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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 배경영화 (I)-'디어 헌터'와 '카바티나'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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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가 미국이 1975년 월남전의 종식을 공식 선언한 지 45주년이 됩니다. 따라서 전쟁영화 시리즈 중 베트남 전쟁 배경 영화 3편을 엄선하여 연재하고자 하오니 많은 사랑과 성원 바랍니다. <필자 주>

 

 들어가기 전에 잠깐 베트남 전쟁에 대한 개요를 살펴보고 가는 게 좋겠다. 베트남은 1883년 이래로 캄보디아, 라오스를 포함하여 프랑스의 식민지배에 놓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라고 불리었다. 무릇 식민 정책의 본질은 식민지국을 착취하는 것이며 경제수탈을 위해 본국에서 식민지로 오는 관리들의 수준이란 뻔한 것이었기에 문명의 전파, 교화 등의 명분으로 군대를 앞세워 혹독하게 억압하는 일을 서슴지 않는 것이다.

 

 베트남은 1954년부터 1979년 사이에 세 번의 전쟁을 치렀는데, 1954년 프랑스와 벌인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1964년 미국 등 연합국과 싸운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 1979년 중국과 싸운 제3차 인도차이나 전쟁 등 강대국과의 전쟁에서 모두 승리를 거둔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프랑스 본토가 독일군에게 점령 당하자 베트남은 이제 일본군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일본은 독일의 패전이 가까워지자 1945년 3월9일 명호작전(明?作戰, Operation Bright Moon 또는 3·9 쿠데타)으로 인도차이나 지역의 비시(Vichy)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응우옌(茹阮) 왕조의 마지막 황제였던 바오다이(保大, 1913~1997)를 내세워 인도차이나 반도 전역을 묶어 괴뢰국인 베트남 제국(1945년 3월11일~8월23일)을 성립, 베트남의 독립을 지지하는 척했다. 이는 마치 중국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를 꼭두각시로 내세워 만주국(1932~1945)을 세운 것과 수법이 같은 것이다.

 

 이때 프랑스와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사상을 배우고 온 민족 지도자 호찌민(胡志明, 1890~1969)은 후일 베트남 통일을 달성하는 베트남독립동맹(越南獨立同盟), 즉 월맹(비엣민, Viet Minh)이라는 통일전선을 결성하였다. 당시 이들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 일본군과 싸우게 된다.

 

 1945년 8월15일 일제가 패망하자 호찌민은 기민하게 행동하여 다음날인 8월16일 전국 국민회의를 주최해 주석으로 선출되고, 이어 8월25일 임시정부를 수립, 9월2일 자신이 쓴 독립선언문을 발표하여 '베트남 민주공화국'을 선포했다. 이때 호찌민은 자신이 세운 공산주의 국가인 베트남을 미국 정부가 계속 지지해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2차대전이 끝난 이후 베트남 북부에는 중국 국민당 군대가 진주하고 남부에는 영국군이 주둔하였다. 뒤이어 과거의 압제자 프랑스 군대가 다시 남부에 들어오고 각 지방의 행정기관을 점령했다. 이에 사이공(현재 호찌민 시) 시민들이 봉기를 일으켰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사이공시의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프랑스 본국의 군인이 상륙하면서 시작되었다. 사이공 시에서 시민들이 무차별 학살되는 것을 목격한 베트남인들은 곧 게릴라전을 통해 프랑스군과 전면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자본과 무기 등에서 뒤진 베트남 게릴라들이 엄청난 열세에 놓였지만 제국주의에 반감을 가진 시민들과 농민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지형·지세에 뛰어난 전략과 게릴라 전술을 통해 소총과 권총만 갖고서도 전차, 장갑차, 대포 등을 동원한 프랑스군을 제압하여 전세를 역전시키기 시작했다.

 

 1953년 총반격을 개시한 베트남군은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거의 궤멸시켰고, 그 해 제네바에서 휴전 협정을 맺으면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끝났다.

 그 후 프랑스는 제네바 휴전 협정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군대만 철수시켰으며 이로 인해 베트남 전국에서 실시하기로 했던 총선거가 결국 이뤄지지 못하게 되었다.

 

 이 때를 틈타 미국이 반공(反共)을 명분으로 남부 베트남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1955년 남베트남에 부정선거를 통해 친미 정부를 세웠다. 남베트남 정부의 부패가 계속되고 정부가 가톨릭 교도들로 구성된 테러조직을 만들어 불교를 탄압하는 등 종교, 인권탄압이 심각해지면서 혁명세력은 1960년 12월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National Liberation Front, NLF)을 결성하고 무기를 사방에 은닉해 뒀다가 분노한 시민들과 함께 전면적인 무장투쟁에 나섰다.

 

 호찌민을 지지하는 NLF가 남베트남의 대부분을 점령하게 됨에 따라 베트남 전역이 공산화될 것을 염려한 미국은 북베트남을 침공할 구실을 만들기 위해 1964년 8월4일에 통킹만 사건(Gulf of Tonkin Incident)을 일으켰다. 이는 북베트남 밖 공해를 순찰하던 미국의 구축함이 북베트남 어뢰정의 공격을 받은 사건을 말한다.

 

 미국은 이 사건을 구실로 의회의 인준을 받아 미군 주둔 병력을 증가시키면서 동시에 비밀 군사작전을 통해 북베트남 지역을 공격하기 시작하였으니 이것이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 즉 널리 알려진 베트남 전쟁이다.

 

 제3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1979년 2~3월에 벌어진 중국-베트남 전쟁을 말한다. 1978년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하여 크메르 루주(Khmers Rouges)를 몰아내고 권력을 장악하였는데,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한 것은 베트남인들에 대한 크메르 루주의 박해와 인종 청소 때문이었다. 그러자 크메르 루주는 중국과 정치적인 동맹 관계를 맺게 되어 1979년 중국 정부는 베트남에 대한 침공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중국은 베트남에서 40km를 진군하여 3월6일 랑송을 점령했지만 이내 철군을 함으로써 전투는 격렬하면서도 짧게 끝나고 말았다.

 1975년 미국이 월남전의 종전을 공식 선언한 후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배경으로 가장 먼저 제작된 영화가 1978년 마이클 치미노 감독의 '디어 헌터(The Deer Hunter)'였다.

 

그 이후에, 1979년 프란시스 코폴라 감독의 '지옥의 묵시록(Apocalypse Now)', 1982년 실베스터 스탤론 주연의 '람보(Rambo: First Blood)', 1986년 올리버 스톤 감독의 '플래툰', 1987년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풀 메탈 재킷' 그리고 존 어빈 감독의 '햄버거 힐', 1989년 올리버 스톤의 '7월4일 생', 1994년 로버트 제메키스 감독의 '포레스트 검프'에 이르기까지 베트남 전쟁을 소재로 한 다양한 영화가 수없이 쏟아져 나왔다. (다음 호에 계속)
 


▲ '디어 헌터(The Deer Hunter·1978)' 영화포스터
 

▲ 신부가 던진 부케를 받은 린다(메릴 스트립)는 닉(크리스토퍼 월켄)이 청혼하자 승락하는데…
 

▲ 왼쪽부터 닉(크리스토퍼 월켄), 마이크(로버트 드 니로)와 새 신랑 스티븐(존 새비지)이 피로연 겸 송별회를 즐기고 있다.
 

▲ 제철소에 다니며 주말엔 사슴사냥을 하면서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죽마고우들이 다소 객기 어린 심정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가하여 예기치 않은 비운의 주인공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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