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ngrokim
노스욕 거주,본보 주최 제1회 정원&텃밭 컨테스트 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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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6.25 회상(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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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랑진 역

 

 우리가 탄 칸과 바로 앞칸만 끌고 가기에 참 운이 좋다 했더니 곧바로 후퇴하며 다른 레일에 두고 기관차만 가서 나머지 짐칸들을 끌고 올라갈 기세다. 기겁하고 내려와 기관차 뒤 짐칸 지붕으로 기어 올라갔다. 나중에 듣고 보니 남기고 온 2 짐칸은 진해 해군기지로 갈 것이었다고 했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이 기차는 전황에 따라 수시로 변하는 지시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매우 지지부진하였다. 


 겨우 밀양을 거쳐 경산에 오니 해가 지는데 대구역에 들어갈 여건이 안 되는 것인지 오늘 저녁은 여기서 머문다고 하면서 언제 떠날는지는 다음 지시에 따른다만 한다. 참으로 막연했다. 우리는 역을 떠날 수가 없어 밥을 사다 먹으며 기차의 동정을 살펴야 했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 아니었다.


 새벽 2시경 사전 통고 없이 출발한 기차를 타고 왜관, 구미를 거쳐 김천에 오니 아침 동이 트기 시작한다. 오는 중에도 대구와 김천에서 각각 몇 칸씩을 떨어트렸다. 김천과 영동 사이는 소백산맥이 북에서 남서로 비스듬히 누워있는 중간이다. 여기를 뚫고 가자니 자연 몇 개의 길고 짧은 기차 굴이 생각이 난다. 


 김천을 지나 직지사 역을 통과하면 바로 추풍령 밑 기차굴을 뚫고 가는데 굴속을 지날 때는 석탄 기관차에서 나오는 연기가 따스하고 몸을 녹일 수 있어 좋았지만, 밖으로 나와보니 눈코입 주위가 그을음으로 까맣게 변해있어 서로 보고 멋쩍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환갑을 바로 보는 아버님의 고생에 진실로 송구스러웠고 또한 하늘만 보고 눈시울만 적셔야 했던 자식에 대한 교육열에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아비가 된 나 자신을 조명해 볼 때 부끄럽다.


 계속 옥천을 거쳐 대전에 오니 우리가 타고 온 차는 더는 가지 않는단다. 그날은 대전서 자고 다음 날 천안, 수원을 경유 노량진에서 내려 한강 다리까지 왔다.  폭격으로 끊어진 다리 밑에 미군들이 임시로 배들을 연결하여 만든 부교를 이용해 서울에 들어가려 헌병 앞에 섰다. 아들의 복교를 위해 서울에 들어가야 한다면서 도민증을 보였지만 지금 서울이 혼란하고 식량도 없어 서울 시민 외에는 들어갈 수 없다는 냉담한 대답을 들어야 했다. 나 역시 학생증과 시민증을 보이며 같이 사정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시간이 없다는 말과 함께 나는 부교 쪽으로 밀려났고 아버지께는 냉정하게 ‘지금은 전쟁 중이니 돌아가시오’라고 한다. 서울에 있던 영헌과 내가 학교 가는 것을 보고 싶어 하셨던 아버지는 손으로만 빨리 가라며 넋을 잃고 쳐다보신다. ‘아버지, 저 공부 잘 할게요.’ 마음속으로 다짐하며 돌아섰지만, 아버지 혼자 돌아가실 때 고생하실 것이 염려되었다.


 밤늦게 집에 도착해 문을 두드렸지만, 기척이 없다. 얼마 만에 영헌이가 나와 문을 여는데 잠결인지 아직도 정신이 없다. 배가 고파 우선 먹을 것을 찾았지만 별것이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혼자 있으며 공산당의 노력동원, 교육동원 등을 다동 23번지를 대표하여 끌려 다녀야 했고 피난을 떠나기 전 홍제동, 수색, 삼송리 등에서 옷과 바꿔온 양식은 벌써 떨어진 듯,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왔는지 파리한 몸과 지친듯한 기색이 장하고도 안타까웠다.


 11월 중순이 되자 신의주 압록강까지 진격했던 유엔군은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리기 시작했다. 소문에 의하면 중공군은 밤마다 지친 육신과 고향을 그리는 마음을 자극하도록 구슬프게 피리를 불어 병사들에게 전의를 상실케 하는 전법을 써서 밀린다고 했으나 사실인지는 알 수가 없다. 서울도 국군 수중에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정부관리가 임시수도인 부산에 있고 서울 시청과 경찰은 있지만, 행정과 질서를 잡을만한 여력이 없었다. 시민들은 먹을 것이 된다면 무엇이든 했다. 심지어 미군이 먹다 버린 음식을 걷어다 먹었다. 일명 꿀꿀이죽.


 수염이 석 자라도 먹어야 양반이라는 말이 있듯 무슨 수를 쓰든지 먹고 살아남아야 했다. 배고픔 앞에선 양심, 도덕, 정직, 자유 등은 그 가치를 잃었다. 넋 빠진 것들이고 무능한 것이었다. 내가 살기 위해선 네가 죽어줘야겠다는 식의 무질서가 현실을 지배했다. 주먹을 휘둘러 뺏고 달아나고 사기 치고 달아나고…   당한 사람은 무능하고 못난 사람이었다. 반면에 가해자는 유능하고 잘 먹고 잘산다.


 이런 식으로 끓는 가마니 속에 메뚜기 튀는 현상이 계속되다 보니 자연적으로 주먹은 가깝고 법은 멀다라는 말이 회자하기 시작했다. 오늘날은 어떠한가? 과연 주먹은 사라지고 법만이 존재하는 좋은 사회인가?


 학교는 아직 잠겨있었고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살아남는 것이었다. 당시 우리 집은 시청 뒤 청계천을 복개하여 생긴 꽤 넓은 길가에 있었는데 주변으로 시청, 중앙청, 국회,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이 자리한 중심요지였다. 대부분의 집이 그러하듯 구식한옥으로 전쟁 전에 걸었던 ‘극동 다이어 공업사’라는 간판이 아직도 그대로 붙어있었다. 


 염전을 찾아다니며 소금과 물건을 교환했던 일,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던 피난길, 잠시나마낙오되어 있었던 고향에서의 생활, 고물 배와 기차 지붕에 올라 돌아온 서울.

 

어려운 일들을 겪으면서도 사람은 쉽게 죽지 않는다는 것과 모험을 하면 다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달성된다는 것을 경험으로 배웠다. 사회에 대한 저항력과 담력이 갖추어졌고 학교에 다니는 동안 운동으로 다져진 건강도 자신감을 뒷받침해 주었다.
 
 공장(사실은 수리소) 문을 열었다.


 과연 우리가 할 수 있겠는가? 사업성은? 운영기금은? 하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조차 사치였다. 타이어에 바람을 넣는 콤프레셔, 헌다이어 몇 개 그리고 수리공구들을 공장 앞에 널어두고 장사하는 것같이 해두었다. 낮에는 아무런 기척이 없다가 어두워져 문을 닫으려 할 때 미군 GMC, 바퀴가 열 개가 달린 대형트럭이 가게 앞에 서며 한국 헌병이 내린다. 당시 성행하던 군수품 부정거래를 단속하러 나왔나 싶었는데 오히려 ‘휘발유 한 초롱(2갤론)에 얼마 줄래?’ 라고 묻는 것이었다. 휘발유뿐만이 아니라 모든 물건과 서비스에 대한 거래가를 전혀 모르는 우리로서는 ‘얼마면 되겠습니까?’ 라고 거래가를 유도할 수밖에 없었다.


 “000환 주라.’ 그때 우리가 가진 돈에 맞추어 세 초롱을 사겠다고 했더니 ‘다섯 초롱 빼’ 하며 자신이 몰고 온 트럭을 가리킨다. 고무호스를 탱크에 넣어 입으로 뺐다. 세 초롱 값을 받으며 두 초롱 값은 내일 달라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는 한국군 헌병으로 미군 부대에 파견되어 서울 경기지구를 안내하는 일을 맡고 있어 비교적 휘발유를 많이 쓰는 편이었다.

 

 이 차가 떠나자마자 일본 차(이쓰스?)가 서더니 휘발유가 있느냐고 묻는다. 있다고 하자 10초롱을 팔란다. 금방 다섯 초롱을 산값에 50%를 붙여 팔았다. 이 차는 정부 조달청 차였다. 무엇하나 정상적인 것이 없고 임기응변과 변칙적인 부정거래가 활개를 쳤다. 미국으로부터 받는 소량의 휘발유 원조 외에는 휘발유를 구할 방법이 없었든 관계로 부르는 것이 값이고 바가지를 쓰는 사람이 바보인 시기였다.


이렇게 시작되어 미군 부대 근무하는 운전자들, 시청, 영단(?), 취재기자, 조달청 운전자 등 변칙 거래처가 생겨났다. 또 6.25전에 브로커로 일했던 김칠성, 김홍석 씨 등과 형수님을 중신했던 최흥겸씨등이 직접 찾아와 격려를 해주었다. 이래저래 12월 정도에는 고객이 늘며 생활도 해결할 수가 있었다. 특히 첫 손님이었던 미군 부대 한국 헌병은 자주 들러주어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친숙해진 후, 그는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과 동생들이 자기만 쳐다보고 있어 어깨가 무겁다고 했다. 우리의 사정을 알고는 자기 동생들과 같은 나이인데 고생한다며 동정적이었다. 국군이 인민군과 중공군에 밀려 평양을 빼앗기고 계속 후퇴하고 있는데 이러다가 다시 한 번 서울을 뺏기는 것이 아닌지 걱정이라고 한 사람도 그였다. 우리는 설마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들어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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