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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 (Luther)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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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주년 - 세상을 바꾼 획기적 사건

 

 

 

 

 (지난 호에 이어)
 젊은 엄마인 한나(마리아 시몬)가 절름발이 딸 그레테(도리스 프로소바)를 위해 면죄부를 사서 기쁨에 겨워 루터에게 보여준다. 루터는 면죄부는 종이쪽지에 불과하다며, 1517년 10월 31일 제성기념일(신앙의 본을 보인 모든 성인의 날) 전날 밤에 교회 문 앞에 95개의 반박문을 붙이고 면죄부에 대한 공개토론을 제의한다. 

 

 

 


 루터는 "우리의 주님이시며 선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고 하실 때, 그는 신자들의 전 생애가 참회되어야 할 것을 요구하셨다"라고 논제(제1조)를 시작한다. 그는 자신의 복음의 재발견을 면죄부 문제에 적용하여 "교회의 참 보고(寶庫)는 하느님의 영광과 은혜의 거룩한 복음"(제62조)이라고 역설하면서, 면죄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자비에 비할 바가 아님을 천명하였다(제68조). 마지막 논제(제95조)에서 루터는 그리스도인은 면죄부와 같은 행위의 의가 아니라 '오히려 많은 고난을 통해 하늘나라에 들어간다'고 결론 내린다. 

 

 

 


 루터는 고난과 십자가를 통해 하느님을 인식할 수 있으며 하느님의 자비와 은혜에 의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십자가 신학'을 발표하여 '영광의 신학' 즉, 힘과 정복을 추종하고 인간은 다만 구원을 받을만한 도덕적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던 당시 로마 카톨릭교회의 신학을 비판하였던 것이다. 

 

 

 


 루터와 에르푸르트 대학 법학부 동창으로 프리드리히 선제후의 비서인 게오르크 슈팔라틴(Georg Spalatin, 1484~1545)이 로마교황청에서 온 편지를 선제후에게 보고한다. 루터를 종교재판에 넘기려고 '로마로 보내거나 삭소니(작센) 영지로부터 추방하라'는 위협적인 내용이었다. 


 프리드리히 현자(피터 유스티노프)는 슈팔라틴(벤자민 새들러)에게 '나보다 강한 상대에게 거부를 표시하는 방법은 두 가지, 즉 침묵하거나 상대가 어리둥절 할 정도로 친절하게 거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어서 비서에게 "둘 다 실패한다면 그저 죽어 지내는 수밖에, 아니면 싸우든가! 일단 싸우기로 정했으면 반드시 이겨야 돼."라며 "나는 루터를 로마로 보내지 않겠다. 누가 감히 내 대학에서 그런 인재를 빼앗는단 말인가?"고 결정한다. 


 1518년 10월 12~15일. 선제후의 노력으로 로마 대신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에서 심문을 받게 되는 루터. 그를 구하기 위해 찾아온 요한 폰 슈타우피츠 신부와 함께 출석한 자리에서 카예탄 추기경(Thomas Cardinal Cajetan, 1469~1534)의 특사인 지롤라모 알레안드로(Girolamo Aleandro, 1480~1542)는 추기경을 알현 할 때의 간단한 의전규칙을 설명한다. 


 이에 "교회가 하나라도 반론을 제기한다면 즉시 복종하겠다."며 "추기경과 교황이 제 뜻을 이해하신다면 제게서 아무런 허물도 찾지 못하실 것입니다."고 담담히 맞서는 루터.


 알레안드로(조너단 퍼스)는 오직 "나는 뉘우친다(revoco)"는 한마디만 하면 심의도 논쟁도 없고 그냥 끝난다고 설득 반 위협 반으로 강조한다. 루터가 '면죄부를 파는 설교자들이 신도들을 기만하는 작태에 대해 교황께 진언 드리고자 여기에 온 것'이라며 반론을 제기하려 하자 그를 말리는 슈타우피츠 신부. 

 

 

 


 이윽고 카예탄 추기경(마티유 카리에르)과 독대(獨對)하는 루터. "면죄부는 수백만 신자들에게 위안을 주는 교회의 확고부동한 전통"이라며 "기독교는 오토만 터키의 위협으로 이리저리 쪼개져 단합이 시급한 이 때 그대는 왜 혼란을 초래하는가?"하고 묻는 추기경. 루터는 "그리스도의 공덕이 면죄의 보화를 얻는다."며 "교황의 특권은 교황의 권세로 보장받는 게 아니고 교황의 신용과 성서에 명시된 가르침에 의해 유지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한다. 


 "성서는 교황이 해석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추기경에게 "해석은 하실지 몰라도 그 위에 군림할 수는 없습니다. 제 목표는 교황 성하(聖下)나 교회와 맞서려는 게 아니라 존경심을 갖고 그들을 옹호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언어 때문에 복음이 거부될 순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루터.


 루터는 교황보다 공의회가 더 높으며, 모든 인간들은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의 최종적인 권위는 교황이나 교회가 아닌 성서가 가진다고 반박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죄인이라는 신분이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보시고 그리스도인을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해 주신다는 그의 이신칭의론(以信稱義論)을 굽히지 않았다. 이 주장은 "믿음만으로, 은혜만으로, 성서만으로!"(sola fide, sola gratia, sola scriptura)"라는 이른바 '세 솔라(Three Solas)'로 함축된다. 


 타협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점점 더 위험을 자초하는 루터의 태도에 실망(?)한 슈타우피츠 신부는 아우구스티누스 공의회에서 루터를 축출하고 다만 영적 고해신부가 되어 주겠다고 선언한다. 루터로 인해 닥쳐올 파장을 미리 피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처로 보인다.

 

 

 


 결국 루터로부터 'revoco'라는 말을 얻어내지 못한 상태에서 다음 해 1519년 1월, 교황의 지시로 카를 폰 밀티츠(Karl von Miltitz, 1490~1529) 특사가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를 찾아 교황청의 특별한 호의의 징표인 황금 장미(Golden Rose)를 전한다. 밀티츠(티모시 피치)는 선제후가 루터를 추방하라는 카예탄 추기경의 요구를 이미 거부한 것을 모르고, 루터를 추방하거나 로마로 압송할 경우 선제후에게 있을 유익을 선전하였다. 

 

 

 


 1519년 7월 4~14일, 요한 에크(Johann Eck, 1486~1543)가 침묵을 깨뜨리고 루터를 공격하자 루터는 그의 동료인 카를슈타트 교수와 함께 라이프치히로 가서 그와 논쟁을 벌이게 된다. 이른바 '라이프치히 논쟁(Leipzig Debate)'이다. [註: 이 내용은 영화에 나오지 않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서술했음을 밝힌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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