겠다는 뜻이다. 그것을 표현한 곳이 요한복음 15장에 등장하는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라는 구절이다. 왜냐 하면 그들은 세상에서 택함을 받고 뽑혀 나와 천국 복음을 전파해야 할 사명을 부여 받았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전파해야 하는 ‘천국 복음’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천국,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은 세상 입장에서 날벼락이다. 마치 바벨성처럼 사람들이 있는 힘과 재료를 모두 끌어 모아 하늘에 닿으려 노력하고 있는데, 여호와께서 그들의 노력을 부정하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열심히 일하고 있는 사람들을 사방으로 확 흩으신 것과 같은 이치다. 토라를 외우며, 율법을 그대로 지키기 위해 분투하던 유대인들에게 ‘악마의 자식’이라는 저주가 떨어졌다. ‘천국 복음’은 인간들의 가치와 성취를 모조리 부정하는 데서 출발한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준다.
또한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것은 예수께서 고난을 당하실 것이란 의미다. 창세 전의 계획표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천국을 완성하실 것이란 통보이며, 실제로 그것은 골고다 언덕에서 다 이루었다.

 

결국 제자들이 박해와 고난을 겪는 것은 십자가에서 완성된 ‘은혜의 복음’ 때문이다.
실제로 당시 유대교인들이 믿고 있던 것처럼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가 메시야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바리새인 대제사장들처럼 열심히 율법을 지키며 유대교 안에서 살았다면 아무런 마찰이 일어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상과 충돌하며 살아야 하는 제자들에게는 약속이 주어졌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태복음 10장22절). 
‘견디는’이란 구절은 온전히 제자들의 노력과 분투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승천 하시기 전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태복음 28장20절)는 약속이 ‘끝까지 견디는’이란 조건을 완성시킨다. 그것이 은혜다. 
예수께서도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28절)”는 위로의 말씀을 덧붙이셨다. 세상의 핍박과 미움이 죽음처럼 고통스럽겠지만, 결국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참새 두 마리를 언급하시며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다.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마태복음 10장 14~15절).(사장/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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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2
마른 뼈들의 찬송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베드로전서 1장2절)

 

‘나는 누구인가’ 궁금했던 시기가 있었다. 신문사에 다니면서 시간을 쪼개 대학원에 진학, 상담심리를 공부하고, ‘자아발견을 위한 여행’이나 ‘긍정심리학’ 또 당시 한참 유행하던 MBTI관련 심리학책을 읽기도 했다. 그러나 책을 통해 지식으로 자기 자신을 이해한다는 게 쉽지 않았고, 조금 더 알았다고 한들 그것으로 삶을 바꾸기는 더 어려웠다.

 

사도 베드로는 신약성경 ‘베드로전서’ 첫머리에서 성도의 정체성을 한 문장에 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대목은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이다. 미리 아심, 헬라어 ‘프로그노시스’에 뿌리를 둔 단어다. 미리 앎, 선견, 이전에 한 결정, 결심 등의 의미를 담고 있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도 베드로의 설교를 기록하며 이 단어를 썼다.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사도행전 2장23절).

 

베드로에 따르면 성도라는 존재의 시작은 ‘하나님의 미리 아심’에 있는데, 성경에 등장하는 ‘미리 아심’은 두 갈래다.  
먼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미리 아심’이 있다. 로마서에서는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8장29절), “하나님의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11장2절) 등 반복하면서 ‘미리 아심’에 대한 강조를 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미리 아심’도 있다.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가 언급한 ‘미리 아심’은 십자가에 대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자체가 하나님의 결정과 결심에 따른 것이란 설명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었다. 사실 이 대목이 더 중요한데, 성도의 뿌리는 하나님의 ‘미리 아심’에서 출발해 십자가에서 완성된다는 측면에서 그렇다. 
바울은 이것을 에베소서에서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1장4절)라고 기록했다. 

 

베드로는 ‘미리 아심’에서 한발 더 나가 성도의 정체성을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에 있다고 강조한다. 
여기서 ‘순종’은 경청하고, 복종하는 것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관심을 갖고, 그것을 유심히 살펴서 듣고, 그것에 전적으로 삶을 의지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는 과정에 ‘성령께서 거룩하게 하심’이 필수요소로 등장한다. 
더 풀이하면 죄인이 복음을 듣고 반응하는 것은, 인간의 어떤 자질이나 능력, 평소 갖고 있는 개인적 관심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그 주체는 오로지 성령이라는 뜻이다. 죄인이 성도로 거듭나는 과정은 오직 성령의 일하심에서 발생한다는 것으로, 그런 과정 자체를 거룩이란 단어로 표현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곳은 에스겔 37장이다. 
여호와께서 에스겔을 바짝 마른 뼈가 가득한 골짜기로 데리고 가셨다. 그리고는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고 묻는다. 에스겔은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고 답했다. 여호와께서는 에스겔에게 대언하라고 말씀하신다. 에스겔의 여호와의 말씀을 받아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 지어다.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고 선포했다. 그때 마른 뼈들이 살아나 큰 군대가 되었다.  
바울은 이것을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로마서 6장 17~18절) 하고 설명했다. 혹 ‘마음으로 순종하여’라는 대목만 뚝 잘라 ‘인간이 순종하기로 결심한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싶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성경이 보는 인간의 실존은 죄인, 바짝 마른 뼈에 불과하다.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 ‘생기가 들어감’에 힘입어 ‘순종, 복종’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불만은 여기서 터져 나온다. 그냥 처음부터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지 못 하게 하시고, 죄를 못 짓게 조치를 하셔서, 계속 에덴에서 살게 하셨다면 아무 문제가 없지 않았느냐는 볼멘소리다. 그런 항변은 오직 관심사가 ‘나’ 밖에 없기 때문에 나온다. 내가 겪는 불행이나 불안, 고통을 곱씹으며 여호와께 싹트는 반항심이다.
그런데 인간 입장에서는 아쉽겠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관심은 오로지 ‘예수’뿐이다. 창조로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아니 창세 전부터 영원까지, 오직 예수께서 영광을 받는 데만 목적이 있었다. 인간은 그 목적을 위해 창조된 존재다. 

여기서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받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라는 표현을 썼다. 성도라고 자처하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에 생략 괄호를 치고 싶어한다. ‘택하심’이란 단어에만 눈이 번쩍 뜨이는 것이다. ‘나는 택하심을 받았을까’ 궁금증을 해소하는데 머리를 싸맨다. 
성경의 무게는 ‘피 뿌림’에 있다. ‘택하심’은 ‘피 뿌림’에서 파생된 효과에 불과하다. 피 뿌림은 십자가를 담고 있다. 창세기 초반부터 무죄한 짐승의 죽음을 시작으로, 아벨, 노아, 아브라함, 유월절 등 모든 사건과 성도들의 삶에 ‘피 뿌림’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것을 숨은 그림 찾기 하듯, 십자가를 읽어내는 것이 성경읽기의 핵심이다.   

 

하나님의 미리 아심과, 거룩하게 하심과, 피 뿌림을 통한 택하심 속에 태어난 성도에게 주어진 것은 ‘은혜와 평강’이다.
은혜와 평강은 분리된 것이 아니다. 은혜 때문에 평강을 얻는 것이다. 
그런데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을 지어다’라는 복을 받은 성도들에게 닥친 것은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베드로전서 1장6절)라는 현실이다. 성도에게 시험과 근심이 따라붙는 것이다. 

 

멀리서 예를 찾을 것 없다. 바울과 베드로의 삶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복음을 이야기하다 감옥에 수시로 갇히고, 때로 거반 죽을 때까지 두들겨 맞았다.
나아가 성도의 분투는 자기 자신 안에서 더 처절하게 벌어진다. 바로 성도를 거룩하게 하는 과정에 투입된 성령께서 하시는 일 때문이다.
“그(보혜사)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요한복음 16장8~11절)
성도 안으로 침투한 성령께서는 죄, 의, 심판에 대해 책망하신다. 여기서 책망은 ‘꾸짖고, 훈계하고, 죄를 깨닫게 하심’을 말한다. 죄인의 실존을 처절하게 발가벗겨 내시는 작업이 계속된다.
역설적으로, 그 과정 안에서 성도는 ‘은혜와 평강’을 체험한다. 두 손 들고, 십자가 앞에 납작 엎드리는 것이다. 그것이 성도의 정체성이다. 그것을 실감할 때 찬송이 터진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베드로전서 1장3절).  (사장/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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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5
영화 관람의 즐거움

 

사회생활을 하며 만난 고등학교 후배가 있었다. 연배는 7~8년 차이가 났지만 명문대를 졸업하고, 공기업에 취직을 한 젊은이였다. 성실하게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게 기특해서 가끔 점심을 함께 했다.
하루는 그가 고민을 털어놓다가 눈물을 쏟았다. 사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던 터라 가슴 찡했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대학생활을 할 때부터 그는 학교 근처의 한 교회에 출석했다. 300~400명 가량 모이는 작지 않은 교회였다고 한다. 늦게 신학공부를 마친 중년의 부목사가 대학청년부 담당으로 부임을 했는데, 그는 수요설교도 맡았다. 메시지의 주제는 언제나 ‘예수와 십자가’였다. 새로 온 부목사의 설교가 은혜스럽다는 소문이 나면서 처음 한두 달은 수요예배 참석자가 늘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도 언제나 결론이 같은 설교였다. 죄를 지적하고, 그것을 덮는 십자가의 은혜를 이야기했다. 주인공은 언제나 예수였다. 그러던 중 하루는 교회의 장로 몇 사람이 부목사를 찾아가 ‘설교의 주제를 좀 다양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달라지는 게 없었다. 6개월도 안 돼 그 부목사는 수요설교에서 배제됐다. 1년도 지나지 않아 교회에서 쫓겨났다. 
그 부목사를 따르던 대학생과 청년 몇 명이 교회를 개척하자고 따라 나섰다. 그러나 그게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고등학교 후배도 그런 과정 안에서 여러 이유로 마음에 상처를 입었던 것이다. 새로 개척했던 교회 운영도 쉽지 않자 고민을 하고 있었다.

 

구약 열왕기상 22장을 읽을 때면 한편의 영화 시나리오 같다는 생각이 든다.
유다왕 여호사밧과 이스라엘 왕 아합이 아람에 빼앗긴 땅을 되찾기로 의기 투합했다. 여호사밧은 먼저 여호와의 말씀을 들어보자고 제안했다.
아합은 선지자 400명을 모으고, 아람과 전쟁을 하면 이길 수 있는지 물었다. 선지자들은 “올라가소서. 주께서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넘기시리이다”하고 입을 모았다.
유다왕 여호사밧은 더 물어볼 만한 선지자가 있는지 찾았고, 아합은 “미가야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내게 흉한 일만 예언하기로 내가 그를 미워한다”고 답했다. 어쨌든 미가야를 부르기로 한다.
그때 시드기야라는 선지자의 대표가 철로 뿔을 만들어서는 “여호와의 말씀이 왕이 이것들로 아람 사람을 찔러 진멸하리라 하셨다”며 분위기를 잡았고, 나머지 선지자들도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 승리를 얻으소서,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넘기시리이다”하고 화답했다.

 

미가야를 부르러 간 사신은 선지자들이 하나 같이 왕에게 좋은 말만 하니, 당신도 그렇게 하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미가야는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을 말하겠다”며 거절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미가야는 아합왕을 만나 “올라가서 승리를 얻으소서,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넘기시리이다” 하고 말했다. 원하는 대답, 듣고 싶은 좋은 말을 해준 것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합왕이 “진실을 말하라”며 짜증을 냈다. 미가야는 결국 아합이 전쟁에서 패할 것이라는 불길한 말을 전했다. 
하이라이트는 19~23절이다.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내가 보니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에 앉으셨고 하늘의 만군이 그의 좌우편에 모시고 서 있는데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아합을 꾀어 그를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서 죽게 할꼬’ 하시니 하나는 이렇게 하겠다 하고 또 하나는 저렇게 하겠다 하였는데, 한 영이 나아와 여호와 앞에 서서 말하되 ‘내가 그를 꾀겠나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어떻게 하겠느냐’ 이르되 ‘내가 나가서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그의 모든 선지자들의 입에 있겠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꾀겠고 또 이루리라 나가서 그리하라’ 하셨은즉 이제 여호와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선지자의 입에 넣으셨고 또 여호와께서 왕에 대하여 화를 말씀하셨나이다.”

 

이 말을 들은 선지자 시드기야는 미가야의 뺨을 치며 “여호와의 영이 나를 떠나 어디로 가서 네게 말씀하시더냐”고 길길이 뛰었다. 
시드기야를 비롯해 모든 선지자들의 입에도 영이 임하긴 했다. 단, 여호와께서 거짓을 전하는 영을 선지자들의 입에 넣으신 것이다. 인간들끼리 지지고 볶는 순간에, 하나님의 보좌 주변에서도 보이지 않는 계획과 손길이 움직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거짓을 전하는 자들의 목소리가 더 크고, 여호와의 말씀을 전한 미가야는 오히려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됐다. 여기서 성도들의 고난이 비롯된다. 

 

사도행전 7장에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스데반은 유대인들을 향해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고 꾸짖었다. 
유대인들은 이를 바득바득 갈았고, 스데반이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고 말하자 유대인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았다. 그리고는 돌을 들고 스데반을 쳐 죽였다. 

 

미가야나 스데반의 삶은 예수를 그리는 모형이다. 
요한복음 7장의 배경은 명절인 초막절이다. 예수님은 변방인 갈릴리에 주로 계시면서 예루살렘 근처로는 가지 않으셨다. 유대인들이 죽이려 호시탐탐 기회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예수님의 형제들조차 예수를 믿지 않았다(5절)고 기록한다.
그런 형제들을 향해 예수께서는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7절)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하신 일은 세상의 실체, 악을 발가벗기는 것이었다.
아합왕은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악했다. 여호와께서 그를 꾀어 죽게 하시는 장면이 열왕기상 22장의 이야기다. 그 과정에 동원된 선지자가 미가야다.
스데반은 유대인들이 감추고 있던 악을, 목숨을 담보로 들춰냈다. 조상 때부터 유대인들은 선지자들을 족족 잡아 죽였고, 예수마저 살해했으며, 심지어 입으로는 ‘말씀말씀’ 하면서 율법조차 지키지 않았다.
세상 가운데 오신 예수님이 하신 일은 ‘세상의 일을 악하다’ 증언하고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 일을 완성하고, 확증용 대못을 박은 게 십자가다. 십자가가 섰고, 예수께서 거기에 매달려 죽었다는 의미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선포다. 세상에는 저주와 심판만 남게 된 것이다. 

 

성도는 그런 일을 객석에 앉아 영화 감상하듯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미가야와 스데반이 겪은 일을 이토록 자세히 성경에 기록한 이유다. 역사는 그런 식으로 흘러간다. ‘예수와 십자가’만 전했더니 교회에서 쫓겨났다고 하더라도 전혀 놀랄 일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그런 과정 자체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영이 활동하고 있다는 증거이며, 스데반이 목격했던 하늘이 열린 일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는 기쁨의 이유가 되어야 한다.(사장/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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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08
누구의 뜻대로?


신약성경에서 사도 바울이 쓴 서신서를 읽다 보면 유난히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뜻’이다. 우선 바울은 자신의 사역이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배경을 말할 때 ‘뜻’이라는 단어를 끌어온다.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로마서 1장10절).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고린도전서 1장1절).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고린도후서 1장1절).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에베소서 1장1절).
이밖에 골로새서와 디모데후서의 첫 마디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도가 되었다는 점’을 언급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또한 성경은 바울 자신을 비롯해 모든 성도들의 구원이 하나님의 예정과 뜻에 따라 이뤄진다는 점을 반복해 설명한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갈라디아서 1장4절).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에베소서 1장4절).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에베소서 1장11절).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골로새서 1장9절).

 

신약성경에 ‘뜻’(헬라어 ‘델레마’)이란 단어는 60번 넘게 등장한다. ‘어떤 일에 대한 결정’, ‘교서’, ‘목적’, ‘선택’ 등의 의미를 품고 있다.
‘델레마’라는 단어가 신약에서 처음 쓰인 곳은 마태복음 6장의 주기도문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태복음 6장10절)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내리신 결정이나, 하시려는 일의 목적, 또는 그분이 내린 선택 사항이 완벽하게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는 의미다. 

 

산상수훈의 끝자락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태복음 7장21절)고 하셨다. 천국에 들어가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 구절은 ‘정답’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어떤 분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응축된 산상수훈을 완벽하게 지키겠노라 결심한다. 실제로 말씀대로 살기 위해 단어 하나하나까지 놓치지 않으려 뼈를 깎는 노력을 한다.

 

사도 요한은 구원의 여정에 대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한복음 1장12~13절)고 설명한다. 
13절에는 ‘델레마토스’라는 단어가 2번 사용됐다. ‘육정’이라는 한국어로 번역했는데, ‘몸, 육체, 육신, 신체의 의지’가 그 하나이고 ‘하나님의 뜻’에 대척점으로 서 있는 ‘사람의 뜻’이 두 번째다. 요한은 ‘하나님께로부터’라는 단어를 통해 인간이 생산한 ‘뜻’을 모조리 부정하려는 강조를 하고 있다.
마태복음 7장에서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를 언급하셨으나,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볼 때 천국에 들어가고 싶은 육체의 욕망에서 비롯된 열심은 철저히 배제된다. 즉 요한복음에서 기록했듯, 몸을 입은 인간의 결심이나 의지의 표현으로 나타난 행함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스스로의 의지와 노력으로 ‘아버지의 뜻대로’ 행할 인간은 애초부터 없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이 사울이던 시절, 율법을 흠잡을 수 없을 만큼 열심히 지키고, 자신이 이해한 성경지식을 동원해 스데반 집사를 이단으로 몰아 돌로 쳐 죽이는데 앞장섰다. 사울 스스로는 그것이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과적으로 사울의 행적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은 아니었던 셈이다.
그랬던 바울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은 ‘하나님의 뜻’ 때문이었다고 반복해서 진술한다. 자신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행한 일은 스데반을 죽이고, 다메섹에 있는 기독교인들을 체포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를 찾아가 눈을 멀게 만드시고, 만나 주셨을 때 비로소 그는 하나님의 뜻 안으로 들어가게 됐던 것이다. 그것은 창세 전에 이미 예정됐던, 바울이 태어나기도 전에 정해졌던 시간표에 따라 이뤄졌던 일이다.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살았던 존재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유일하게 완벽하도록 행하신 분은 예수님 밖에 없다.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요한복음 5장30절).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한복음 6장38~39절).
히브리서(10장9절)는 이것을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고 적었다. 

 

하나님의 뜻을 그리스도께서 행하셨던 것은 십자가를 지는 일이었다. 십자가에서 흘린 피, 그것이 곧 예수께 맡겨진 영혼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살리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 스스로의 힘으로 내놓은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 심지어 회심한 이후에 행한 사역도 배설물에 포함된다. 그래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외에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고 고백할 수 있었다. 자신의 삶에서 내놓은 모든 행실을 은혜로 덮어버리는 십자가의 능력을 바라본 것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로마서 8장28절) (사장/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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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25
안다는 것

 

25년도 훨씬 넘은 이야기다. 신문사에 처음 입사했을 때 선배들이 건네는 조언이 있었다. 어떤 사건을 취재할 때, 일의 과정이나 결과를 추정하거나 예단하지 말라는 것이다. 불완전한 정보만 갖고 미리 판단하거나 섣불리 결론부터 내리면 꼭 문제가 생긴다는 충고였다. 한두 다리 건너 전해 들은 이야기, 전언을 조심하라는 선배도 있었다. ‘아’ 다르고 ‘어’ 다른데,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다 보면 어디에선가 살이 더 붙고, 왜곡되기 때문이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그럼에도 기자로 일하면서 여러 차례 오보를 내고, 정정보도를 했다. 기사를 쓰면서 결과적으로 사실관계를 정확하게 취재하지 못했던 것이다.

한 번은 고위직 공무원으로부터 A정부기관이 중소기업을 지원하는 정책을 준비 중인데, 내용이 아무리 살펴봐도 엉터리라는 제보를 받았다. 관련 중소기업체를 운영하는 기업인에게 물었는데 ‘문제의 소지가 있는 것으로 안다’는 답을 들었다. 여러 행정기관 간담회 자료도 입수했는데, 그 정책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런 정책을 준비하고 있던 중소기업 관련 A기관에 질문을 했다. 담당자는 “그런 사실이 없다”고 펄쩍 뛰었다. 제일 먼저 문제를 귀띔했던 고위 공무원에게 한 번 더 확인을 했더니, “언론에 나가는 게 부담스러워 일단 발뺌을 했을 것”이라고 답했다. 

기사를 작성하고, 보도가 나갔는데 아침부터 신문사로 항의전화가 왔다. 정책을 준비하던 곳은 A가 아니라 이름이 비슷한 B였던 것이다. 가장 기초적인 사실 확인을 게을리 했던 대가를 치러야 했다. A에 공식적으로 사과를 하고, 정정보도를 냈다. 이름을 달고 나간 기사를 정정하는 것은 무척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지만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른 만큼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언론보도를 위한 취재는 어떤 사실을 알아내려 하는 행위다. 그러나 인간들이 하는 행위에 100% 완벽하기는 어렵다. 예를 든 사례는 사소한 해프닝일 수 있지만, 무언인가를 안다는 것 자체가 늘 불완전한 것은 사실이다.

 

신약성경 누가복음 4장에서는 ‘앎’에 대한 이야기가 반복해서 등장한다.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려 광야에서 40일 금식하신 후 마귀에게 시험을 받은 이야기가 1~13절에 소개되고, 16~30절까지는 예수께서 어린 시절을 보내신 나사렛 사람들과 엮인 에피소드가 적혀 있다. 31절 이후에는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신 이야기가 연달아 나온다.

4장3절에서 마귀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고 시험했다. 34절로 가 보면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라고 말한다. 또 41절에서는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고 뜬금 고백을 내놓는다. 

그러니 악마가 광야시험에서 예수를 향해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하고 서두를 꺼낸 것은 예수님의 실체를 잠시 헷갈렸거나 전혀 몰랐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는 것을 알고도 능청을 떨었던 것뿐이다. 악마의 속셈은 뻔한 거짓말로 속이고 넘어뜨리는 것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도리어 예수께서는 이들 마귀의 정체를 정확히 알고 계셨다. 사람 안에 들어가 더러운 짓을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나사렛 사람들도 예수를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앎’의 초점은 빗나가 있었다. 예수님은 ‘늘 하시던 대로 나사렛 회당에서’ 성경을 읽고 말씀하셨다. 그날은 특히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구약성경 이사야 61장의 첫 대목을 사람들 앞에서 읽으셨다. 이것은 예언된 메시야가 오셔서 할 일, 즉 예수님 자신의 사명과 정체성을 드러내 놓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자 회당에 있던 자들이 다 주목해서 예수님을 바라보았다. 또한 그 사람들은 예수님의 입으로 나온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겼다고 한다.(4장22절) ‘놀랍게’ ‘기이하게’라고 번역된 ‘다우마조’라는 헬라어 단어는 ‘이상하게 여기다’는 뜻도 있다.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상하게 여긴 이유는 바로 다음 대목에서 파악된다. 그들은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고 입을 모아 말했다. 자신들과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고, 부모형제까지 모두 잘 알고 있는 이웃 청년이 느닷없이 메시야를 자청하고 나섰으니, 황당할 만도 하다. 

 

여기서 예수님과 나사렛 사람들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조성된다. 23절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고 직격하셨다. 예수를 돌팔이 의사쯤으로 취급하면서, 다른 동네에서 했던 것처럼 큰 기적이나 한번 베풀어 보라고 조롱하려는 나사렛 사람들의 마음을 면전에서 들추어 내신 것이다. 

그리고는 엘리야 시대의 과부와 엘리사 때의 나병환자 나아만 장군을 언급했다. 구원의 은혜는 혈통이 아니라 오로지 선택을 받은 자들에게 임했다는 말씀이다. 나사렛 사람들에게 이 얘기는 그들이 구원 밖에 있는 저주 받은 백성이라는 말로 들렸을 것이다. 

이에 나사렛 사람들은 격분했고, 예수님을 동네 밖으로 쫓아내 낭떠러지로 끌고가 밀어버리려 했다. 

그러나 저자 누가는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30절)고 기록했다. 나사렛 사람들이 알고 있다고 생각한 예수는, 그 예수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 에피소드는 요한복음 9장의 이야기를 생각나게 한다. 모세의 제자를 자처하며, 세상 진리를 통달한 것처럼 떠들어대던 바리새인들이 실제로는 눈 먼 자들로 들통난 사건이다. 나사렛 사람들 역시 예수를 보았고, 안다고 생각했지만, 진리에 대한 눈은 멀어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귀와 육체를 가진 인간이 우글거리는 이 세상은 ‘앎’을 둘러싼 대립의 현장이다. 사람들은 모두들 스스로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붙잡고 살아가고, 그것을 토대로 모든 것을 판단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다른 이야기를 하면 그를 ‘틀린 사람’으로 단정해 버린다. ‘선악과’가 낳은 고질 증상이다. 

그러나 눈치가 있다면 곧장 그런 ‘앎’이 의미 없음을 알아차린다. 세상에서 쌓은 지식은 새로운 것이 나오면 ‘다른 것’이 아니라 ‘틀린 것’으로 판명된다. 사람들이 알고 있다고 거품을 물지만 실제로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앎’의 출발점이다. 진짜 가치 있는 ‘앎’이란, 생명을 살리는 ‘앎’이란 인간에게서 비롯되지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다. 

사람 속에 들어가 있던 귀신을 향해 예수께서는 “나오라”고 명령하셨다. 나사렛 사람들의 속마음을 예수께서는 이미 꿰뚫고 계셨다. 

 

다시, 나사렛 회당으로 돌아가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보면, 눈 먼 자, 포로된 자,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겠다고 하신다. 그 일은 창세 전에 계획하신 십자가에서 일어났다. 그분께서 “다 이루었다”고 십자가에서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로마서 8장29~3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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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18
허망한 경계 짓기

 

 

필자가 살고 있는 토론토 서쪽 동네를 걷다 보면 스포르팅이나 포르투 등 포르투갈의 유명 축구클럽 간판이 보인다. 아마 팬클럽일 게다. 이들 프로축구팀은 벤피카와 함께 포르투갈 리그를 대표하는 3대 명문클럽이다. 이민생활을 하면서도 고국의 팀을 응원하기 위해 서포터들이 한 자리에 모일 공간까지 만들었다는 데서 그들의 열정을 읽을 수 있다.

지난 7월1일 오후에는 포르투갈 축구팬들이 몰려나와 그 동네 주요도로가 마비됐다. 포르투갈 국기와 축구대표팀을 상징하는 깃발을 흔드는 주민들이 차량 퍼레이드를 한 것이다. 쉴 새 없이 경적을 울렸고, 깃발을 펄럭이며 괴성을 지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날은 EURO2024 16강전 포르투갈 대 슬로베니아의 경기가 열린 날이었다. 포르투갈은 승부차기 끝에 간신히 8강에 진출했다. 그 기쁨을, 그렇게 강렬하게 표현했던 것이다. 경기가 끝난 뒤에도 2시간 넘게 길거리를 점령하고 난리를 치는 사람들을 보면서 ‘유로 8강 진출이 그렇게 대단한 건가’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7월5일에는 프랑스와 포르투갈의 8강전 경기가 있었는데, 온 동네가 조용했다. 경기중계를 보지 않고도 포르투갈이 패하며 프랑스가 준결승에 진출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단순히 축구가 좋아서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이런 현상은 인간의 마음 속에 들어 있는 국가와 민족, 뿌리에 대한 자부심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소속감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국가공동체의 성취를 자신의 자부심으로 챙기려는 마음이다. 최근 벌어진 한국축구대표팀 감독 선임을 둘러싼 논란도 결국은 이런 메커니즘이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항상 승승장구하기를 바라는 축구대표팀이, 감독 선임조차도 투명한 절차대로 못해 엉망진창이 된 것을 보면서 화를 참지 못하는 것이다. 스포츠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뭉치게 하는 데는 경계와 소속감만큼 강력한 매개도 없다.

 

구약성경 에스라 3장에는 바벨론에서 70년 포로생활을 하다 유대 땅으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 이야기가 나온다.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고, 성전 건축을 시작한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여호와 하나님과의 언약을 버리고, 우상숭배에 몰두하던 이스라엘 백성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모두 차례로 멸망했다. 그들은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다 여호와의 능력으로 모세와 여호수아에 이끌려 가나안에 들어갔지만 이내 죄의 길로 빠져들었다. 결국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 속에 모두 패망하고 말았다.

그러나 성경의 모든 역사가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를 향해 달려가듯, 그들의 70년 포로생활도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이미 예언됐던 바이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예레미야 29장10절).

그리고 그의 예언은 실제로 성취됐다.

“바사와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으니”(에스라 1장1~2절).

 

유대 땅으로 돌아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7개월 만에 예루살렘에 모였다. 율법에 기록된 대로 제단을 만들고 번제를 드리기 위해서다. 그리고는 초막절 등 절기를 지키기 시작했다. 2년2개월 후에는 성전 건축도 시작했다.

제사와 성전은 당시 이스라엘을 다른 민족과 구별 짓고, 한 데 묶는 매개체였다. 여호와의 택하신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확인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었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고, 성전을 건축하는 일은 그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성전 건축을 시작하는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함께 큰 소리로 즐거이 찬양했다. 그리고 눈길을 끄는 것은 3장 12~13절이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나이 많은 족장들은 첫 성문을 보았으므로 이제 이 성전의 기초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하였으나 여러 사람은 기쁨으로 크게 함성을 지르니 백성이 크게 외치는 소리가 멀리 들리므로 즐거이 부르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를 백성들이 분간하지 못하였더라.”

바벨론 군대가 무너뜨리기 전 화려했던 성전을 기억하는 나이 많은 사람들은 새로 짓는 초라한 성전의 기초를 보고 통곡을 했다. 그러나 오매불망 포로생활에서 벗어나 귀환을 기다리며, 성전을 사모했던 다른 사람들은 드디어 성전건축을 시작한다는 기쁨에 함성을 질렀다.

그럼에도 이들의 환희에 찬 통곡과 절규하듯 쏟아낸 함성은 오래 가지 못했다. 포로 귀환 이후에도 이스라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또 다시 우상숭배를 업으로 삼았다.

 

사람들은 민족, 공동체에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 심지어 그것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기도 한다. 그런 행위는 가장 숭고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런데, 그런 애국이 존경을 받는 이유는 다른 민족이나 공동체의 침략이나 공격이 있었음을 전제로 한다. 예수께서도 마태복음 24장에서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라고 말씀하셨다. 그런 일은 실제로 수없이, 이 시간에도 일어나고 있다.

그러니 인간들의 공동체 사랑은 자신들 만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이기심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은 상대방과 구별 짓기의 현장이 된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들끼리 하는 국가와 민족이라는 테두리 만들기를 철저히 무시한다. 바벨론에서 돌아와 성전을 건축하고, 제사를 다시 드리기 시작한 행위가 이스라엘을 온전히 구원하지 못한 것도 같은 이유다. 그것 자체에 인간을 구원할 힘이 없다.

 

“그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니”(마태 24장9절).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을 미워하고, 환난에 넘겨 주고, 심지어 죽이는 일에는 ‘모든 민족’이 하나가 된다. 

또한 예수께서도 민족과 나라를 한 덩어리로 취급하신다.

“인자가 가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하여”(마태 25장31~32절).

그리고는 갑자기 새로운 구분 짓기의 경계를 설정하신다. 그리스도 앞에 모인 모든 민족을 흔들어 섞은 다음에 양과 염소로 나누신 것이다. 인간들의 행위나 혈통이 아닌 그리스도, 그분이 경계를 설정하는데 직접 뛰어드신 것이다.

“그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 받으라”(34절).

 

사도 바울은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안에서’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라는 단어로 반복해서 표현했다.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이요…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사함을 얻었도다”(골로새서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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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11
찌질한 선지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다. 인간의 자기 존재 증명을 향한 욕구를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문장이다. 정치권력이든, 재력이든, 종교적 권위든, 명예욕이든 사람들은 자기를 증명하기 위해 평생 애를 쓴다. 시기와 경쟁이 여기에서 촉발된다. 심지어 교회 일각에서도 ‘고지론’이라는 이름으로, 원대한 목표를 가지라고 젊은이들을 부추긴다. 물론 ‘세상의 왕’으로 살고 싶은 음흉한 욕심은 쏙 뺀다. 대신 ‘하나님께 영광 돌리자’고 슬며시 포장한다. 실상 사람들이 성경을 싫어하고, 예수를 욕하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여기에 있다.

성경은 인간 군상을 ‘아담의 후손’ 즉, ‘죄인’으로 단죄하면서 출발한다. 창세기 초반부터 인간의 마음이 ‘태어나면서부터 악하다’고 선언해 버린다. 결국에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쐐기를 박고, 계시록에 가서는 인간들이 자기존재 증명으로 힘껏 쌓아 올린 문명, 바벨론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 당하는 것으로 결말이 난다.

 

 

구약성경 열왕기상 19장 초반에는 꽤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가 나온다. 기세 등등한 이세벨과 잔뜩 겁을 먹은 여호와의 선지자 엘리야이다. 고대 북이스라엘 아합 임금의 아내였던 이세벨은 엘리야에게 사신을 보내 ‘내일 이맘때까지 너를 반드시 죽이겠다’고 협박한다. 만약 죽이지 못하면 자신이 신들로부터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이 소식을 들은 엘리야는 겁을 집어먹고 남유다로 도망을 갔다. 광야로 들어가 로뎀나무 아래에서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하고 기도한다. ‘차라리 나를 죽이시오’라는 뜻이다.

 

이런 이야기가 황당한 것은 앞선 18장의 갈멜산 에피소드 때문이다.

아합왕과 이세벨 당시 북이스라엘은 우상숭배에 푹 절어 있었다. 갈멜산에서는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던 선지자 850명과,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엘리야가 대결을 펼쳤다. 송아지를 잡아 각을 뜨고, 각자 신의 이름을 불러 어느 제단에 불이 내리는지 백성들 앞에서 증명해 보이자는 것이었다.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던 선지자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미친 듯이 소리를 치고, 심지어 칼과 창으로 자신들의 몸을 상하고, 피를 흘리면서 신의 이름을 죽자고 불렀다. 하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반면 엘리야는 양동이에 물을 길어 번제물과 제단 주변에 세 번이나 부었다. 제단 주변이 흠뻑 젖은 것을 확인한 뒤 기도했다. 순식간에 하늘에서 불이 내려 모든 것을 태워버렸다. 엘리야는 그 장면을 목격한 백성들과 함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근처 시냇가로 끌고가 모조리 죽여버렸다.

엘리야는 거짓선지자를 모조리 처단하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 만이 살아 계신 분이라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증명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것처럼 이 일 후에 오히려 길길이 날뛴 것은 이세벨이었고, 엘리야는 도망자 신세가 됐다.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늘에서 불이 내렸다는 것을 알고도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세벨을 향해 ‘너는 정말 답이 없구나’ 하고 지적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엘리야에게 ‘이런 찌질하고 못난 놈’이라고 꿀밤을 쥐어박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것은 눈앞에서 펼쳐진 기상천외한 기적의 장면을 목격했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결코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인간의 본질이 바뀌지 않는다는 데 있다.

요한복음 9장에는 태어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을 예수께서 고친 이야기가 나온다. 하필 그날은 안식일이었는데, 예수께서는 땅에 침을 뱉고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셨다. 그리고는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다. 실제로 가서 씻었더니 눈이 떠졌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이 사건 자체를 있는 그대로 믿지 않았다. 그러면서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또한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고 말했다.

 

그러나 고침을 받은 맹인은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고 대답했다.

그때 바리새인들은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맹인을 쫓아버렸다.

 

사도 요한은 이런 내러티브를 소개하며, 진짜 눈이 먼 사람은 누구인지 말하고 있다. 모세, 즉 율법의 제자임을 자처하며 맹인을 ‘죄 가운데 태어난 놈’이라고 몰아세우는 바리새인들이 실제로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는, 눈이 먼 자들이었다는 것이다. 반대로 육신의 눈은 멀어 있었지만 고침을 받은 맹인은 예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오셨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예수께서 결론을 말씀 하셨다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9장41절)고 하셨다.

이름을 남기고, 자신을 세상의 왕으로 세워 존재를 증명하고자 분투하는 사람들을 향해, 예수께서는 심판 이야기를 꺼내신다. 심판의 내용은 어떤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어떤 사람들은 맹인이 되게 하는 것이다. 심판이 선포될 때 바리새인들은 ‘감히 우리를 맹인 취급하냐’고 대들었다. 그래서 그들은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했다.

 

이세벨을 피해 광야로 달아난 엘리야는 로뎀나무 아래에서 잠이 들었다. 여호와께서 천사를 보내 먹을 떡과 마실 물을 공급하셨다. 힘을 얻은 엘리야는 하나님의 산 호렙까지 40일을 걸어갔다. 그곳에서 엘리야는 이스라엘 왕을 세우고, 선지자 엘리사를 세우라는 말씀을 듣는다. “선지자들이 다 죽고 나만 남았다”고 불평하는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는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아닌한 자 칠천 명이 있다”고 하신다.

인간 내면에 가라앉아 있는 자기 증명을 향한 탐욕과 찌질함의 바닥까지 긁어 내시는 분, 세상에서 가장 괄시 받는 존재로 살게 하시는 분, 그럼에도 그들을 끝까지 찾아가 건져내시는 열심, 이것이 택한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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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4
사건의 소용돌이 속에서

 

삶이란 사건의 연속이다. 집에서, 직장에서, 학업의 현장에서, 교회를 포함해 각자 소속돼 있는 단체에서도 마찬가지다. 인간관계를 비롯해 휘몰아치는 사건 속에서 표류하다 보면 어느새 세월은 저만치 흘러가 있다.

성경 안에도 사건이 늘 소용돌이를 일으킨다. 사건의 무게는 눈덩이처럼 커지고, 혼란은 점점 극단을 향해 치닫는다. 그 안에서 행간을 읽다 보면 수천 년 전이나 오늘날이나 인생사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성경 안에서 행동강령이나 삶의 지침을 배우려 하는 시도는 무의미하다. 뭔가 지혜를 찾아냈다고 한들, 그걸 완벽하게 실행에 옮길 능력이 사람에게는 없다. 이미 인간의 실패를 전제로 성경의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이다. 

 

여로보암(22년)-나답(2년)-바아사(24년)-엘라(2년)-시므리(7일)-오므리(12년)-아합(22년).

구약성경 열왕기상 15~16장에 등장하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들이다.

어떤 사람이 BC 910년대 어간에 북이스라엘에서 태어나 60년쯤 살았다고 가정하면, 초대 왕 여로보암 말기에서 아합왕 시대까지 7명의 임금을 경험한 것이 된다. 쿠데타를 일으켜 고작 7일 만에 폐위된 왕도 있고, 2~22년 재임 기간 내내 죄를 저지른 임금도 있다. 이 기간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사이에는 죽고 죽이는 전쟁이 끊임없이 벌어졌다.

특히 여로보암에게는 살아 있을 때부터 저주가 선포돼 있었다. “여로보암은 자기도 죄를 지었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까지 죄를 짓게 하였으므로, 주님께서는 여로보암의 죄 때문에 이스라엘을 버리실 것입니다.”(왕상 14장 16절(이하 새번역). 똑 같은 구절이 15장30절에도 반복된다.

 

저주의 내용도 섬뜩하다. “내가 여로보암의 가문에 재난을 내리겠다. 여로보암 가문에 속한 남자는, 종이거나 자유인이거나 가리지 않고, 이스라엘 가운데서 모두 끊어 버리겠다. 마치 사람이 쓰레기를 깨끗이 쓸어 버리듯이, 여로보암 가문에 사람을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다 쓸어 버리겠다.”(왕상 14장10절)

 

그런데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도 똑같이 죄의 길로 걸었다. “그는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일을 하였다. 그도 그의 부친이 걷던 그 악한 길을 그대로 걸었으며, 또 이스라엘에게 죄를 짓게 하는 그 잘못을 그대로 따랐다.”(15장26절)

 

바아사가 반란을 일으키고 북 이스라엘 첫 왕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을 죽였다. “잇사갈 가문의 아히야의 아들인 바아사가 그에게 반기를 들고 일어났다. 나답과 모든 이스라엘이 깁브돈을 포위하였으므로, 바아사는 블레셋의 영토인 깁브돈에서 나답을 쳤다.”(15장27절)

 

그렇다고 바아사의 삶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일을 하였고, 여로보암이 걸은 길을 그대로 걸었으며, 이스라엘에게 죄를 짓게 하는 그 죄도 그대로 따라 지었다.” 그에게도 저주가 선포되는데 “바아사에게 속한 사람으로서, 성 안에서 죽는 사람은 개들이 먹어 치울 것이고, 성 바깥의 들에서 죽는 사람은 하늘의 새들이 쪼아 먹을 것이다."(16장 4절)

그 이유도 설명되는데, “바아사가 여로보암의 가문처럼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일을 하므로, 주님의 노를 격동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로보암의 가문을 치기까지 했기 때문이다.”(16장 7절)

 

바아사의 아들 엘라는 신하의 집에서 술에 취해 있다가 호위부대를 지휘하던 장군 시므리에게 시해됐다.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바아사와 그의 아들 엘라가 지은 모든 죄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만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우상을 만들어서 이스라엘에게 죄를 짓게 하였으므로,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의 분노를 샀다.(16장13절)

당시 이스라엘 군대는 블레셋과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러자 군인들은 그들을 지휘하던 사령관 오므리를 왕으로 추대했다. 회군한 오므리의 군대가 몰려오자 시므리는 왕궁으로 도망을 갔다가, 불을 지르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정권을 잡은 오므리는 사마리아 산지를 사들여 도성을 건설했다.

“오므리가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일을 하였는데, 그 일의 악한 정도는 그의 이전에 있던 왕들보다 더 심하였다. 그는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걸은 모든 길을 그대로 따랐다. 오므리는 이스라엘에게 죄를 짓게 하고, 또 우상을 만들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게 하였다.”(16장25~26절)

오므리가 죽고 그 아들 아합이 왕위에 올랐는데, “이전에 있던 왕들보다 더 심하게,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일을 하였다.” “그는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가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더 앞질렀다. 그는 시돈 왕 엣바알의 딸인 이세벨을 아내로 삼았으며, 더 나아가서 바알을 섬기고 예배하였다.”(30~31절)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과 바아사 시대에는 여로보암의 죄를 ‘그대로’ 했다고 성경이 기록한다. 세월이 흘러 오므리 시대에는 ‘악한 정도가 이전 왕들보다 심했다’고 한다. 아합은 ‘여로보암의 죄를 앞질렀다’고 구약성경 열왕기상에서 썼다.

 

여호와께서 지속적으로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을 지키고, 율법에 순종하라고 하셨다. 그러나 여로보암 이후로 모든 이들이 지속적으로 말씀을 어겼고, 우상을 숭배했다. 선지자들의 저주가 눈앞에서 성취되고, 실제로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 불행이 그대로 닥치는 데도 그들에게는 말씀에 순종할 능력도, 우상에서 떠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오히려 여호와께 반역의 강도를 더 높여갔다. 

 

지금부터 약 3천년 전의 역사라고 치부하면 곤란하다. 지금도 죄의 역사는 되풀이된다. 권력과 재물에 대한 욕심은 어느 시대나 똑같다.

이스라엘 정치, 왕들의 족보일 뿐이라고 오해해도 안 된다. 오늘날 교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도 ‘복에 환장한’ 우상숭배는 벌어질 수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역사를 주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인간들 역시도, 3천년 전이나 현대나 그저 육체의 소욕을 추구하는 데만 혈안이 돼 있다.

 

그런데 이런 현실을 눈을 지긋이 감고 바라보는 이가 있다. 감옥에 갇힌 사도 바울이다. 당시 교회 안에서 조차 바울을 향해 시기와 질투를 느끼는 사람들이 있었다. 심지어 그들은 감옥에 있는 바울을 더 괴롭게 만들기 위해 복음을 전했다.

이에 대한 바울의 생각은 심플했다.

“그렇지만 어떻습니까? 거짓된 마음으로 하든지 참된 마음으로 하든지, 어떤 식으로 하든지 결국 그리스도가 전해지는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기뻐합니다.”(빌립보서1장18절)

그의 관심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뿐이었다. 그를 경쟁 상대로 여기는 교회 사람들에게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한 발 더 나아가 그는 “살든지 죽든지, 전과 같이 지금도, 내 몸에서 그리스도께서 존귀함을 받으시리라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20~21절)라고 고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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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0
당연한 권리

 

2010년 류승완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던 영화 ‘부당거래’는 한국사회의 어두운 부조리를 조명했던 작품이다. 배우 류승범이 검사 역할을, 황정민은 경찰, 유해진이 건설업자로 등장한다.

검경이 연쇄살인 사건을 수사하며, 범인을 조작하려 하는 등 현실 못지 않은 시나리오가 긴장을 더 한다. 출세에 눈이 먼 경찰과 검찰의 갈등이 이야기의 큰 틀을 이루며, 양아치 같은 검사 류승범은 “대한민국 일개 검사가 경찰을 불쾌하게 하면 안 되지”,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알아요” 등의 명대사를 남겼다.

검사가 주인인 세상, 검찰이 국민들의 생사여탈권을 쥔 존재로 군림하는 세상이다. 검찰이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범죄자로 만들 수 있고, 마음만 먹으면 범죄 혐의가 아무리 뚜렷해도 기소하지 않을 수 있는 권력을 독점하고 있으니, 이런 병폐가 나오는 게 어쩌면 자연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공권력을 사유화 하며, 그것을 권리라고 착각하는 일이 빈번해지면 결말은 뻔하다.

 

여호와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으로, 엄청난 은혜를 입었지만 그것을 당연한 권리라고 착각한 민족이 이스라엘이다.

“너는 말하기를 나는 무죄하니 그의 진노가 참으로 내게서 떠났다 하거니와 보라 네 말이 나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다 하였으므로 내가 너를 심판하리라.” 구약성경 예레미야 2장 35절의 이야기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를 향해 “나는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악을 썼다. 그러자 여호와께서는 “너희들이 무죄하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심판할 것”이라고 경고하신다.

그리고는 그들이 저지른 잘못을 조목조목 지적하신다.

앞서 13절에서는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라고 하셨다. 존재의 근원인 여호와 하나님은 잊어버린 채 스스로 뭔가를 하겠다고 나선 것 자체가 죄의 본질이라는 설명이다.

 

하지만 이것은 예레미야 당시의 이스라엘 족속만이 갖고 있던 문제가 아니다.

“너희 조상들이 내게서 무슨 불의함을 보았기에 나를 멀리 하고 가서 헛된 것을 따라 헛되이 행하였느냐 그들이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 곧 사막과 구덩이 땅, 건조하고 사망의 그늘진 땅, 사람이 그 곳으로 다니지 아니하고 그 곳에 사람이 거주하지 아니하는 땅을 우리가 통과하게 하시던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하고 말하지 아니하였도다”(5~6절)

이집트를 탈출해 광야를 통과하던 당시에도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찾지 않았다. 스스로의 방식으로 살아갈 궁리만 했을 뿐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과 은혜에는 무관심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공의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너는 광야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격노하게 하던 일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부터 이 곳에 이르기까지 늘 여호와를 거역하였으되”(신명기 9장 6~7절)

그들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간 것은 훌륭한 자격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은 태생 자체가 ‘목이 곧은 백성’ 곧 뱀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늘 여호와 하나님을 격노케 하고, 그분을 항상 거역했다.

 

생수의 근원이 되는 여호와를 버리고, 터진 웅덩이만 찾는 어리석은 행태는 예레미야 이후 이스라엘 자손들도 계속 반복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 대대로 계속 싸우겠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다시 싸우고 너희 자손들과도 싸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9절)

그런데 이것은 예레미야 뿐만 아니라 훨씬 앞서 모세에게도 하셨던 말씀이다.

신명기 31장16절에서 “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조상과 함께 누우려니와 이 백성은 그 땅으로 들어가 음란히 그 땅의 이방 신들을 따르며 일어날 것이요 나를 버리고 내가 그들과 맺은 언약을 어길 것이라”고 기록한다.

이어 20절에는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인 후에 그들이 먹어 배부르고 살찌면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나를 멸시하여 내 언약을 어기리니”라고 하셨다.

이스라엘은 수많은 언약과 복을 받았지만 그것이 당연한 권리라고 착각했다. 여호와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었다.

 

예레미야 2장에서 이스라엘을 향한 여호와 하나님의 분노를 읽을 수 있다. “너희는 사내를 홀리는 데 능숙하여 매춘부조차 너희에게서 배우게 되었구나(33절, 공동번역)”와 같은 구절도 등장한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에 따라 저주를 당하고 돌에 맞아 죽어야 마땅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두 가지 죄악을 지적하셨으나, 그 근원은 선악과에 닿는다. 선과 악을 스스로 판단하는 것, 생각의 주체로 서는 것, 그것을 질책하시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사실 모든 인간은 막다른 골목에 몰려 있다. 어느 인간도 선악과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선악과 안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스스로 모든 세상 일에 자신이 가진 선악지식으로 판단을 내린다.

이스라엘도 그랬다. 여호와께서 꾸짖는 내용이 이렇다. “왜 이 꼴이 되었는지 알고 있느냐? 너희를 이끌어주던 야훼 너희 하느님을 저버리고서야 어찌 이 꼴이 되지 않겠느냐? 그런데 이제 너희가 나일 강 물을 마시러 이집트로 가다니 웬 말이며, 유프라테스 강 물을 마시러 아시리아로 가다니 웬 말이냐?”(공동번역, 예레미야 2장 18절)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만 의지하지 않고, 세상의 강대국, 힘 있는 자들을 의지한 것을 질책하신다. 이것을 예레미야서는 부정한 짓을 한 여인처럼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인간도 보이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면서, 보이는 힘의 세상을 무시하며 살기는 불가능하다.

 

이런 이야기는 구약성경의 마지막인 말라기에도 반복해서 등장한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1장2절)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말라기 1장6절)

 

어디를 둘러봐도 도무지 답이 없을 것 같은 인간들이다. 이러니 여호와께서는 탄식하신다.

“나는 너를 종자가 아주 좋은 제일 좋은 포도나무로 심었는데, 어떻게 하여 네가 엉뚱하게 들포도나무로 바뀌었느냐?”(예레미야 2장21절, 새번역)

그러나 하나님은 마냥 분노하고 탄식만 하시는 분은 아니다. 그분은 전지전능하신 분이다. 모든 일을 창세 전에 마음 먹으신 대로, 언약대로 반드시 이뤄 내시는 분이다.

여호와께서 심은 좋은 포도나무가 들포도나무로 바뀌었다 해도 해결책은 오직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그리스도 예수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한복음 15장1~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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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13
사자에게 물려 죽은 ‘하나님의 사람’

 

교회 안에 발을 디디고 살아온 게 벌써 40년을 넘었다. 돌아보면 수많은 설교를 듣고, 또 적지 않은 기독교 관련 책을 읽었다. 한때 명성을 떨치던 목사나 선교사, 저술가, 부흥사 가운데 나락으로 떨어진 사람도 있었고, 여전히 기독교 안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분들도 많다. 과거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던 설교나 읽었던 책 가운데 지금에서는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는 게 사실이다. 아마 20~30년 후에 2024년을 돌아볼 기회가 있다면 똑같이 고백할 것이다.

 

구약성경 열왕기상 13장에 두 사람이 등장한다. 한 사람은 남유다 왕국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불렸다. 다른 한 인물은 여로보암이 통치하던 북이스라엘에서 선지자로 살았다.

‘하나님의 사람’은 북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이 패역한 짓을 일삼자 여호와의 말씀을 전달할 임무를 띠고 유다를 떠나 이스라엘로 갔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벧엘에서 분향하고 있던 여로보암을 향해 여호와의 저주를 쏟아냈다.

“하나님의 사람이 제단을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으로 외쳐 이르되 제단아 제단아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그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네 위에서 제물로 바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서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하고 그 날에 그가 징조를 들어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징조라 제단이 갈라지며 그 위에 있는 재가 쏟아지리라 하매”(열왕기상 13장 2~3절)

여호와의 말씀대로 제단이 갈라지고, 재가 쏟아져 내렸다.

이때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피로를 풀 겸 같이 쉬자고 하며, 선물도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거절하고, “떡도 먹지 말며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되돌아가지 말라”던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했다.

 

이 소식이 벧엘의 늙은 예언자에게 전해졌다. 그는 곧장 나귀를 타고 ‘하나님의 사람’을 쫓아갔다. 그리고는 상수리나무 근처에서 만나 “나와 함께 집으로 가서 떡을 먹자”고 말했다. 하나님의 사람이 거절하자, 늙은 선지자는 거짓으로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그를 네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게 하라 하였느니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사람’은 거짓말에 속아 넘어갔고, 늙은 선지자를 따라 집으로 가서는 떡을 먹고 물을 마셨다.

 

그러자 이번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거짓말을 했던 늙은 예언자에게 임했고, ‘하나님의 사람’에게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어기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고 돌아와서 여호와가 너더러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 하신 곳에서 떡을 먹고 물을 마셨으니 네 시체가 네 조상들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하리라”(왕상 13장 21~22절)고 하셨다.

늙은 예언자는 ‘하나님의 사람’이 떡을 먹고, 물을 마시고 나자 나귀 등에 안장을 얹어주었다. ‘하나님의 사람’은 돌아가는 길에 사자에게 물려 죽었다. 늙은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람의 시체를 나귀에 싣고 돌아와 자기 성읍에서 슬피 울며 장사를 지냈고, 그의 시체를 자기의 묘실에 두고 “오호라 내 형제여” 하며 슬피 울었다.

 

이 에피소드는 맥락을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중구난방처럼 보인다. 여로보암왕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던 ‘하나님의 사람’이 늙은 선지자의 거짓말에 넘어간 것이나,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했던 그를 하나님께서는 거짓말에 속지 않게 보호해 주시지도 않았다. 또한 거짓으로 ‘하나님의 사람’을 속였던 늙은 선지자의 입을 빌려 여호와의 말씀이 떨어지기도 한다.

 

이야기를 다시 살펴보면 우상숭배에 혈안이 된 여로보암에게 ‘하나님의 사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전달한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그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네 위에서 제물로 바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서 사르리라 하셨느니라”(왕상 13장 2절)

뜬금없는 이름, ‘요시야’가 예언에 등장하는데, 그는 남유다의 16대 왕으로, 기원전 640~609년 사이에 활동했다. 여로보암이나 ‘하나님의 사람’ 보다 대략 300년 후대의 인물이다.

요시야왕의 역사는 구약성경 열왕기하 22장부터 기록돼 있다. 그는 율법책을 발견하고, 유월절을 지키며 각종 우상을 섬기던 제단을 혁파했다. 그에 대한 평가는 열왕기하 23장 24~25절에 나온다. “요시야가 또 유다 땅과 예루살렘에 보이는 신접한 자와 점쟁이와 드라빔과 우상과 모든 가증한 것을 다 제거하였으니 이는 대제사장 힐기야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발견한 책에 기록된 율법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고 기록한다.

 

특히 열왕기상 13장의 내용이 열왕기하 23장 15~16절에서 그대로 성취된다.

“또한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벧엘에 세운 제단과 산당을 왕이 헐고 또 그 산당을 불사르고 빻아서 가루를 만들며 또 아세라 목상을 불살랐더라.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산에 있는 무덤들을 보고 보내어 그 무덤에서 해골을 가져다가 제단 위에서 불살라 그 제단을 더럽게 하니라. 이 일을 ‘하나님의 사람’이 전하였더니 그 전한 여호와의 말씀대로 되었더라.”

이어 17~18절에는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무덤 이야기도 언급된다. 요시야는 우상을 섬기던 산당의 제사장을 죽이고 무덤까지 파헤쳤으나 ‘하나님의 사람’과 사마리아의 늙은 선지자의 무덤은 그대로 두도록 했던 것이다.

 

그러나 요시야의 최후도 비극이다. 그는 애굽왕과 전쟁을 하다 전사했다. 더구나 율법을 지키려 한 요시야와의 몸부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는 계속됐다.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하여 내리신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셨으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이스라엘을 물리친 것 같이 유다도 내 앞에서 물리치며 내가 택한 이 성 예루살렘과 내 이름을 거기에 두리라 한 이 성전을 버리리라 하셨더라”(왕하 23장 26~27절)

 

여호와의 말씀을 선포하고, 예언도 했고, 신비한 일도 일으켰지만 사자에게 찢겨 죽은 ‘하나님의 사람’. 우상을 부수고, 율법을 회복시켰지만 전쟁에서 전사한 요시야. 거짓말도 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외쳤던 늙은 선지자.

그들의 삶은 무의미하고, 삭제 당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들은 있는 힘을 다해 여호와의 손길에 이끌려 다녔으며, 인간의 불가능을 온 몸으로 표현하는데 차용했다.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은혜를 증거하는데 동원됐던 것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로마서 8장2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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