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ngrokim
노스욕 거주,본보 주최 제1회 정원&텃밭 컨테스트 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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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6.25 회상(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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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부분  집들이 그러하듯 구식한옥으로 전쟁 전에 걸었던 극동 다이어 공업사라는 간판이 아직도 그대로 붙어있었다. 염전을 찾아다니며 소금과 물건을 교환했던 일,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던 피난길, 잠시나마 낙오되어 있었던 고향에서의 생활, 고물 배와 기차 지붕에 올라 돌아온 서울. 


어려운 일들을 겪으면서도 사람은 쉽게 죽지 않는다는 것과 모험을 하면 다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달성된다는 것을 경험으로 배웠다. 사회에 대한 저항력과 담력이 갖추어졌고 학교에 다니는 동안 운동으로 다져진 건강도 자신감을 뒷받침해주었다.

 

 공장(사실은 수리소)문을 열었다.
 과연 우리가 할 수 있겠는가? 사업성은? 운영기금은? 하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조차 사치였다. 타이어에 바람을 넣는 콤프레셔, 헌다이어 몇 개 그리고 수리공구들을 공장 앞에 널어두고 장사하는 것같이 해두었다. 낮에는 아무런 기척이 없다가 어두워져 문을 닫으려 할 때 미군 GMC, 바퀴가 열 개가 달린 대형트럭이 가게 앞에 서며 한국 헌병이 내린다. 당시 성행하던 군수품 부정거래를 단속하러 나왔나 싶었는데 오히려 휘발유 한 초롱(2갤론)에 얼마 줄래?라고 묻는 것이었다. 휘발유뿐만이 아니라 모든 물건과 서비스에 대한 거래가를 전연 모르는 우리로서는 얼마면 되겠습니까?라고 거래가를 유도할 수밖에 없었다.


 000환 주라. 그때 우리가 가진 돈에 맞추어 세 초롱을 사겠다고 했더니 다섯 초롱 빼하며 자신이 몰고 온 트럭을 가리킨다. 고무호스를 탱크에 넣어 입으로 뺐다. 세 초롱 병으로 미군 부대에 파견되어 서울 경기지구를 안내하는 일을 맡고 있어 비교적 휘발유를 많이 쓰는 편이었다.

 

 이 차가 떠나자마자 일본 차(이쓰스?)가 서더니 휘발유가 있느냐고 묻는다. 있다고 하자 10초롱을 팔란다. 금방 다섯 초롱을 산값에 50%를 붙여 팔았다. 이 차는 정부 조달청 차였다.


무엇하나 정상적인 것이 없고 임기응변과 변칙적인 부정거래가 활개를 쳤다. 미국으로부터 받는 소량의 휘발유 원조 외에는 휘발유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든 관계로 부르는 것이 값이고 바가지를 쓰는 사람이 바보인 시기였다.


 이렇게 시작되어 미군 부대 근무하는 운전자들, 시청, 영단(?), 취재기자, 조달청 운전자 등 변칙 거래처가 생겨났다. 또 6.25전에 브로커로 일했던 김칠성, 김홍석 씨 등과 형수님을 중신했던 최흥겸씨등이 직접 찾아와 격려를 해주었다. 이래저래 12월 정도에는 고객이 늘며 생활도 해결할 수가 있었다. 


 특히 첫 손님이었던 미군 부대 한국 헌병은 자주 들러주어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친숙해진 후, 그는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과 동생들이 자기만 쳐다보고 있어 어깨가 무겁다고 했다. 우리의 사정을 알고는 자기 동생들과 같은 나이인데 고생한다며 동정적이었다. 국군이 인민군과 중공군에 밀려 평양을 빼앗기고 계속 후퇴하고 있는데 이러다가 다시 한 번 서울을 뺏기는 것이 아닌지 걱정이라고 한 사람도 그였다. 우리는 설마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들어 넘겼다.

 

2차 피난(1.4 후퇴)

 

 민심은 하루가 다르게 불안해지며 다시 서울이 위기라는 소문이 난무했다.
애써 불안함을 감추며 겨울방학 후엔 학교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고 일하고 있던 날이었다. 예의 한국 헌병이 GMC 대형트럭을 몰고 왔다. 이런 한가한 친구들을 봤나? 하며 서울이 함락위기에 있으니 빨리 타라고 했다. 경남 밀양으로 후퇴하는 중이니 거기까지 데려다주겠다는 것이다. 운전석에는 무전병인 듯 한국군이 옛날 자석식 무전기를 등에 메고 있었다. 깜짝 놀란 우리는 있는 돈과 교과서 학생증과 교복 등을 챙겨 덮개도 없는 트럭의 뒤에 올라 또 다시 남으로 남으로 달렸다. 살을 에는듯한 추위를 막기 위해 최대한 몸을 말고 학생 오바를 머리까지 끌어당겨 고개를 묻은 채 앞도 보지 못하고 쪼그리고 앉아있어야 했다.


 당시의 도로는 대부분 비포장도로여서 차들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튀어 오르기 일쑤였다. 얼마를 달렸는지는 모르나 트럭이 섰다. 일어서서 앞을 보니 다리가 끊겨있고 수백 대의 차가 늘어서 있는데 뗏목 배가 한 대씩 북쪽 강가에서 남쪽 강가로 건네 주고 있었다.


 그 헌병은 상황판단을 위해 여기저기를 둘러보더니 이 차는 힘이 좋으니 그대로 건넌다며 강으로 들어갔다. 강물 속에는 이미 우리와 같이 모험하다가 못 빠져나간 차들이 여기저기에서 물살을 받으며 서 있었다. 여기가 바로 공주 앞 금강이었다. 강물의 흐름을 따라 아래쪽을 보니 멀지 않은 곳에 공주 시내로 들어가는 다리가 폭격을 맞아 뼈만 앙상하게 버티고 있었다.


 차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의 모래와 물을 밀며 나가려 하지만 속력은 나지 않고 애들 걸음같이 강 속으로 들어간다. 그래도 다른 차와는 달리 새 차에 힘이 좋아서인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강폭의 반을 지났지만 위태롭게 가다가 멎다가를 반복하더니 결국은 서고 말았다. 얼마 후 다시 시동을 걸어보았지만 붕붕거리다가 다시 꺼져버리고 만다. 그러자 ‘너희 물에 들어가 바퀴 앞에 있는 모래 좀 치워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렇지않아도 불안에 떨며 차 뒤 짐칸에 실려 오느라 몸이 얼어있었지만, 그 상황에선 거절할 수가 없었다. 차질 않았다. 추운 것에 비하면 모래를 치우기는  쉬웠다. 그 후 다시 시도했지만 실패였다.


 결국, 무전기로 어딘가에 연락하고 한 시간 정도 지난 후 미군의 레커차가 도착해 쇠 철삿줄을 풀더니 그걸 가져가 걸으라는 시늉을 한다. 이번에도 할 수 없이 내가 줄을 끌고 와 차 앞 범퍼에 걸으니 무사히 건너갈 수 있게 되었다. 두어 시간을 기다렸다 시동을 켜니 성공이었다. 그때는 벌써 캄캄해서 밤 10시도 지났다고 기억한다. 군대 차가 무방비하게 낯선 곳에서 밤을 새는 것은 좋지 않다며 계룡산을 넘어 대전까지 가야 한단다. 


 포장도 안된 구불구불한 고갯길은 가까운 곳에 서너 개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점심도 굶은 채 떠나온 탓에 배가 몹시 고팠다. 민가에 가서 먹을 것 좀 얻어오라는 임무를 갖고 그 집으로 갔다. ‘여보세요’ 하고 창호지 문밖에서 부르자 ‘누구유’ 하며 문이 열리고 허연 수염을 기른 할아버지가 장죽을 물고 나를 본다. 어두운 등잔 뒤로는 자비로운 미소를 띤 돌부처가 보였다. 


 배가 고파 먹을 것 좀 얻으러 왔다고 하자 나를 자세히 보고 나서 쯧쯧하고 혀를 차며 장죽으로 놋재털이를 탕탕 소리가 나도록 친다. 잠시 후 옆방에 불이 켜지면서 중년의 남자가 찐 고구마 몇 개를 들고나오며 저녁을 다 먹고 이것밖에는 없다며 미안해하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었던 듯 했다. 일행이 셋이나 더 있다고 했더니 당장 먹을 수 있는 생고구마라며 꽤 많이 안겨주었다. 가슴이 뭉클해지며 방금 보았던 돌부처 생각이나 불교 신자냐고 물었다. 


 “네, 가까이 있는 갑사 절의 신도예유”


 깊은 산중의 불심에 고개가 숙어지며 어릴 적 생각이 났다. 스님이 우리 집 사립문 앞에 와서 적선하라며 목탁을 두드리면 ‘우리는 예수 믿어요.’라고 소리쳐 돌려보내곤 했던 것이 부끄러워졌다. 종교 대 종교가 아니라 사람 대 사람의 선행을 구차하게 이유를 붙여 거절하는 것이 옹졸했다는 생각이 든 까닭이다.(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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