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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남2녀 집안의 막내로 태어난 나는 위로 두 형님에게 왠지 컴플렉스를 느낄 때가 많았다. 형님들은 생김새나 공부 등 모든 면에서 나보다 나았던 것이다. 중고등학교도 형님들은 명문교를 다녔으나 나는 1차에서 낙방해 후기학교를 다녔다. 특히 큰형님은 비록 작은 시골동네였긴 하지만 인근에 ‘천재가 났다’는 소리를 듣던 수재였다. 인물도 여성처럼 곱상하고 성격도 섬세한데다 공부도 잘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뜨시면서 큰형님은 사춘기를 갓 넘긴 나이에 집안의 기둥역할을 떠맡아야 했고, 일찌감치 공직세계에 뛰어 들었다. 당시 시골 집안의 유일한 출세관문이었던 사법고시에 도전해 3개월 만에 1차 관문을 통과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선 집안살림을 돌보는 것이 급했다. 그래서 ‘보통고시’(지금의 7급 공무원)로 목표를 낮춰 잡고 지방관청에서부터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동료들보다 앞서 승진을 거듭하며 잘나가던 형님은 그러나 중앙부처의 직속상관을 잘못 만나는 바람에 인생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사사건건 상관과 부딪치며 괴로워하던 형님은 어느날 모두가 부러워하던 공직을 휴지처럼 내던지고 낙향해버렸고 그 후 홧술에 의지한 채 파락호(破落戶)로 전락해갔다. 동네사람들은 그런 형님을 볼 때마다 “참 안됐다”며 혀를 차곤 했다. 그런 와중에도 세상을 앞서 진단하는 그의 예리한 안목에 나는 놀랄 때가 많았다. 가끔 휘갈겨 쓰는 붓글씨는 거의 프로 수준이었다.
형님이 술만 드시는 나날 속에도 옛 위인들의 행적을 줄줄이 꿰는 것을 보고 역시 형님은 범접하기 어려운 큰 바위같은 존재로 비쳐졌다. 그러나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종갓집 기둥역할을 하던 형님은 60을 갓 넘긴 나이에 결국 세상을 뜨고 말았다.
아버지와 큰형님이 세상을 뜨자 종갓집 대소사 일처리는 자연스레 차남인 작은형님에게 넘어갔다. 종사(宗社)는 장손(長孫)인 큰조카가 맡게 돼있지만 아직 성숙하지 못한데다, 하는 행동이 믿음직스럽지 않아 지금도 작은형님이 큰일을 챙기고 있다. 막내인 나는 종갓집 일에 이래라 저래라 할 권한도 없거니와 별 관심도 없어 조상들의 묘지를 어디로 이장, 또는 합장하는 따위의 일엔 아예 신경쓰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다 어느날 훌쩍 이민을 떠나오니 그런 일엔 전혀 무관심하게 됐다. 내가 집안일에 아무 부담을 느끼지 않은 채 떠나올 수 있었던 것도 막내라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예로부터 형만한 아우 없다 했다. 아무리 아우가 형보다 잘났어도 아우는 형님을 따라갈 수 없는가 보다. 자신의 선택에 따라 세상에 태어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형은 이 세상에 먼저 나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여러 책임과 의무가 따른다. 자신보다 어린 동생들을 보살펴야 하고 나이가 들어서는 연로한 부모님을 부양해야 할 책임이 따른다.
형제와 관련해 이런 얘기가 있다. 장남은 대체로 신중하고 보수적이며 리더십이 강하다. 집안일을 챙기고 부모와 동생들을 부양할 위치에 있는 장남은 그럴 수밖에 없다. 차남은 대개 적극적이고 처세술이 좋아 사회적으로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 위로는 형의 눈치를 볼 줄도 알고 아래로는 동생들을 부리는 위치에 있는 차남은 그럴 개연성이 크다. 막내는 남에게 의존하기 쉽고 나약한 반면, 감성은 풍부하다. 나처럼 집안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자란 막내는 성격이 대체로 그러하다.
집안의 자녀들은 자라면서 출생서열에 따라 각자 독특한 성품을 형성한다.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출생 순간부터 부모의 기대를 받고 자란 첫째는 책임감이 강하고 리더가 될 자질이 많다. 또 온순하고 예의 바른 반면,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이에 비해 어려서부터 늘 형과 경쟁하는 둘째는 야망과 성취욕, 독립심이 강한 아이로 성장한다. 또 경쟁을 즐기고 문제의 양면을 보는 능력도 갖추게 된다. 그러나 자칫 반항적인 성격으로 흐르기도 쉽다. 성경에도 차남(second son)은 ‘말 안듣는 방탕한 아들’(蕩子, wayward prodigal son)로 묘사돼있다.
차남이 장남보다 경쟁심이 강하고 진취적이다 보니 시대를 앞서간 개혁가도 많다. 러시아의 레닌, 프랑스의 나폴레옹,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가 차남이며, 한국의 역대 대통령 중 박정희, 노무현, 이명박 전 대통령이 모두 차남들이다.
미국 MIT의 프랭크 설러웨이 교수는 십수년 전 <반항아로 태어나다>라는 저서에서 “이제 차남의 시대가 오고 있다”며 “변화를 필요로 하는 기업은 차남을 경영자로 뽑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들을 조사한 결과 급변하는 현대사회, 특히 기업을 경영하는데 적합한 성격을 가진 쪽은 차남이라고 주장했다. 마이크로 소프트의 빌 게이츠 전 회장, IBM의 루 거스너 회장, 포브스 그룹의 스티브 포브스 회장이 모두 둘째다.
최근 한국에서는 롯데그룹 장남(신동주 롯데홀딩스 부회장)이 전격 해임됐다. 이에 대해 재계에서는 그가 기업실적 부진 등에 따라 창업주 아버지(신격호 회장)의 눈밖에 난 것으로 보고 있다. 즉 장남인 그가 아버지의 마음에 들지 않았고, 후계구도를 바꿀 만큼 실수를 해 그룹승계가 어렵게 됐다는 것이다.
삼성그룹도 그랬다. 장남인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도 한때 삼성의 후계자로 거론됐지만, 셋째인 이건희에게 밀려나고 야인이 됐다. 이병철 창업회장은 자서전 ‘호암자전’에서 “장남 맹희에게 경영을 맡겨보았지만 6개월도 못돼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고 적었다. 능력이 없으면 자식도 가차 없이 밀려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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