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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여름 -친구가 떠나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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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고로 사나이는 함부로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되며 일생에 딱 세번만 울어야 한다고 배웠다. 태어날 때,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나라를 잃었을 때…

 

 그러나 사나이가 진정으로 눈물 흘릴 때가 또 있으니, 가장 친했던 친구를 잃었을 때가 아닌가 한다. 나를 위해 울어줄, 친구를 위해 눈물 흘릴 그런 관계 속에 인생길은 이어져 간다. 친구는 또 다른 ‘나’이다. 어느 때는 부모나 형제보다 더 의지하게 되는 것이 친구다. 

 

 학창시절부터 누구에게나 친한 친구가 한둘 쯤은 있을 것이다. 친구 중에는 술친구도 있겠고 가끔 만나 농담이나 주고받다 헤어지는 친구 등 여러 부류가 있을 것이다.

 

 내겐 이승에서는 다시는 못 만날 친구가 있었다. 그는 중학교 동창생. 충청도 시골(논산) 출신인 그 친구는 어려서 부모를 모두 잃고 어렵게 공부를 했다. 그런 환경 탓에 친구는 일찌감치 철이 들어 조숙(早熟)했다. 그 또래의 언행이라곤 믿어지지 않을만큼 의젓하고 신중했다. 그러나 불우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늘 명랑 쾌활했으며 운동도 잘했다.

 

 그는 논산에서 대전으로 유학 와 자취(自炊)를 하며 힘들게 학교를 다녔지만 항상 의연하고, 덩치도 커서 기율반장을 맡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친구를 형처럼 의지하며 지냈다. 그 친구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고교 진학도 포기한 채 대전 시내 주유소에 취직해 돈을 벌어 어린 동생들을 뒷바라지 해야 했다.  

 

 내가 대학에 진학해 여름방학 때 고향에 내려가면 친구는 그야말로 온갖 정성을 다해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해주려 애썼다. 친구의 논산 고향집엘 놀러가면 동네 앞 저수지에서 낚시로 건진 펄펄 뛰는 물고기로 매운탕을 끓여주곤 했다. 친구는 농사를 짓는 동네친구들에게 나를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친구”라며 뿌듯해 했다. 지금 생각하면 한창 때의 청년이 결코 그러기가 쉬운 것이 아니다. 자칫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비관할 수도 있는 현실에서 그는 그런 내색 전혀 없이 꿋꿋하고 당당했다.   

 

 그러다 친구는 공무원 시험을 통해 교정(矯正)직 공무원으로 발을 들여놓게 됐다. 즉, 교도소의  간수(看守)로 취직이 된 것이다. 그는 처음 교정공무원이 됐을 때 신기해서 교도소 내의 이런저런 모습을 이야기로 들려주었다. 특히 당시 ‘시국사범’으로 수감된 인사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그들이 세상사람들이 흔히 지칭하는 것처럼 생각이 불순한 사람들이 아니라 매우 똑똑하고 아는 것이 무척 많다는 사실에 놀랐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도 책 좀 많이 읽어야겠다고 다짐도 했다.   

 

 그 후 친구는 예쁘고 착한 금산 처녀를 만나 결혼했고 단촐한 가정을 꾸렸다. 신혼집은 당시의 전형적인 단칸 셋방. 그러나 내가 어쩌다 서울에서 내려와 신혼집에 들르면 ‘금산댁’은 있는 반찬 없는 반찬 총동원해서 주안상을 차려내곤 했다. 친구 아내는 무척 검소하고 조신(操身)해서 박봉의 공무원 남편을 눈물겹도록 잘 보필했으며 나는 그것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살림이 어렵긴 했지만 친구 부부는 아들과 딸 하나씩을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 ‘청약저축’을 통해 아파트도 한칸 마련했다. 그러던 친구가 언젠가 직장의 정기 건강검진 때 위(胃)에 이상이 있다는 사실이 발견됐다고 전해왔다. 친구는 부랴부랴 서울로 올라와 의료진과 병원시설이 가장 뛰어나다는 S의료원에 입원했다. 그것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꼭 완치시키려는 금산댁 친정의 배려이기도 했다.

 

 

 그때 검진을 마친 담당의사는 대수롭지 않게 “위암 초기라 수술을 하면 별 문제 없을 것”이라 했고 우리는 그나마 안도했다. 그런데… 의사가 덧붙인 한마디가 마음에 걸렸다. “새로운 수술방법을 써보겠다”는 것이었다. 초기암이라 어떤 방법을 써도 괜찮을 것 같으니 새 방법을 시도해보겠다는 것이었다. 친구 부부는 의사의 말을 믿고 동의했다. 나도 옆에서 그 말을 들었다. 그러나 나중에 생각하니 그것은 곧 힘 없는 서민들을 대상으로 ‘실험 수술’을 해보겠다는 예고에 다름 아니었다.

 

 하얀 천에 덮여 수술실로 들어가는 친구는 애써 웃으며 “걱정들 마. 살아서 나올테니…” 하면서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살아서 나오겠다던 친구의 모습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상식적인 수술시간이 훨씬 지나고서야 침대에 실려 나오는 친구의 얼굴에선 아무 표정이 없었다. 초등학교 아들과 어린 딸, 30대 후반의 꽃다운 아내를 남겨두고 친구는 그렇게 갔다. 28년 전 한여름 이맘때, 친구를 산소에 묻고 돌아서는 나의 발길은 어디로 향하는지도 몰랐다.    

 

 지금도 풀리지 않는 의문은 내 친구가 ‘실험수술’에 희생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친구가 떠난 후 나는 한동안 심한 우울증에 빠졌고 술에 취해 조용필의 ‘친구여’ 를 부를 땐 예외없이 줄줄 흐르는 눈물 때문에 노래를 끝까지 부른 적이 없다. ‘꿈은 하늘에서 잠자고, 추억은 구름따라 흐르고/친구여 모습은 어딜 갔나, 그리운 친구여…’

 

 매년 이맘때면 친구와 함께 천렵을 즐기던 그 시절이 미치도록 그립다. ‘고향에 찾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두견화 피는 언덕에 누워 풀피리 맞춰 불던 옛 동무여/흰구름 종달새에 그려보던 청운의 꿈을 어이 지녀 가느냐 어이 세워 가느냐…’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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