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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스욕 거주,본보 주최 제1회 정원&텃밭 컨테스트 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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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6.25 회상(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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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기억은 아니지만, 종종 되살아나서 회상해본다. 6.25 전쟁에 대해서. 지금 70세 이하는 정사(正史)의 몇 장을 읽는 데 만족해야 할 것이다. 당시 기억력이 왕성한 17세 중학(6년제)생으로 역사의 현장에서 참담한 경험을 했다. 1950년 6월 25일부터 미군 개입에 이어 중공군 개입까지 6개월간 실제 경험자로서 사실(史實)을 사심 없이 기록함으로써 당시 실상의 일면을 알리고 싶다.

 

1.전쟁 발발


 3학년이 되고 학급이 새롭게 편성되고 반장으로 임명되었다. 1950년 6월 25일 아침, 긴급 뉴스라며 ‘북한 공산괴뢰군이 새벽에 38선을 넘어 쳐내려 오고 있다.’ 고 HLKA 서울 중앙 라디오 방송이 시시각각으로 반복해서 긴장한 목소리로 보도했다. 하지만 ‘안심하라.’ 곧 반격해서 격퇴하겠다는 정부의 호언에 안심하고 등교를 했는데 2교시가 끝나니 담임선생님께서 오늘은 그만 집으로 돌아가고 학교에서 통지할 때까지 기다리라며 수업을 중단했다.


 이렇게 해서 전쟁은 행복했던 내 중학 시절을 앗아갔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당시 서울사대에 다니던 형님과 중학교 2학년생인 동생 영헌이도 나와 비슷한 과정을 거쳐 학교가 중단되고 큰형님 공장도 혼란 속에 근무자들을 일찍 보내고 문을 걸었다. 


 긴장과 혼란 중에도 육군참모총장 채병덕 소장이 ‘아침은 서울에서 먹고 점심은 평양에서 먹은 다음 계속 진격하여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겠다.’하고 호언장담을 했다는데 막상 분위기는 살벌하고 전황은 정반대로 전개되고 있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당시 우리 군은 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변변한 저항도 받지 않고 파죽지세로 동두천과 의정부를 점령하고 서울로 진격했다는 전황을 듣게 되었다. 설마 서울까지야 하며 여유를 가지고 있던 서울 시민들은 우왕좌왕 두려움을 자제하지 못하고 극심한 혼란 중에 각자 살길을  찾았지만 갑작스러운 사태에 뾰족한 수가 있을 리가 없었다.


 
 우리 가족은 큰형님을 비롯해 만삭인 형수 님, 이웃 주민들과 함께 동아일보사 옆을 흐르는 청계천의 복개된 맨홀을 열고 깜깜한 바닥으로 내려가 쪼그리고 앉아 밖의 동정에 귀를 기울였다. 두어 시간이 지났을까… 중앙청 쪽에서 인민군 선발대의 탱크 구르는 소리를 시작으로 광화문을 지나 시청 쪽으로 수십 대가 따발총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것 같았다. 이때가 1950년 6월 28일 새벽, 인민군은 계속 입성하여 서울을 함락했다. 얼마 후 따발총 소리가 멈추고 인민군 행정요원들이 마이크로 ‘다 나와서 정상생활을 해라.’고 낯선 이북 말투로 외쳐댄다. 밖으로 나오자 자유 대한민국은 사라지고 공산 인민공화국 세상이 되어 있었다. 

 

 미국을 비롯한 유엔군이 개입하기 전의 한국군은 연일 쫓기다 후퇴할 힘이 없을 정도로 약한 군대였다고 했다. 인민공화국 하에서 날마다 세뇌교육과 노력 동원 등으로 끌려가 시달리던 중 큰형님은 만삭의 형수 님을 자전거 뒤에 싣고 청주 처가로 내려가시고 며칠이 지나자 우리 셋은 배가 고파 이젠 사상이고 학습이고 다 싫었다. 종이봉투로 사다 먹던 쌀이 떨어졌으나 양곡 가게는 간판까지 떼어버렸다. 양곡 반입까지 끊겼으니 이제는 모든 시민이 굶주림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특히 서울에서 하숙하며 공부하던 지방의 유지 갑부들의 자식들은 전부 하숙집에서 쫓겨나 거리를 헤매었다. 호화롭게 자라 아무런 사회 저항력이 없는 이들이 우선은 배가 고프니까 공산당 측에 부역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때 작은 형님의 친구로 광주에서 잘 나가는 집안의 맏아들이라는 이가 찾아왔다. 김씨 성을 가진 이였는데 며칠이나 굶었는지 눈이 쑥 들어가고 허리가 휘어져 곧 쓰러질 듯 휘청거리며 형님에게 밥 좀 달란다. 우리 역시 굶고 있는 처지에 밥이 있을 리가 없고 쌀도 없으니 딱했다. 결국, 기운이 파하여 우리 방에 누워버리고 만다.


 보다못해 내가 보관하고 있던 학급 교과서 대금이 있으니 그것의 일부라도 주자고 형님에게 제의하자 어느새 그 말을 들은 것인지 그것 다 빌려주면 곧 집에서 가져다 갚겠단다. 실제론 전시라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형님의 동의하에 다 주었다. 그러나 그 후 2주가 되어도 갚기는커녕 소식도 없다가 얼마후에 벽초 홍명의의 임꺽정 전 6권을 주며 일어보라기에 아주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다. 그 후 그는 인민군으로 전투 중 전사했거나 이북으로 끌려갔는지 아무런 소식도 들을 수 없었다.


 
 배를 곯는 중에도 세뇌교육과 노력동원은 계속되었다. 굶다 굶다 못해 형님과 나는 남대문 시장에서 산 생활필수품과 우리들의 옷가지를 들고 당시 국내 최대의 염전인 인천 주안에 가서 소금과 바꾸어 짊어지고 부천 소사 시흥동 농가를 들며 곡식과 바꾸어 왔다. 어떤 때는 소금이 너무 무거워 생활필수품만 가지고 서대문에서 영천고개를 넘어 홍재동 화장터를 지나 녹번동, 불광동, 모래내, 수색 등을 돌며 곡식과 교환해 근근이 연명했다. 어떤 노부부는 우리의 행색을 얼른 알아차리고 시국을 잘못 만나 고생한다며 덤으로 몇 되씩 더 주곤 했는데 이럴 때면 고향의 부모님 생각이 나 눈물이 핑 돌았다.


 이런 혼란상태는 7월 중순에 이르러 한층 더 악화하였다. 미국이 전쟁에 개입하면서 점차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그나마 점령 초기의 선심 정치는 사라지고 강압 정치로 돌아서며 시민들을 괴롭혔다. 주위의 고향 사람들은 더는 버틸 수 없으니 앉아 죽으나 가다 죽으나 마찬가지라며 고향으로 피난을 가겠다며 하나하나 사라졌다. 이 와중에 우리에게도 중대한 일이 벌어졌다.


 서울시내 중학, 대학 전부 학교별로 궐기대회가 있으니 모이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별 의심 없이 학교로 갔다. 교문을 들어서자 궐기대회고 뭐고 없이 무조건 의용군 지원서를 쓰라는 것이다. 나는 나이도 어리고 해서 못 쓰겠다고 하니 ‘이렇게 큰 키에 건강한데 무슨 아이 탓을 해!’ 하며 강요해도 거절하고 화학실로 집어넣어 버린다. 그 속에는 200여 명 정도가 초조하게 앉아있었다. 나는 바로 입구에 서   있었는데 평소 잘 알고 있는 6학년 야구선수가 완장을 차고 들어선다. 나는 바로 입구에 서있었는데 평소 잘 알고 있는 6학년 야구선수가 완장을 차고 들어선다. 반가워서 얼른 다가가 “김 선배님, 나 좀 빼주시오.” 하니 “나도 먹고 살기 어려워 완장을 차게 되었는데 무슨 힘이 있겠냐”며 기다려 보라는 말만 하고 나갔다. 


 그 뒤로 두어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20~30명이 더 들어왔고 모두 극한상황에 겁이 질려있었다. 누군가가 말하는 대로 ‘화학실 문을 잠그고 독가스를 넣어 몰살시킬 지도 모른다.’며 초조해 하고 있는데 김 선배가 돌아왔다. 12시부터 시가행진이 있는데 ‘네가 키가 크고 건장하니 스탈린 초상화를 들고 맨 앞에 서면 의용군 자원서를 면제하겠다’고 하니 응하는 수밖에 없었다. 


 기다란 작대기 맨 위에 별로 크지 않은 스탈린의 초상화를 붙들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뒤로는 모르토프(당시 소련 외상)과 비신 스키(내상), 베리아(KGB 수장), 김일성의 순으로 초상화가 따르고 그 뒤로 학생들이 따랐다.


 학교에서 출발한 시가행진은 대법원 덕수궁 돌담길 대한문에서 남대문을 거쳐 을지로, 서울운동장을 지나 동대문에서 돌아 종로 화신, 광화문에서 다시 돌아 유서 깊은 수송국민학교(현 종로구청)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이미 여기저기에서 동원된 수천의 학생들이 플래카드를 들고 공산 구호를 외치며 스크럼을 짜 날뛰고 있었다. 


 더욱이 더 무서웠던 것은 이곳에서는 지원서도 뭐도 필요없이 차례로 강당으로 들어가 간단한 신체검사를 받게 했다. 신체검사에 합격을 하게 되면 인민군복을 입고 대기 중인 트럭에 실려 당시의 최전선이었던 대전 남쪽 추풍령 근처로 간다고 했다. 나 역시 신체검사를 위해 강당에 들어가 팬티 바람으로 줄에 앉아있는데 들어갔던 사람이 다시 나오는 것을 보았다. ‘왜 그냥 나오느냐’고 묻자 ‘폐병이 있어 불합격’이란다.


 그래서 검사장에는 들어가지도 않고 밖으로 나오니 인민군 경비병이 왜 나오느냐고 묻는다. 폐병이 있다고 대답해주자 가라고 해서 구사일생으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집에 도착하니 비슷한 과정을 거쳐 도망 나오신 작은 형님이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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