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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워야 채워진다-때론 강제된 휴식도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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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티지 뜰에 꽂혀 있던 깃발

 

 지난 한 주 휴가를 맞아 가족들과 함께 이곳저곳 바람을 쐬며 꿀같은 휴식시간을 즐겼다. 처음 며칠은 알공퀸 주립공원 초입의 Cottage 마을인 헌츠빌의 강변 카티지를 빌려 묵으면서 트래킹도 하고 카약도 타면서 오붓한 시간을 가졌다.

 

 널찍한 잔디밭에서 함께 간 사돈댁과 보치볼(Bocce ball)을 하노라니 가족간 우애가 더욱 깊어지는 행복감을 느꼈다. 사돈어른이 건강이 안 좋아 거동이 불편하지만 가벼운 보치볼 정도는 즐기면서  재미있어 하는 모습을 보니 내 기분도 덩달아 좋아졌다.

 

 싱그런 나무 그늘 아래서 고기를 굽고 시원한 맥주를 마시는데, 카티지 앞마당에 펄럭이는 깃발이 눈에 띄었다. 야자수 해변에서 앵무새가 칵테일을 즐기는 그림 위에 ‘It's 5 o'clock Somewhere’ 라는 문구가 쓰여진 깃발이었다. 처음엔 무심코 지나쳤다가 자꾸만 눈에 들어오길래 아이들에게 저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더니 작은딸이 "아빠, 저거 흔히들 쓰는 건데 아직  모르셨어요?" 한다.

 

0…얘기인 즉 ‘지금 세계의 어딘가는 오후 다섯 시이니 이곳 시간에 구애받지 말고 술 한잔 하면서 휴식을 즐기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서구에선 보통 술을 반값에 마실 수 있는 해피아워를 5시에 시작하는데, 아무 때나 술 마실 일이 있으면 지구 어딘가는 5시가 되었으니 마시자는 뜻이다. 이는 특히 낮술을 좋아하는 나같은 사람에게 딱 맞는 말인 듯해서 기분이 더욱 느긋해졌다.

 

 이 말은 미국의 컨트리 가수 알랜 잭슨과 지미 버펫이 2003년에 부른 같은 제목의 노래가 크게 히트해 더욱 유명해졌다. 노래 가사는 짐 무스 브라운이 썼는데, 1년 내내 하루도 쉬지 못하고 죽도록 일만 하는 노동자가 단 하루라도 술 한잔 하면서 푹 쉬고 싶다고 고백하는 대목이 나온다. 지금이 비록 낮 12시 30분일지라도 지구촌 어딘가는 (퇴근시간인) 오후 5시일테니 무슨 상관인가(“It's only half-past twelve but I don't care. It's five o'clock somewhere”).

 

 그래서 사실 이 말은  노동자들의 애환이 담긴 서글픈 내용이기도 하다. 휴식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원하는 시간이며 내일을 위한 재충전의 소중한 기회이기 때문이다. 재충전 없이 소진(消盡)만 하면 발휘할 기력도 없어질 터이다. 무릇 머리도 시원하게 비워야 다시 신선한 에너지로 채워지는 법이다.     

 

0…연휴를 포함해 열흘 간의 휴가기간동안 나는 전화도, 이메일도, 텍스트도, 카톡도 모든 것에 일체 응답하지 않기로 작정했다. 이처럼 소중한 시간에까지 속세에 시달리고 싶지는 않았다. 사람들과, 사회와 접촉을 끊고 혼자 혹은 가족들하고만 시간을 보내니 마음이 그렇게 평화로웠다.

 

 휴가 막바지에 나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걸출한 통합적 지식인으로 추앙받는 다산 정약용 선생을 읽었다. 선생은 18년의 유배생활 동안 무려 500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서를 완성했다. 한국 지식사의 불가사의로 통하는 다산은 역사를 손금 보듯 꿰는 해박한 사학자, 목민관(牧民官)의 행동지침을 명쾌하게 정리해낸 행정가, 형법의 체계와 법률적용을 검토한 법학자요 ‘아방강역고’ 등을 펴낸 지리학자였다.

 

 수원 화성 축성을 설계한 뛰어난 건축가요, 기중기와 배다리(浮橋-부교), 유형거(遊衡車-수레)를 제작해낸 토목공학자이자 기계공학자였으며 ‘마과회통’ ‘촌병혹치’ 등 의서(醫書)를 펴낸 의학자인 동시에 독보적인 시인, 날카로운 비평가이기도 했다.

 

 사상 유례없이 폭넓은 분야에서 기적 같은 학문적 성취를 일궈낸 전방위적 지식인 다산 선생이 만약 유배생활이라는 강제된 휴식기간을 갖지 않았더라면 과연 그런 대작을 남길 수 있었을까. 유배생활이 그에겐 절망이었지만 우리 역사로서는 너무도 소중한 기간이었다.      

 

0. 다산 선생 외에도 유배지에서 주옥 같은 글과 작품을 남긴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다산 선생의 둘째형 정약전은 흑산도에서 18년간 유배생활을 하면서 박물학 저서인 ‘현산어보’와 소나무 벌목을 비판하는 혁신적 논문 ‘송정사의’를 썼다. 유배지의 자연과 그곳에서의 삶이 남긴 저작이다.

 

 해남 보길도 유배지에서 탄생한 가사문학의 보배 고산 윤선도,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추사 김정희, 함경도와 남해에서 유배생활을 하며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쓴 서포 김만중, 아버지를 따라 유배지를 전전하다 자신 역시 귀양살이 끝에 낙향해(담양) ‘사미인곡’ ‘속미인곡’을 남긴 송강 정철…

 

 이들에겐 고통과 절망의 땅인 유배지가 역설적이게도 학술과 문학의 토양이 됐던 것이다. 외로운 절해고도(絶海孤島)에서 몸과 마음의 안식을 얻은 이도 있었다. 바쁜 일상에 자연의 아름다움을 볼 여유도 없다가 유배를 와서야 산수를 즐긴 사람도 적지 않았다. 많은 선비가 세상사에서 단절된 채 학문에 정진해 위대한 저서를 남겼다.

 

0…러시아의 문호 푸쉬킨의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라든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같은 걸작들도 생사 기로에 선 유배지(시베리아)에서 나온 절망의 산물이다. 개인에겐 비극이었지만 역사로 보아서는 엄청난 소득이었다. 강요된 것이긴 해도 그래서 휴식이 필요한 이유다.

 

 마음이 심란하고 일이 안풀린 땐 잠심완색(潛心玩索) 즉 고요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사색과 침잠의 시간을 가져볼 일이다. “오랜 귀양살이에 틀어박혀 지내다보니 낮에 보이는 것은 구름의 그림자와 하늘빛 뿐이요, 밤에 듣는 것은 벌레소리뿐이었다. 고요하고 적막하게 지내니 정신이 한데 모여 옛 성인의 책에 마음을 쏟을 수 있었다. " 다산 선생의 말이다.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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