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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돈-비극의 화가 이중섭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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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이중섭과 ‘황소’

 

 화가 이중섭(1916년~56년)을 생각하면 한 장의 사진이 떠오른다. 담배에 불을 붙이는 모습이다. 그의 얼굴에선 짙은 우수(憂愁)와 고독이 묻어 나온다. 소와 어린이들을 주로 그린 그의 화풍은 도도하고 천진하다. 하지만 그는 평생 가난과 고독과 절망과 술에 시달렸다.

 

 세인들은 그를 빈센트 반 고흐에 비교한다. 고흐처럼 너무 외로웠고, 가난했고, 애절하게 죽었다. 똑같이 정신병을 앓았고, 고통 속에서도 초인적 열정으로 수많은 명작을 남겼다. 이중섭의 그림엔 딱지가 숱하게 붙었으나 돈은 주머니로 들어오지 않았다. 주변사람들이 그림값을 떼먹었다.

 

0…천재 예술가 이중섭을 생각하며 이런 상상을 해본다. 그가 만약 속세와 돈맛을 알아 그 엄청난 그림값을 제대로 챙겼더라면, 자기관리에 좀더 신경써 오래 살았더라면, 시대를 제대로 만나 정상적인 작품활동을 할 수 있었더라면, 한국 예술사도 바뀌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중섭은 그 반대의 길을 걸음으로써 40년의 짧은 생은 후세에 더 큰 여운을 남겼다. 그는 시대를 잘못 만나(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모든 것이 뒤틀렸고, 자기관리에 소홀했으며 돈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는 그림밖에 몰랐다.        

 

0…이중섭(李仲燮)은 평안남도 평원의 부유한 지주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였다. 외탁(外託)으로 자라 내성적인 중섭은 학과 공부보다 그림에 더 매달렸고 민족성이 강한 오산학교에 입학, 미술교사 임용련을 만나면서부터 인생이 독특하게 전개된다.

 

 미 예일대 출신으로 파리에서 활동했던 임용련은 습작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중섭은 이에 영향을 받아 습작을 많이 했다. 그가 다수의 드로잉을 남긴 것도 이때문이다. 중섭의 본격적인 미술공부는 일본 유학으로 시작됐고 이곳에서 훗날 부인이 될 야마모토 마사코(한국명 이남덕)를 만난다.

 

 2차 대전 막바지인 1944년 중섭은 원산으로 돌아와 해방되던 해 마사코와 혼례를 올리고 가정을 꾸렸다. 이듬해 첫아이가 태어났지만 곧 디프테리아로 잃고 말았다. 중섭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이는 어쩌면 40년 가시밭길 생의 서막이었는지 모른다.

 

0…6.25가 발발하면서 중섭은 한국사의 소용돌이 속에 전국을 떠돌아다니는 생활로 빠져든다. 부산으로 피난갔다 다시 제주도로 가면서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던 아내와 두 아들은 일본으로 떠난다. 중섭은 도쿄에서 단 5일의 해후를 끝으로 가족과 영영 이별한다. 이런 생이별의 아픔은 아이러니하게도 중섭 필생의 걸작을 남기는 계기가 된다.

 

 지인들 도움으로 경남 통영에 머물던 그는 소 연작 등 대표작을 쏟아냈다. 이후 진주, 대구, 서울 명동 등지를 전전하며 창작에 몰두했으나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술로 달래던 중섭은 심신이 만신창이가 돼갔다.

 

0…이중섭 작품의 주요 소재는 소, 어린이, 가족, 물고기, 게, 달과 새 등 한국의 전통적인 것들이다. 이는 민족성이 강했던 오산학교 시절 교육의 영향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무래도 중섭을 대표하는 소재는 '소'다. 통영 시절 선보인 소 연작은 중섭 작품의 백미로 꼽힌다. 앞발에 힘을 모으고 언제든 튀어나갈 듯한 역동적인 소의 형상은 선묘력(線描力)의 압권이다. 유년시절 중섭은 들판의 소를 유심히 관찰하다 소 도둑으로 몰렸다는 일화도 있다.

 

 담배 은박지에 그린 작품들은 종이를 살 수 없을만큼 궁핍했던 경제적 고통을 말해준다. 그러나 중섭이 은박지를 비롯해 합판, 종이, 심지어 책의 속지에도 그림을 그렸다는 점, 그리고 유화물감을 비롯해 연필, 크레파스, 철필, 못, 손톱까지 다양한 표현 수단을 동원했다는 점에서 끊임없이 실험적인 작업을 추구했다고 볼 수 있다.

 

0…중섭은 죽기 한 해 전인 1955년 친지들 도움으로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인 전시회를 서울 미도파백화점에서 열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몰리고 여러 점의 그림에 딱지가 붙었다. 하지만 그림을 사기로 한 이들이 돈을 제대로 주지 않는 등 애를 먹여 손에 쥔 돈은 얼마 안 됐다.

 

 중섭은 애초에 돈에 관심이 없었다. 아니 어떻게 관리할 줄을 몰랐다. 그림을 판 돈이 생기면 친구들을 술집으로 불려내 실컷 퍼마시고 형편이 어려운 친구들 주머니에 돈을 찔러 주었다. 그래서 중섭의 주변에는 공술을 얻어마시려는 사람이 북적였다. 반면에 가족들은 쫄쫄 굶어 피골이 상접했다.  

 

 중섭은 결국 가족을 책임지지 못한 가장이라는 자괴감에 빠지고 그로 인해 거식증(拒食症)에 시달리며 정신병 증세까지 보였다. 청량리 등 정신병원을 전전하던 중섭은 1956년 40세의 나이에 홀로 세상을 떠났다. 친구들이 수소문해 찾아오니 시신과 밀린 병원비 청구서만이 수북했다.

 

0…중섭이 세상을 뜬 후 열린 유작전시회는 인산인해를 이룬다. 1986년 호암미술관에서 열린 30주기 회고전에는 10만여 관객이 몰렸다. 그림값도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최근 서울에선 이건희 컬렉션전이 열렸다. 고인이 평생 모은 2만 점이 넘는 세계적 명작들을 국가에 전격 기증한 데 따른 것이다. 이 중엔 이중섭의 소 그림도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과 관심을 갖고 지켜보았다.

 

 전시작들은 불후의 명품들이지만 이들을 사들이기 위해 거액의 비자금을 사용했다는 폭로와 의혹이 아직도 존재하는 와중이어서 묘한 느낌을 갖게 한다.

 

 돈에 관심이 없던 천재화가의 작품이 돈의 황제 손에 의해 빛을 발하는 시간들… 이중섭의 황소가 슬픈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듯하다.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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