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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전쟁 배경 영화 시리즈(I)-'러브 미 텐더’(Love Me Tender)(4·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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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 이어)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배우가 캐시 역의 데브라 파젯(Debra Paget·89)이다. 본명 데브라리 그리핀(Debralee Griffin). 그녀는 세실 B. 데밀 감독의 '십계(The Ten Commandments, 1956)'에서 여호수아의 연인 릴리아 역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미국 콜로라도 덴버 출신 배우.

 

 특히 오스트리아 비엔나 출신인 프리츠 랑(Fritz Lang, 1890~1976) 감독의 오리엔탈 연작 '뱅갈의 호랑이' 후편인 '인도의 무덤(The Indian Tomb, 1959; 국내에서는 1960년 '왕성의 비밀'로 개봉)'에서 파격적인 의상으로 마법에 걸려 '뱀의 춤(snake dance)'를 추는 장면은 지금 봐도 뇌쇄적인 관능미를 풍긴다.

 

 영화 속에 엘비스의 노래가 4곡 나온다. 마을 학교 건축자금 마련을 위한 바자회의 무대에서 아직은 서부 시대인 19세기의 배경과 사뭇 어울리지 않는 헤어스타일로 경쾌한 'Let Me'와 'Poor Boy' 두 곡을 '게다리 춤'과 함께 신나게 열창하는데, 고증이고 뭐고 '뜨는 별' 앞에서는 나무랄 수가 없다?!…

 

 그리고 가족들과 함께 즐기는 저녁 시간에 'We're Gonna Move'와 'Love Me Tender' 등 두 곡을 부른다. 특히 '러브 미 텐더'를 부를 땐 캐시에 대한 옛사랑이 되살아나 괴로운 듯 리처드 이건은 중간에 자리를 뜬다. 이 곡은 영화 시작부터 전편에 걸쳐 변주되면서 흐른다.

 

 사실 이 영화는 워낙 플로트가 탄탄하여 굳이 엘비스의 노래가 없더라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지만 헐리우드의 상업주의가 그 좋은 '황금알'을 놓칠 리가 있었겠는가.

 

 엘비스는 1954년에 데뷔하여 1956년 1월, RCA에서 발매한 첫 싱글 '하트브레이크 호텔'이 빌보드 싱글 차트 1위를 하며 히트를 친 이래 총 18곡의 빌보트 넘버원 히트 싱글 기록을 남겼다.

 

 21세 때인 1956년 11월에 로버트 D. 웹 감독의 '러브 미 텐더'에 데뷔한 이후, 1969년까지 대부분 뮤지컬이거나 노래를 중요한 소재로 삼은 31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엘비스가 음반과 방송 및 영화 등 연예계 삼국(?)을 통일하는 계기를 만들어 준 것은 그의 매니저로 별명이 '대령(Colonel)'인 톰 파커(Tom Parker, 1909~1997)였다. 당시 20세기 폭스사와 RCA 레코드사는 각본보다 엘비스의 노래가 더 중요한 요소라고 판단하여 첫 출연한 그에게 10만 달러를 지급하고, 원래 '리노 형제들(The Reno Brothers)'이라는 제목을 졸지에 '러브 미 텐더'로 바꿨다.

 

 그후 로큰롤, 가스펠, 록, 펑크, 팝 발라드, 컨트리, 블루스 등의 장르에 관계없이 이례적인 상업적 성공을 거두며 인기를 얻었고, TV 출연과 차트를 휩쓸었다. 특히 로큰롤을 새로운 인기있는 장르로 유행시켰다.

 

 1969년 8월에 발매한 싱글 'Suspicious Minds'는 엘비스의 마지막 18번째 빌보드 넘버원 싱글곡이었다. 그러나 1977년 향년 42세의 나이에 약물중독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엘비스 프레슬리가 사후 4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높이 평가받는 이유는 1950년대의 스탠더드 팝에서 탈피하여 로큰롤(Rock and Roll)을 '청춘의 음악적 장르'로 대중화하여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구세대와 베이비붐 신세대 간의 갭을 이어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는 공로 때문이다.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1935~1977)가 태어난 미국 미시시피 주의 투펄로에는 생가가 복원돼 있으며, 13살 때 이사 간 테네시 주 멤피스에는 '그레이스랜드 박물관'이 건립되어 매년 65만 명의 방문객이 백악관 다음으로 많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엘비스는 노르웨이 출신 프리실라 보리외(Priscilla Beaulieu·77)와 32살 때인 1967년에 결혼하여 5년 만에 파경을 맞았다. 둘 사이에 난 외동딸인 리사 마리 프레슬리(54)는 네 번 결혼했는데, 두 번째 배우자(1994-1996)가 마이클 잭슨(1958~2009), 세 번째(2002-2004)가 니콜라스 케이지(58)였다. 그녀와 모친 프리실라는 현재 그레이스랜드 및 그 부속자산의 소유주이다.

 

 프리실라는 엘비스의 사망 이후 재혼은 안 했지만 훌리오 이글레샤스, 리처드 기어, 톰 존스 등 숱한 연예인들과 염문을 뿌렸다. 그녀는 CBS TV드라마 '댈러스'에서 제나 웨이드 역으로 장기간 출연하기도 했다.

 

 이 영화의 음악감독은 마릴린 먼로, 로버트 미첨 주연의 '돌아오지 않는 강(River of No Return, 1954)'으로 잘 알려진 라이오넬 뉴먼(Lionel Newman, 1916~1989). 그의 친형이 200편이 넘는 영화 음악을 작곡, 아카데미 음악상 후보에 43번이나 올라 '베르나데트의 노래(1943)' '모정(1955)' '왕과 나(1956)' '카멜롯(1967)' 등으로 아홉 번 수상했던 앨프리드 뉴먼(Alfred Newman, 1900~1970)이다.

 

 러시아계 유대인인 앨프리드 뉴먼의 형제들과 자녀들은 대부분 음악계에서 활동하며 두각을 나타내고 있어 '뉴먼 왕조(Newman Dynasty)'로 불린다.

 

 아무튼 엘비스의 데뷔작인 영화 '러브 미 텐더'에서 나른한 듯 부드럽고 달콤한 창법으로 부른 그의 노래는 1956년 11월 개봉 전에 주문이 쇄도하여 궁극에는 2백만 장이 팔리는 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졌다. 그리고 불과 두 달 개봉뿐이었는데도 불구하고 56년도 말까지의 최고 흥행 순위에서 23위를 차지했다.

 

 엘비스의 21살 때의 앳된 모습과 막 인기가 치솟던 무렵의 그의 춤과 노래를 보고 들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러브 미 텐더'는 우리에게 퍽 소중한 작품이다. 통기타 반주에 따라부르기 쉬운 단순한 곡이지만 이 곡은 1950년대를 뛰어넘어 지금도 언제 어디서 듣더라도 감미로운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최고의 '러브송' 중 하나로 우리 곁에 살아있다.

 

 덧붙이기: 영화 '러브 미 텐더'의 첫 장면에서 스티븐 포스터(Stephen Collins Foster, 1826∼1864) 작곡의 가곡 '금발의 지니(Jeanie with the Light Brown Hair·1854)'가 하모니카 연주로 나오는데, 이는 '러브 미 텐더'의 원곡으로 일명 '금발의 소녀(Maid with Golden Hair)'로 불리는 '오라 리(Aura Lea)'라는 노래와 연관 지은 의도적인 삽입이 아닌가 싶다.

 

 이 곡은 조지 R. 풀턴(George R. Poulton, 1828~1867) 작곡, 윌리엄 W. 포스딕(William W. Fosdick, 1825~1862) 작사로 남북전쟁 때 남군에 의해 불려지던 노래다. 내용은 연인을 전쟁터에 보낸 여인 '오라 리'가 4계절이 바뀌어도 돌아오지 않는 사랑하는 님을 그리는 애절한 노래이다. (끝)

 


▲ 클린트는 마지막으로 맏형 밴스에게 용서를 구하고 캐시의 품에서 죽는다. 엘비스가 영화 속에서 죽는 장면은 '러브 미 텐더'가 유일하다.
 


▲ 마을 바자회 무대에서 경쾌한 'Let Me'와 'Poor Boy' 두 곡을 '게다리 춤'과 함께 신나게 열창하는 클린트(엘비스 프레슬리). 아직 서부시대인 19세기의 배경에서 그의 헤어스타일이나 춤은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것도 어쩔 수 없다.
 


▲ 영화 전반부에 저녁식사 후 가족과 함께 즐기는 시간에 통기타를 치며 'We're Gonna Move'를 부르는 클린트(엘비스 프레슬리).
 


▲ 이어서 이 영화의 주제곡이자 타이틀인 'Love Me Tender'를 감미롭게 부르는 클린트(엘비스 프레슬리). 이때 맏형 밴스는 캐시에 대한 옛사랑이 되살아나 괴로운 듯 중간에 자리를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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