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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식

부동산캐나다에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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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울어야 하나-내가 겪은 1950년 6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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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트기가 날아온다. 촌락이지만 인민군이 주둔하고 있는 우리 동네 반촌 70가구의 종씨 성을 가진 사람이 평화스럽게 살아온 나의 향리다. 내가 국민학교 3학년 10살 때의 일이다. 1950년 6.25 전쟁이 터졌다. 


눈 깜짝할 사이 남한 전역이 공산치하의 손 아귀에 들어갔다. 이제 남은 것은 낙동강 전선 대구와 부산을 교두보로 한 남한 땅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풍문이다. 


들은 말에 의하면 이 때 우리 경북 지역의 학생들은 조국을 지킨다는 일념으로 중학생 고등학생들이 자원 입대를 했다 한다. 총 한방 쏠 줄 모르는 학생들이 대구 팔공산 전투에 투입되어 총알받이로 산화해 갔다는 소식이 연일 들린다.


 제트기는 연일 단양과 죽령산 일대에서 남하하는 인민군의 후방 지원군을 차단코자 출격을 하기에 밤낮 없이 포탄 터지는 소리가 고막을 두들겼다. 그 때 어린 내가 무엇을 알았을까 마는 저녁에는 소년단이라며 동네 강당(옛 도계서원)에 모여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불러야 했고 멀지 않아 소년단 군대를 조직 전쟁터로 나가야 한다는 동네의 인민군을 지지하는 소위 빨갱이란 분의 명령을 따라야 했다. 우리 집은 대대로 내려온 풍족한 농토를 가진 부농으로 3 사람의 일꾼이 일을 했다.


인민군이 2주간 점령한 동네에서는 인민 위원회라는 것이 조직되더니 부르조아 유산 계급이라며 우리의 재산 전부가 국가의 소유라며 빼앗아 갔다. 뿐만 아니라 매일 밤 어머니를 동네 뒷산에 데리고 가서 어떻게 토지를 장만 했고 너희들은 어이해서 잘살고 있느냐 일꾼을 3명이나 가진 자본주의라며 총살 위협이다. 


초저녁부터 밤 12시까지 짙어가는 가을 하늘의 단풍잎을 보며 사랑 마루에서 떨며 울었던 기억이 새롭다. 인민군이 북으로 물러간 후 수복된 후에 알았지만 같은 종씨 중 몇몇 분이 칼 막스와 레닌에 심취 빨갱이 중에 빨갱이로서 인민 위원장을 맡아 뒤에서 인민군 점령군에게 보고를 했었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어머니는 뒷동산에 끌려가 총구 앞에서 살아온 과정과 반성 자술서를 매일 쓰셨다 한다. 지난 밤에 썼던 자술서와 오늘 쓰는 자술서가 틀리지 않게 기억을 하며 중요 줄거리를 쓰셨다 한다. 뒤뜰에 가을의 감과 밤이 익어 입을 벌리면 언제나 내 마음대로 따 먹었는데 인민군이 점령한 후로는 나라의 것이라며 한 알도 주어 먹거나 따서 먹을 수가 없었다.


한번은 잘 익은 홍시 감을 따먹자 하니 종씨인 인민위원장이 호통이다. 옛날과 같이 너의 것이 아니니 얼씬도 하지 말라. 네가 다시 감을 따먹으려 하면 너의 어머니는 물론 누나들을 비롯 너까지 가족을 다 죽인다. 너의 가족은 우리 인민의 적이기에 죽어도 된다며 호통이다. 그 날 이후 얼마나 무서웠던지 동네를 나다니지 못했다.


밤이면 소년단의 모임에 참석 전쟁 승리, 김일성 장군의 노래, 이제 다 잘 살아가는 나라가 된다며 강연을 들어야 했다. 요사이 젊은 세대들이 이런 실화를 어이 믿으랴, 하지만 직접 체험을 한 어릴 때의 기억은 팔순이 다 되어도 잊혀지지 않는다. 


나의 마음과 이민생활 45년을 생각하며 이제 팔순의 나이에서 내 생존의 뒤안길도 생각해 본다. 살아 오면서 수구파란 말도 많이 들었다. 하지만 우리의 세대 아니 60, 70, 80대 이상의 분들 중에 수구파라는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이 몇 명이 있을까. 


소위 강남좌파라는 사람들 나아가 젊은 세대들이 선배 세대들이 살아온 생존의 역정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하는 노파심도 있다. 나이든 세대들은 오늘의 부강한 조국을 만들기 위하여 악전고투의 노력을 했고 지금도 우리의 후세대들이 잘 살아갈 길을 다듬어 놓으려고 애쓰고 있다.


 나의 졸견이지만 나의 경우 보수라 해도 나는 자유, 평등, 진실, 정직한 사회,  성실히 능력을 인정받는 사회를 원하면서 살아왔음에 오늘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성실히 일한 대가를 추구하고 그 결과물에 의하여 양심에 부끄러움 없는 값어치 있는 삶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가 아닐까. 


70년대 넓은 나라에서 심호흡을 하며 각자의 원대한 꿈을 꾸며 찾아온 곳이 이 곳 캐나다, 그 시절 우리 세대는 누구나 한 사람 200 달러를 들고 조국을 떠나도 조국을 탓하는 사람은 없었고, 우리가 한 사람이라도 더 떠나줌으로 조국의 동포들이 잘 살아갈 수 있다는 일념이 있었다. 


이곳에 정착하여 자기의 뜻대로 삶을 유지하여 성공을 한 사람도 많이 보았고 또한 그렇지 못한 사람도 많이 있을 수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다 같이 똑 같은 조건하에서 열심히 살아왔을 따름이다.


 “사랑하는 나의 조국, 나의 동포, 씨앗으로 남으면 언젠가 그리움의 꽃으로 피어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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