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ngrokim
노스욕 거주,본보 주최 제1회 정원&텃밭 컨테스트 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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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6.25 회상(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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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 이어)

 

1차 피난(1)


 우리는 더 이상은 여기에 머물 수 없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영헌이는 아직 어려서 노약자, 소년 등을 동원하는 노력동원에는 나가지만 징집연령이 아니었기 때문에 집에 남기로 하고 형님과 나는 자정만 지나면 고향 무만동까지 걸어가기로 하고 준비에 들어갔다. 당시 혼자 남을 영헌이가 안타까웠지만 당장 발등에 떨어진 현실은 어쩔 수가 없었고 지금도 미안한 마음 뿐이다. 학생증, 성적표, 최근 사진과 영어사전, 간단한 옷가지를 챙겨 감시가 뜸한 틈을 노려 뒷길만을 골라 마포나루에 다다랐다.

 

 조심히 다가가 살펴보자 새우젖 배 몇 척이 보였지만 이를 인민군이 지키고 있었다. 할 수 없이 나루를 포기하고 바로 위쪽에 있는 당인리 화력발전소 쪽으로 올라가 수면 폭이 좁은 곳을 택해 한 손으론 짐이 젖지 않도록 들고 한 손으로만 수영하여 무사히 건너편 모래밭에 닿을 수 있었다. 당시 이 섬 일대에는 땅콩을 재배하고 있었고 후에 미군 경비행장(K-16)으로 쓰이다 비행장이 성남으로 이동하고 오늘날의 여의도로 변하였다. 


 간밤의 긴장으로 피곤하고 졸린 우리는 동이 트기 시작하는 땅콩밭 두덕에서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는지 모르지만, 눈을 떠보니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일단 단속이 심한 서울을 벗어나 영등포 쪽 국도를 택해 걷기 시작하면서 여기저기에서 모여드는 엄청난 수의 피난민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추측건대 서울에서 버티다 먹을 것은 없고 동원과 징집이 심해져 가자 우리처럼 피난을 가는 것이리라. 이 피난 대열에 합류하여 시흥에 와서 아는 사람 집에 들러 점심을 얻어먹었다.


 수차례 비행기 폭격과 기총소사를 받으며 안양, 군포를 지나 부곡에 도착하니 해가 넘어간다. 무리해서 더 걸어 밤이 이슥해질 때쯤에 서야 수원에 도착했다. 더 이상은 무리라는 생각에 잘 곳을 찾아 농가로 보이는 집에 들어가 마당에서 자게 해달라자 피난민이 많아서 안 된다고 거절을 했다. 하는 수없이 밖에 나와 아무 담벼락 밑에서 자게 되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그것은 농가의 변소였다. 두 사람 다 양말을 신기 전 발바닥에 비누칠을 칠하고 다시 출발, 국도에 들어서는 순간 절뚝거리며 걷고 있는 아는 사람과 만났다. 6.25전 우리 집에 종종 들렀던 벌교 시내의 장재동 씨였다.


 그의 발은 벌써 발바닥에 잡힌 물집이 터져 뻘건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간의 행적을 몰랐지만, 그는 전남 보성 득량 발전소의 소장 발령 증을 갖고 내려가니 학생증밖에 지닌 것이 없는 우리들의 증명문제가 해결될 거라며 짐을 한데 모아 리어카에 싣고 자신은 그냥 걷고 우리는 앞뒤에서 리어카를 끌고 가자고 제안했다.
 사실 전시인 그때의 상황으로 신분증명은 안전하게 집에까지 갈 수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하는 중요한 사항이었다. 그의 제의네 솔깃한 우리는 그와 함께 밀고 당기며 하행을 계속했다. 가는 도중에도 몇 번씩이나 비행기를 피해 숲 속에 숨어들었다 조용해지면 다시 길을 가는 고된 여정이 이어지며 태안을 지나 오산까지 오는데 꼬박 하루를 소비했다.


 
 둘째 날은 여의도에서 수원까지 근 90리 길을 걸었는데 셋째 날을 50리도 채 걷지를 못했으면서도 고되기는 배나 되어 허탈했다. 그날은 계곡에서 자고 다음날 우리가 따로 가겠다고 말하자 자신도 할 수 없다며 세 사람이 각각 자기 짐을 지고 걷기 시작했는데 발바닥이 부어터진 그로 인해 여전히 더딘 여정이 되었다. 송탄을 지나 평택에 들어서니 국도는 비행기 폭격이 잦고 인민군의 증명검사가 심해 지방도로를 따라 걷다가 둔포의 어느 실개천 언덕에서 네 번째 저녁을 맞이했다. 고단한 와중에 보았던  그날의 석양은 전혀 아름답지 않고 그저 칙칙하고 덥게만 느껴졌다.


 피곤하고 배가 고파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동안 씻지를 못해 자잘한 소금투성이인 몸을 이끌고 개천에서 목욕을 하고 나오니 밥 생각이 간절해지는데 멀리에 농가가 보였다. 몇 집을 돌며 구걸을 해봤지만 이미 끼니때는 지나갔고 하루에도 몇 사람씩이나 찾아드니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할 수 없이 그냥 자고 내일 아침이나 얻어먹자고 체념하고 자려고 했지만 세 사람 다 너무 배가 고차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견디다 못해 내가 농가 처마 밑에 걸린 삶은 보리를 바구니에 훔쳐와 먹고 남은 것은 수건에 싸서 새벽 일찍이 그곳을 떠났다.


 변함없이 인민군은 국도를 점령하고 있었고 지방도로는 부락단위로 자위대가 대창을 꼬나 들고 지나는 사람들의 증명조사를 한다며 시시콜콜하게 따지는 게 지나치게 감정적이어서 인민군보다 더 심했다. 피난길을 떠난 이후 제대로 씻지도 못한 채 긴장의 연속이었던 우리 일행들의 몸에는 전신으로 마치 두드러기라도 난 것같이 오돌톨하게 부어올라 걷는 내내 끊임없이 긁어야 할 정도로 가려웠다. 계속되는 야숙으로 모기, 진드기, 개미 등 기타 곤충들에게도 물어뜯긴 탓이었다.


 그때까지도 지방도로를 따라 걸으면서 ‘어떻게 하면 고생을 덜 하고 하루라도 빨리 집에까지 가느냐’ 하는 것을 의논했다. 그래서 내려진 결론은 역시 지방도로 쪽이었다. 국도는 일직선으로 뻗어있어 걷기도 편하고 빠르지만 잦은 검색으로 인한 징집의 위험과 빈번한 미국의 폭격으로 생명의 위협이 컸기에 포기해야 했다. 당시의 지방도로는 오늘날의 고속도로와 같은 개념이 아니고 취락이나 마을들, 소읍, 면 등을 연결하는 생활도로였다. 도로 자체도 구불구불하게 사람들이 사는 곳을 따라 나 있었다.


 그래서 지방도로도 포기하고 질러갈 수만 있다면 재를 넘고 냇물도 건너고 농로, 오솔길, 솔밭길, 고갯길, 시냇물을 따라난 비탈길 등 필요에 따라선 수풀을 헤치고라도 무조건 빨리 갈 수만 있는 길을 택했는데 그럴 때에는 그 지역 사람들에게 묻고 또 물어 확인하는 것이 필수였다. 잘못하면 엉뚱한 방향으로 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재 지나는 곳이 어디인지도 모른 채 그저 부여, 강경으로 가는 지름길만을 묻고 확인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수양버들이 몇 그루 있는 언덕인 천안 삼거리를 지났다. 온양과 현충사, 도고를 지나 산중으로 들어섰다. 한참 솔밭길을 걸어가는데 어느덧 소나무 그림자가 길쭉길쭉 늘어지고 귀뚜라미 소리가 요란해지며 해가 지려 한다. 빨리 민가를 찾아 밥을 얻어먹고 자야겠다는 생각으로 시냇물이 흐르는 비탈진 계곡을 따라 내려갔다. 


 얼마쯤 내려가니 앞이 트이면서 밭이 보였다. 조금 더 내려가니 한 농부가 참외를 바지게에 채우고 있는 것을 보고 반가워 다가가니 그가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서 여차하면 덤벼들 태세였다. 알고 보니 우리를 이승만의 패잔병이나 스파이로 오인한 것이다. 남루한 옷차림에 피로한 몰골로 헐떡이는 우리에게 무뚝뚝하게 목이나 축이라며 참외를 하나씩 내민다. 마치 삼국지에 나오는 장비를 연상시키는 이 거한은 키가 거의 6척은 되는 듯 컸고 얼굴도 우악스러워 보였다. 


 우리가 목이 말라 정신없이 먹고 있으니 말없이 우리의 기색을 살피던 산사나이가 “가유, 우리 집에 가서 저녁이나 나누어 먹어유” 한다. 그의 말을 듣는 순간 ‘아- 우리가 충청도에 들어섰구나’ 하고 위치를 알게 되었다. 


 수원에서는 집에 들어서는 사람들을 밀어냈는데 여기서는 밖의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인적이 드물어 그런지 인심이 좋아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다. 산기슭 외딴집에서 보리밥에 된장찌개를 먹이고는 빨리 가라는 것이다. 벌써 밤중인데 우리는 서울 학생이고 먹을 것이 없어 고향에 간다며 염려 말라고 안심을 시켰다. 얼마쯤 지나자 부락자위대가 대창을 가지고 순찰을 왔다가 우리 일행을 보고 깜짝 놀란다. 먼저 증명을 보고 짐을 뒤지기 시작한다. 우리의 짐이래야 그전 수십 번과 같이 별문제가 없었다.


 매번 문제가 되는 것은 일제시대 만주에서 헌병으로 근무했던 장 씨의 완벽한 헌병 복장의 사진과 그때 썼다는 단도였다. 이것들이 또 문제가 되었지만 장 씨는 자신이 공산당원으로 서울에서 보성 득량발전소 소장으로 발령받아 내려간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들은 의심하면서도 뒤탈이 있을까 싶어서인지 그정도로 물러났다. 그들이 간 다음에도 장 씨는 아내가 벌교에서 인민 여성동맹위원장이라며 호언장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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