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ngrokim
노스욕 거주,본보 주최 제1회 정원&텃밭 컨테스트 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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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6.25 회상(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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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 이어)

 남루한 옷차림에 피로한 몰골로 헐떡이는 우리에게 무뚝뚝하게 목이나 축이라며 참외를 하나씩 내민다. 마치 삼국지에 나오는 장비를 연상시키는 이 거한은 키가 거의 6척은 되는 듯 컸고 얼굴도 우악스러워 보였다. 


 우리가 목이 말라 정신없이 먹고 있으니 말없이 우리의 기색을 살피던 산사나이가 “가유, 우리 집에 가서 저녁이나 나누어 먹어유” 한다. 그의 말을 듣는 순간 ‘아- 우리가 충청도에 들어섰구나’ 하고 위치를 알게 되었다. 


 수원에서는 집에 들어서는 사람들을 밀어냈는데 여기서는 밖의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인적이 드물어 그런지 인심이 좋아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다. 산기슭 외딴집에서 보리밥에 된장찌개를 먹이고는 빨리 가라는 것이다. 벌써 밤중인데 우리는 서울 학생이고 먹을 것이 없어 고향에 간다며 염려 말라고 안심을 시켰다. 얼마쯤 지나자 부락자위대가 대창을 가지고 순찰을 왔다가 우리 일행을 보고 깜짝 놀란다. 먼저 증명을 보고 짐을 뒤지기 시작한다. 우리의 짐이래야 그전 수십 번과 같이 별문제가 없었다.


 매번 문제가 되는 것은 일제시대 만주에서 헌병으로 근무했던 장 씨의 완벽한 헌병 복장의 사진과 그때 썼다는 단도였다. 이것들이 또 문제가 되었지만 장 씨는 자신이 공산당원으로 서울에서 보성 득량발전소 소장으로 발령받아 내려간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들은 의심하면서도 뒤탈이 있을까 싶어서인지 그정도로 물러났다. 그들이 간 다음에도 장 씨는 아내가 벌교에서 인민 여성동맹위원장이라며 호언장담했다.


 이 집 주인인 산사나이, 장비는 안도의 숨을 쉬며 다행이라고 부처님께 빌었다고 한다. 그는 재 넘어 가까운 곳에 있는 마곡사에 일주일에 한 번씩 가서 불공을 드린다고 했다. 우리가 묵게 될 건넛방은 죽석이 깔렸었는데 저녁 내내 모기, 빈대, 벼룩에 시달려 잔 듯 만 듯하고 다시 산길을 따라 남쪽으로 향했다. 아침 일찍이 산길을 따라 걷고 있으려니 온갖 새가 지저귀며 간혹 산토끼나 꿩이 놀라서 달아나는 것이 보인다. 


 얼마쯤 가니 앞이 트이고 작은 평야가 나오며 농로, 수로 등을 따라 강경 쪽으로 걷다 백마강(금강)이라는 곳을 건너게 되었다. 그즈음은 가물고 산에 나무가 적어서인지 강인데도 비교적 수월하게 건너 남행은 계속되었다. 


 30~40리를 더 걸어 야산에 다다라 살펴보니 떡 벌어진 묘비 뒤에 수십 년 묵은 노송이 짙은 그늘을 내리고 서 있었다. 그 아래서 한여름 오후 꽃 더위를 피해 쉬며 밑을 내려다보니 조그마한 남향판 부락이 보인다. 부락 뒤에는 대나무 숲이 있고...


 당시 우리가 강경을 거쳐 가려고 했던 것은 이리, 장성, 광주 선상에 있었고 타이어 공장의 고객이었던 강씨가 우리보다 먼저 떠나면서 피난 가는 길에 들러 쉬어가라고 권해주었던 것이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꽃 더위가 지나고 우리는 다시 행장을 짊어지고 동네 뒤 대밭 쪽으로 걷기 시작했을 때 대창을 든 자위대가 나타나 우리를 부락으로 연행해갔다. 다시 증명검사를 당하고 짐이 뒤져졌다. 문제가 되었던 장씨의 사진과 칼을 발견하고는 우리는 패잔병이고 장씨는 거물 첩자라며 분출소(파출소)로 끌고 가 인계해 버렸다. 그곳이 바로 초촌면 분출소 였다. 지금은 이미 저세상으로 가버린 두 고인과 함께 잊고 싶은 고장으로 기억한다. 


 당시의 치안상황이란 전시의 혼란과 다를 바 없었다. 이승만 정부 법은 무효이고 그렇다고 공산 정부 법이 공정하게 적용되지도 않았다. 통신망도 전부 망가지고 도로의 요소요소도 끊겨버렸다. 그야말로 정당한 법은 없고 공산당의 말과 개인의 감정이 법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사형을 집행하는 절차조차 없었다.


 그들의 감정과 순간의 기분에 의해 사람의 생사가 좌지우지되던 실정이었다. 우리는 학생증을 제시했는데도 패잔병으로 간주하였고 장씨는 거물급 간첩으로 간주하여 특수 죄수수용소라 불리는 동굴에 수감되었다. 그날 하루는 수용소에서 자고 다음날 부여 내무서(경찰서)로 소환한단다. 처음 수용소라는 말을 들었을 땐 우산각이나 강당 같은 좋은 곳으로 착각했는데 막상 가서 보니 감옥이었다. 소가 끄는 달구지에 손이 묶인 채 나와 밀고죄로 체포된 구장, 형님과 공주경찰서 감찰과장을 둘씩 연결해 묶어 두었다.


 더운 여름 비포장도로를 달구지에 실려 한참을 가는데 나와 같이 묶인 밀고자(민주진영)가 소변 좀 보고가자 해 달구지에서 내려 논두렁에서 일을 보았다. 일을 보면서 밀고자는 옆에 호송하는 젊은이에게 반말로 유언 같은 부탁을 한다. “자네, 같은 동네 사람 아닌가. 자네가 공산주의자로 산에서 내려온 것을 내 직무상 보고했는데 나는 살기를 포기했네만 가서 내 자식들에게 어떤 형태든 밀고는 말라고 좀 전해주게.”


 이 분은 자신의 직무에 충실했을 뿐인데 중죄인이라니 세상이 바뀌며 같이 바뀐 운명이랄까 참으로 착잡한 심정이었다. 우리 죄수 일행은 부여가 내려다보이는 어느 정자나무 아래서 쉬게 되었다.


 때마침 참외장수가 바지게를 내려놓고 참외를 판다. 우리는 비상금으로 참외를 사서 거기 쉬고 있는 어르신들과 우리 일행들에게 주었다. 특히 어르신들은 고향에 계신 부모에게 마지막으로 대신 드린다는 생각이었는데 이것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부모님께 죄송했다.


 거기 어르신들 중 입담 좋은 듯한 노인이 ‘젊은이들은 어찌 이렇게 묶여가유’ 하신다. ‘서울서 학교에 다니다 배가 고파 고향에 가는 길에 이렇게 됐습니다.’ 딴 데서와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쯧쯧쯧, 시국탓이유. 시국탓’ 하며 안타까워하면서 말을 이으신다. ‘그럼 여기는 잘 모르겠지만...’하며 그 고장 이야기를 하신다. ‘저기 흘러가는 강이 백마강이고 저 바위산은 낙화암이여.’


 백제 멸망의 한이 되어 백마강에 몸을 던진 3천 궁녀의 고사가 전해온다. 자랑스러운 그 지조에 백제의 넋이 서려있는 듯했다. 


 형님은 어차피 죽을 것 내무 서에서 아무리 맞아도 끝까지 학생이라고 하자, 만약 딴말하면 엉뚱한 죄명으로 죽는다고 했다.


 드디어 부여 내무서 정문. 인민군 보초가 어깨에 따발총을 메고 한 손에는 대검을 들고 우리에게 차례차례 묻는다.


 “동무 어찌 왔어?” 공주경찰서 감찰과장이었다고 하자 대검으로 묶은 끈을 끊어버리며 “저쪽으로”


 “동무는?” “나는 학생인데 의심합니다.” “들어가.”


 “동무는?” “나는 밀고했다.” “저쪽으로”


 “동무는?” “학생입니다.” “들어가”


 이런 과정을 거치고 나는 감찰과 앞에서 신고요령을 연습하고 있는데 내무서 밖에서 총성이 들린다. 내다보니 같이 잡혀 온 그들이었다. 벌써 밭 언덕에서 처형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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