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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아편이다-‘공공의 적’이 된 한국 개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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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골에서 자란 나는 어릴 때 어머니 손을 잡고 동네 근처 절(사찰)에 따라다닌 추억이 있다. 큰 절도 아니고 암자(庵子) 비슷한 정도였는데, 그때 절의 처마 끝에서 은은히 들려오던 풍경(風磬) 소리와 코끝을 스치던 향불 내음이 지금도 아련하다.     

 

 당시에는 대체로 불교를 믿는 집안이 많았고 교회에 나가는 집도 더러 있긴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교회에 나가지 않는 집에서는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을 정신이 좀 나간 사람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높았다. 심지어 어느 집에서는 성경책을 들고 전도하러 다니는 사람이 오면 “재수없는 예수쟁이가 온다”며 아예 대문을 걸어 잠그는 경우도 흔했다. 우리집도 예외가  아니었다.    

 

 ‘예수쟁이’를 극도로 싫어하던 동네 어르신들 주장에 따르면, 그들은 말로만 번지레한 소리를 늘어놓을 뿐 실제 행동은 온갖 악행(惡行)을 저지르고 다닌다는 것이다. 특히 목사라는 사람들은 이상한 논리로 현실을 왜곡 부정하고 오로지 ‘천국’에 들어간다는 소리만 하며 신도들의 혼과 재물을 다 빼앗는다는 것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자란 나는 지금도 기독교(개신교)에 대해 아무리 마음의 문을 열려고 해도 잘 안된다. ‘예수’라는 단어 자체가 마음 속에 부정적인 똬리를 틀고 있어 문이 열리질 않는다. 예수만 믿으면 만사가 잘 풀린다는데, 그것은 노력도 않고 기도만 하라는, 지극히 무책임한 말로 밖에는 안 들린다.   

 

 그런데 기독교에 대한 나의 시각은 대학생활을 하면서 달라지기 시작했다. 당시 유신정권하에서 수많은 민주인사들이 수난과 핍박을 당할 때 용기있게 나서 군사정권 퇴진과 민주쟁취를 외친 사람들 가운데 한 부류가 바로 종교인, 특히 가톨릭계 인사들이 많았던 것이다. 내가 존경하는 분들이 그처럼 소신있게 행동하는 것을 보고 나는 신앙의 위대한 힘을 발견했다. 

 

 이런 연유로 나는 지금도 사회적 약자와 그들이 처한 모순된 현실을 외면하는 종교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특히 해괴망측한 정치적 논리로 대중들을 선동하는 사이비 예수쟁이를 경멸한다. 성경 어디에도 없고 예수 그리스도도 원치 않는 그릇된 행동을 거침없이 자행하는 이들이 예수의 이름을 더럽히고 있다. 불행히도 한국의 적지 않은 교회들이 이런 식으로 흘러가고 있다.                       

 

0…독일의 역사철학자 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는 ‘종교는 인민의 아편(阿片)’이라고 질타했다(Religion is the opium of the people). “종교적 고통은 현실의 고통의 표현이자, 현실의 고통에 대한 저항이다. 종교는 억압된 피조물의 탄식이며, 심장 없는 세상의 심장이고, 영혼 없는 현실의 영혼이다. 이것은 인민의 아편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인민에게 있어 환각적(幻覺的) 행복인 종교를 버리라는 것은 곧 현실의 행복을 지향(志向)하라는 것이다. 현실에 대한 환각을 버리라는 요구는 환각을 필요로 하는 현실을 포기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종교에 대한 비판은 종교라는 후광을 업은 속세에 대한 맹아(萌芽-새로 튼 싹)적 비판이다. 억압과 착취로 인해 피폐해진 삶을 살면서도 현실 도피로 천국을 꿈꾸며 살아가는 이들을 일깨우기 위해 한 말이다.   

 

 세상엔 아무리 노력해도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오직 기댈 곳이라곤 환각적 사이비 종교 밖에 없을 터이고 이 틈새를 집요하게 비집고 들어오는 세력이 상식적으로 말도 안되는 행태를 자행하고 있다. 코로나 시대를 맞아 독버섯처럼 창궐하는 사이비 기독교도 그런 부류다.   

 

 마르크스의 말대로, 희망 없고 기댈 곳 없을 때 잠시 고통을 잊기 위해 아편에 손을 대지만 거기에 빠져들수록 헤어 나오기가 어렵다. “코로나에 걸려 죽어도 좋다”고 외칠 수밖에 없다. “하느님도 나한테 까불면 죽어”라고 막 나가게 된다. 그렇다면 한국은 국민들이 아편에 기댈 수밖에 없을만큼 희망이 없는 나라인가.                

 

0…개신교 지도자란 사람이 “종교의 자유는 목숨과 바꿀 수 없다. 대책 없이 교회 문을 닫고 예배를 취소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정부는 예배를 함부로 제한하지 말라”는 광고도 실렸다. 이에 일반 국민은 한목소리로 성토를 쏟아내고 있다. “목숨을 건다는 것은 내 목숨이 위험할 때 하는 말이지 내가 예배를 드림으로써 남의 목숨이 위험해질 때 하는 말이 아니다”라고 비판한다.

 

 대면예배를 강행하는 교회들은 ‘성경의 가르침’ 운운하지만 실제로 성경 어디에도 그런 근거는 없다. 오히려 모여서 예배하는 것이 나와 남을 죽일 수도 있는 상황이기에 ‘살인하지 말라’는 십계명을 어길 수 있는 것이다.

 

 솔직히, 교회가 대면예배에 목숨을 거는 것은 헌금수입 때문이다. 어느 목사가 “교회를 영업장이나 사업장처럼 취급하지 말라”고 하자 다른 개신교 지도자는 “교회는 사업가보다 더 돈을 밝힌다. 장사 감각과 영업 감각도 가장 뛰어나고, 마케팅에 목숨걸듯 교회운영을 하면서 적반하장”이라고 비판했다. 한국의 상당수 교회는 이미 비즈니스화된지 오래다.

 

 한국의 개신교는 왜 ‘개독’과 ‘먹사라는 오명을 뒤집어 썼을까? 수 많은 한국의 예수쟁이들과 일부 비뚤어진 교회 지도자들이 올바로 예수를 믿지 못했거나 마치 예수를 믿지 않는 듯 행동한 까닭이다. 그들의 그릇된 신념으로 인해 많은 국민이 입는 피해가 너무 크다. 부디 회개하기 바란다.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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