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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음악가 시리즈(II)-‘바람의 신부’(Bride of the Wind)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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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말러와 그의 아내 
알마의 생애를 그린 작품 

 

 

 

 

 

 (지난 호에 이어)
 그러나 알마는 1년여 동안 폰 쳄린스키의 애간장만 태우게 만들고는 1902년 3월9일 22살에 비엔나 궁정 오페라극장(현 국립오페라극장)의 지휘자이자 음악감독이었던 41세의 구스타프 말러와 전격 결혼하여 알마 쉰들러 이름이 알마 말러로 바뀐다. 알마는 말러가 사망하기까지 9년간 그의 음악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여인이 되었다. 

 

 

 

 

 


 알마는 결혼 후 남편을 헌신적으로 보살폈지만 자신의 뜻과 맞지 않는 결혼생활에 점차 염증을 느끼게 된다. 알마는 자유분방한 여자이면서 문학, 음악과 회화에 조예가 깊은 지성인이었지만 말러는 경쟁하는 동료 작곡가가 아닌 애 낳고 잘 키우고 남편에게 완전 복종하는 현모양처가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07년 7월 다섯 살 된 첫딸 마리아와 세 살배기 둘째 딸 안나가 각각 디프테리아와 성홍열에 걸려, 안나는 회복했지만 마리아가 죽자 이 부부는 큰 충격을 받았다. [註: 안나 말러(Anna Mahler, 1904~1988)는 표정이 강한 눈 때문에 별명이 'Gucki' 였는데, 오스트리아의 유명조각가가 되었고,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의 남성 편력을 보면서 자라서였든지 생애에 5번 결혼하여 적어도 횟수에 있어서는 어머니 알마를 능가했다.] 


 이 때 말러는 반 유태주의자들의 끊임없는 차별에 싫증을 느끼고 비엔나 궁정오페라 감독직을 사임했을 뿐만 아니라 선천성 심장병을 진단 받는 등 그에게는 최악의 한 해가 되었다. 


 사실 말러는 1897년, 37세 때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음악적 지위인 비엔나 궁정오페라 감독직을 제안 받았다. 그 자리는 '황실' 지위였고, 당시 법에 의하면 유태인은 맡을 수 없었기 때문에 독실한 유태교인이 전혀 아니었던 말러는 로마 가톨릭으로 쉽게 개종했다. 


 개종하기 전 말러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삼중으로 고향이 없다. 오스트리아 안에서는 보헤미아인으로, 독일에서는 오스트리아인으로, 세계 안에서는 유태인으로서, 어디에서도 이방인이고 환영받지 못한다. 십자가가 없으면 연주회도 없다!” 

 

 

 


 말러는 매일같이 왕궁오페라에서 연습을 하거나 연주를 했으며, 여름휴가에는 북오스트리아의 슈타인바흐 암 아터제 호숫가에 있는 오두막에서 작곡을 하면서 가족을 돌보아 줄 시간은 없었다. 

 

 

 

 


 같은 해인 1907년 12월 말러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에서 리하르트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Tristan and Isolde)'를 첫 공연하여 대성공을 거둔 반면, 한 사람의 이기적인 천재성 때문에 자신의 재능을 계발(啓發)할 수 없었던 알마는 6개월 동안 뉴욕에 함께 머물 때도 외로움과 격리감에 휩싸였고, 딸의 죽음으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1910년 5월, 알마는 딸 안나를 데리고 그라츠에 있는 토벨바드 온천에 요양차 들렀다가 4살 연하의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1883~1969; 1919년 20세기 건축과 디자인의 역사에 커다란 획을 그은 '바우하우스'의 창시자)를 만나 걷잡을 수 없는 열애에 빠진다. 


 그런데 그로피우스(시몬 페르후펜)가 알마에게 보내는 연애편지 겉봉에 말러 부인(Frau Mahler)이 아닌 말러 씨(Herr Mahler) 앞으로 써 보내는 바람에 말러가 우연히 보게 되어 외도 사실이 들통난다. 어쩌면 기정 사실화 할 목적으로 일부러 '실수한 척' 보낸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로피우스가 담판을 지으러 알마의 집으로 직접 찾아와서 남편 말러가 보는 앞에서 한 남자를 선택하라고 제안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자기가 떠나면 병을 앓고있는 말러가 죽는다며 아내로서의 위치를 지키고 말러를 선택하는 알마. "이해는 하지만 승낙은 할 수 없다"는 그로피우스의 말에 "미안하다"고 대답하자 그녀를 떠나는 그로피우스. 


 '(그로피우스와) 사랑은 하지만 (말러와) 이혼은 할 수 없다'는 논리이다. 까놓고 말하자면 욕정도 채우고 부와 명성도 거머쥐겠다는 대단한 결단력을 가진 영악한 여자였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사실 둘은 계속 비밀리에 뜨거운 애정 편지를 교환하고 밀회를 했던 것으로 보아 말러를 선택한 것은 사랑 때문이 아니라 부와 명예 때문이었지 싶다. 당시 그로피우스는 무명의 젊은 건축가였을 뿐이었다.

 

 

 


 '바람의 신부'에서는 심도있게 다루지 않았지만 이때 받은 정신적 충격으로 구스타프 말러는 네덜란드의 대학 도시 라이덴에 휴가 중인 심리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찾아가 심리치료를 받게 된다. 1910년 8월27일, 말러가 '교향곡 제10번'을 작곡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이를 다룬 영화가 '구스타프 말러의 황혼'이다. 

 

 

 

 

 


 이 영화의 오픈 크레디트에 인스부르크 중앙역에서 암스테르담 행 기차를 타고 가는 말러와 중간 중간에 말러의 '교향곡 제10번' 초고 위에 휘갈겨 쓴 "너만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리라." "너를 위해 살고, 너를 위해 죽으리라. 알머쉬(Almschi, 알마의 애칭)" 그리고 "악마는 나와 함께 춤을 추네." 등 알마에 대한 분노와 저주가 가득한 마지막 유언장 같은 장면이 나온다. 

 

 

 


 프로이트를 직접 만난 말러는, 그에게는 죽음에 관한 트라우마 말고도 아내에게서 어머니의 상을 추구한다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자리잡고 있다는 진단을 받는다. 말러는 비엔나의 유태계 지식인이라는 인종적 편견과 모성 고착 콤플렉스로 인해 극심한 의처증을 앓은 광기의 음악가였다. [註: 프로이트는 한편 알마에게는 말러에게서 아버지 쉰들러의 상을 추구한다는 '엘렉트라 콤플렉스'가 있다는 진단을 했다고 한다.]


 단 한 번의 만남이었지만 확실한 효과가 있었던지 말러는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아가는 듯 보였고, 전에 없던 선물과 애정편지의 공세가 이어졌다. 또 그의 '제8번 교향곡'을 알마에게 헌정했는데, 이 곡은 1910년 9월 비엔나와 뉴욕에서 초연이 되어 대단한 성공을 거둔다. 이때 그녀가 작곡한 5곡의 리더(Lieder)를 출간해 주기도 했다. 


 그 후 저주와 분노의 제10번 교향곡은 자신을 떠나버린 알마를 모두 용서하고 그녀의 행복을 기원하는 진정한 사랑의 고백으로 바뀐 마지막 유언장이 된다. 비록 미완성이었지만.


 음악감독은 따로 없고 런던 필하모닉 수석 지휘자인 에사 페카 살로넨(59)이 스웨덴 라디오 교향악단을 지휘하여, 말러의 마지막 교향곡 10번에서 유일하게 완성된 아다지오 부분, 교향곡 5번 4악장 아다지에토, 그리고 교향곡 4번 3악장 Ruhevoll(평온하게)의 일부분 및 솔로를 들려준다. (다음 호에 계속)

 

 

※ 알림: 2월 7일(수) 갤러리아 쏜힐 문화센터에서 낮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과학 및 인문 강좌가 있습니다. 강사: 문종명, 손영호, 한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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