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ngrokim
노스욕 거주,본보 주최 제1회 정원&텃밭 컨테스트 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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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6.25 회상(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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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 이어)

 이양에 도착해 벌교 가는 지름길을 물으니 조성(새재)로 가는 길을 상세히 알려준다. 말은 쉽게 들었지만, 물어물어 소나무와 잡목으로 뒤덮인 준험한 고개를 넘어 조성에 치맛자락에 안고 있는 광덕산이 여성적이라면 이번 고개는 거칠고 남성적이었다. 여순반란사건 때 율어가 공산 반도들에 의해 점령되어 있어도 토벌대가 접근하기 힘들었다는 말처럼 그럴만한 곳이라고 생각된다. 조성은 칠팔년전 일제 소학교 시절 호기심에 집을 떠나왔다가 차표를 사지 못해 집에까지 걸어간 경험이 있는 곳이다. 가는 길을 물어볼 필요도 없이 철길을 따라 걸었다.


 “무슨 담배요? 좀 팔구가오.”


 새재의 철도 굴을 지나 새끼산거리를 지나는데 우리를 담배장수로 오인하고 부른다. 해는 거의 새재에 걸쳐있었고 어두워지기 전에 집에 도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곳은 오고 가는 사람들이 목을 축이고 갈만한 간이주막이었다. 형님이 담배장사가 아니라고 밝히며 물 한 모금을 청하자 들어오란다. 40대 중반 정도의 껄렁한 놈팽이처럼 보이는 주인의 눈매가 예민하게 우리는 살피는 것이 공산당 특유의 프락치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서로를 보며 조심하자는 신호를 교환하며 들어갔다.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느냐는 물음에 서울에서 이 아랫마을 무만동에 간다고 대답했지만, 그의 얼굴엔 ‘여수반란 때 부역했던 너희가 서울에 숨어 살다 이제 너희 세상으로 바뀌었다니까 돌아오는구나.’라는 표정이었다. 게다가 우리가 돌아가 인민위원회에서 한자리쯤 하게 되면 덕 좀 보겠다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안방으로 들어가자 자신의 집에 온 귀한 손님이니 술 한 잔 하고 싶다며 당시 비밀리에 내린 꽃 소주와 피문어를 내놓는다. 피문어는 큰 문어를 눌러 고급스럽게 상품화한 것으로 주로 제사상에 오르거나 환자의 영양식으로 많이 쓰였다. 어렸을 적 외가에 식량을 얻으러 갈 때 할아버지, 할머니 잡수시라고 우리에게 들려 보낼 정도로 귀한 것이었다. 피곤함에 찌들고 마치 피부병마저 앓고 있는 듯이 남루해 보이는 우리에게 이런 융숭한 대접을 하는 속뜻이 짐작이 갔다.


 능주에서 벌교까지 200여 리의 길을 산길, 들길, 험한 길을 가리지 않고 질러온 덕에 100여 리로 줄일 수 있었지만 몸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거기에 집에 가까워져 간다는 흥분과 감격 안도감 등으로 의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 독한 술을 마시자 빠르게 허물어져 내린다.


 술을 마셔도 형님과 나는 반응이 틀리다. 나는 마셔도 침착하지만, 형님은 금방 흥분하여 공격적으로 변한다. 주인장은 계속 잔을 권하며 이리저리 떠보는 듯한 말을 던지면서 좋은 기회라도 건지려 들었지만 의도했던 만큼의 소득은 얻지 못했다. 


 어물 저물 밤이 깊어져 가겠다고 하니 주인장은 바로 아래 과수원에서 산 듯한 배 한 포대를 주며 가져가란다. 술에 취해 몽롱한 정신과 허물어지려는 몸을 추스르고 본래 가지고 있던 짐에 배 한 자루까지 얻어 어둠 속을 갈지자걸음으로 걷다가 넘어지다가 하며 동구에 들어서자 여기저기서 개가 짖고 잠이 없는 할아버지의 담뱃재를 터는 소리, 헛기침소리가 난다. 집이 가까울수록 기쁜 마음과 억울함으로 들떠 올랐다.


 마침내 대나무로 엮은 우리 집 문 앞에 다다라 ‘왔습니다.’ 라고 외쳤지만 그건 기분뿐, 실제로는 소리가 목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답답해서 손으로 문을 힘차게 두드리자 놀란 개가 요란하게 짖어댔다. 하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아주 기쁘거나 아주 슬프면 웃음도 울음도 안 나는 건가 계속 울먹이며 문을 두들겼다. 드디어 아버님이 방문 건너에서 ‘거 뉘기여?’하며 동정을 살피신다. 당시의 밤손님은 무엇보다 더 두려운 존재…


 대여섯 번을 뉘기여? 뉘기여? 하시다가 대답이 없자 우리 앞에까지 오셔서 누구냐고 물으신다. 그때야 겨우겨우 “영놉니다.” 라고 대답을 했다. 문이 열리고 온 가족이 뛰어 나오며 붙잡고 한바탕 운 것을 마지막으로 방에 들어가 쓰러져버린 우리는 뒷날 아침까지 죽은 듯이 잠이 들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어머님이 우리 옷을 다 벗기고 땀과 소금가루, 붉은 반점으로 뒤덮인 몸을 시원한 수건으로 다 닦아내고 삼베 등지 개와 삼베 바지로 바꿔 입히고 이놈들이 정말 내 자식들인지 우리들의 불알을 만져보고 또 만지며 한참이나 지켜보다 주무셨다고 한다.


 13일간 사선을 넘나들던 피난일정이 이렇게 끝나고 그리웠던 고향에서 부모님이 지극정성으로 챙겨주시는 영양식을 먹으며 열흘쯤 지나니 몸도 정상으로 돌아오고 활력이 되살아났다. 주시기만 한 부모님의 사랑을 받기만 했다. 그런 자신에게 부모로서 자식들에게 사랑을 주기만 했느냐고 반문한다면 나는 우울해진다.


 생전에 아버님은 종종 고생하고 큰 아이들이 빨리 철든다고 하셨다. 고교 후배인 박 군은 젊은 나이에 암이라는 충격적인 죽음의 선고를 받고도 용기를 내어 많은 난관을 거쳐 극복했다. 그 후에도 시간을 만들어 장애인을 위한 자원봉사를 그치지 않고 하고 있다. 


 우리는 일생동안 잊을 수 없는 어려움을 겪었다. 사람들은 좋든 나쁘든 극한 상황을 거치고 나면 인생을 알고 겸손해지고 어떻게 사는 것이 현명한가 하는 교훈을 얻는 것 같다. 내 자신도 피난 전과 피난 후의 자신은 분명 달라져 있다는 것을 느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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