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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역경을 이긴 아날로그 세대의 기적 - 영화 '국제시장'을 보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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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국제시장은 지금 우리 사회의 7080세대의 부모님들이 겪은 인생을 눈물과 웃음으로 재미있고도 감동적으로 그린 영화다. 한국 영화 역사상 5번째로 천만 관객을 돌파한 해운대(2009) 이후 5년의 침묵을 깨고 부산 출신의 윤제균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1950년 동족끼리의 참혹한 한국전쟁 이후 폐허 속에서 우리는 배고팠던 목숨이었고 못 입었던 젊음이었다. 흥남철수 작전은 1950년 12월 22~25일 사이에 美10군단장 에드워드 알몬드 중장의 한국인 고문 현봉학 박사(출연 고윤)와 한국군 1군단장 김백일 장군 등이 "장비보다 민간인의 목숨이 더 중요하다"고 버텨 결국 장비와 탄약은 대부분 폭파시키고 대신 130여 척의 군함에 10만여 명의 북한 피난민을 태워 철수한 사건이다. 이를 위해 올리버 P. 스미스 소장이 이끄는 美해병 1사단은 약 2주 동안 이어진 ‘장진호 전투’에서 끝까지 중공군을 막다가 12월24일 마지막으로 흥남 철수에 성공한다.


 영화 속 흥남 부두에서 딸 막순을 찾기 위해 배를 놓친 아버지 윤진규(정진영)를 눈물로 이별하고 모자(母子)가 탔던 배는 전시물자 수송선 메러디스 빅토리(Meredith Victory)호로, 한 배에 1만4,000명의 피난민을 구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명을 구조한 선박으로 기네스북에 올려진 미국 군함이다. 배의 선장 레너드 라루(Leonard LaRue, 1914~2001)는 이 일로 공로상을 받은 후 곧장 수도원에 들어가 마리너스 수사가 되어 평생을 봉사하다 87세로 죽었다. 


 한국의 공식적인 1인당 국내총생산(GDP) 통계는 1970년부터 집계됐다. 다만 1953년의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67달러, 1960년 70달러, 1965년 105달러로 기록돼 있다. 이른바 절대 빈곤 상태였다. 1953년 8월 처음으로 들어온 미국의 원조물자로 연명하던 시절, 부산광역시 중구 신창동에 위치한 재래시장인 국제시장, 남포동 자갈치 시장 등은 살기 위해 일밖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시절의 우리의 삶터를 대변한다. 1950년대 당시 수출품은 마른 오징어, 한천, 김 등 식료품이 대부분이었고 중석과 흑연, 철강석 등 광산물이 중심이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발표된 것은 1962년 1월13일, 고(故) 박정희(朴正熙, 1917~1979) 대통령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시절에 추진한 계획이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64년 드디어 수출 1억불을 달성하여 절대 빈곤에서 탈출하게 된다. 1960년대 초 한국 국민들은 너무나 굶주려 먹고사는 것을 해결할 수만 있다면 어떤 고통이라고 감내할 자세가 돼 있었다. 농촌에서 무작정 상경한 젊은이들은 노동 악조건과 밤샘 노동에 구애받지 않고 죽도록 일했다.


 1963년 파독(派獨) 광부 500명 모집에 4만6천 명이 몰려들었다. 상당수가 대학졸업자와 중퇴자들. 당시 남한 인구 2,400만 명, 정부 공식 실업자 숫자만 250만 명이 넘었다. 이들은 독일 탄광의 지하 1000m와 3000m 사이 막장에서 기꺼이 석탄가루를 마셨다. 주인공 윤덕수(황정민)와 둘도 없는 친구 천달구(오달수)도 그 현장에 있었다.

 

 


 1966년 12월, 3년의 고용기간을 채우고 142명의 파독 광부 1진이 귀국했다. 거의 전원이 골절상 병력을 안고 돌아왔다. 그 중에는 사망자도 있었고, 실명(失明)한 이도 있었다. 간호사 언니•누나들의 사정도 비슷했다. 1966~76년 독일로 건너간 한국 간호사가 1만여 명, 광부들은 1963~78년까지 7,800여 명이 건너갔다. 이들의 송금액은 연간 5,000만 달러로, 한때 GNP의 2% 대에 달했다. 그들의 희생이 한국경제의 저력이 됐다. 시체 처리 담당 간호사 오영자(김윤진)가 미래의 남편이 될 광부 덕수를 만난 것은 이때였다.


 내가 1978년도에 현대자동차 역사상 첫 해외법인을 네덜란드에 설립하여 주재원으로 있을 때 가장 구하기 어려웠던 것이 김장용 배추였다. 그 무렵, 이름과 지명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독일에 광부로 왔다가 정착하면서 한국산 배추를 3년여의 실패 끝에 독일 토양에 맞게 개량하는데 성공한 분이 계셨다. 처음으로 우리 배추로 김장을 담글 수 있다는 희망에 모터쇼 전시용으로 막 도착한 신차 포니(Pony)까지 동원하여 독일 아우토반을 달려가서 차의 앞뒤 좌석과 트렁크에 밭떼기로 뽑은 배추를 꽉꽉 쑤셔넣고 의기양양(?) 헤이그로 돌아왔던 추억이 있다.


 그런데 그때 그 광부아저씨 배추밭에서 일하는 사람이 모두 독일여자들이어서 놀랐고, 무보수로 일한다는 사실에 또 놀랐다. 더더욱 놀란 것은 사무실 한켠에 마련된 온돌방에 모여앉아 생배추를 쌈장에 푹 찍어서 오히려 우리보다 더 맛있게 잘 먹는 게 아닌가. 사연인즉 그들 모두가 병원에서 당뇨병, 고혈압, 비만증 등으로 거의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들이었는데 여기 와서 채식을 하고나서부터 믿기지 않을 정도로 호전된 사람들이었다. 그게 고마워서 운동 겸 자발적인 봉사활동을 하게 됐다는 얘기였다. 우리의 근면성과 극기(克己) 정신, 한식 등의 문화가 남의 나라에서 빛을 발하는 자랑스러운 한국인의 긍지를 느끼게 했던 일로 기억된다.


 1964년 베트남 전쟁에 제1차 파병을 하게 된다. 그 후 이른바 월남특수로 국내에 유입된 자금은 약 50억 달러에 이르고 우리 군의 현대화 등 상당한 경제효과를 가져왔지만 한국군 5천명 사망, 1만6천명 부상 등 심각한 부작용도 동반했다. 영화 속의 주인공 덕수는 절친한 친구 달구와 함께 이때 모 종합상사의 일원으로 월남특수를 위해 파견되었던 것 같다. 끝순이(김슬기)의 결혼 자금 마련을 위해 갔지만, 이 당시 종합상사는 그룹 내에서 최고의 대우와 지위를 누렸고, 상사맨들은 일등 신랑감 반열의 선두에 섰을 때다.


 1969년 7월21일에 경인고속도로가 개통됐고, 같은 해 10월에는 마산 수출 자유지역이 설치됐다. 1970년 1인당 GDP는 253달러. 세계 최단기간 내 완성한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된 것은 1970년 7월7일. 1968년 2월1일 착공하여 2년5개월 만에 428km를 뚫은 것이다. 고(故) 정주영(鄭周永)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총칼이 없을 뿐 전쟁이었다. 나는 흑자를 포기, 명예를 선택했다”고 술회했다.
 

이듬해 1971년 새마을 운동이 시작됐다. 새마을 운동은 ‘하면 된다’와 ‘잘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줬고 이것이 경제성장의 정신적 지주(支柱)가 됐다. 그리고 이 해에 수출 10억 달러를 달성했다. 1억불의 10배를 달성하는데 7년이 소요됐다. 1972년 3월23일 현대중공업의 전신인 현대조선소의 기공식이 있었다. 울산 방어진 갯벌 사진만 들고 해외수주를 받으러 간 정주영 회장이 그리스의 선박왕 오나시스를 만난 자리에서 우리 동전에 새긴 거북선을 보여주며 확신을 시켰다는 얘기는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그의 신념을 말해주는 유명한 일화다.


 1973년 7월3일 경북 포항에서 준공된 ‘포철 제1기’ 설비는 민족의 에너지에 불을 붙인 일대 사건이었다. 1970년 4월 첫 삽을 뜬 지 성공 아니면 죽음이라는 각오로 이뤄낸 3년 만의 결실이었다. 1974년은 중동 건설시장에 진출한 첫 해다. 사막의 열기를 뛰어넘어 오일 달러를 벌여 들였다. 중동 건설붐은 한강의 기적’을 이룬 1970~80년대 한국 경제의 또 다른 견인차 역할을 했다.


 1974년 8월15일에 서울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되었다. 1977년은 1인당 GDP가 처음으로 1000달러를 돌파, 1,034달러를 기록한 해다. 동시에 수출 100억 달러를 달성한 해이기도 하다. 1964년 수출 1억 달러를 넘은 뒤 13년 만이었고, 1971년 10억 달러를 넘은 뒤 6년 만의 쾌거였다.


 1인당 GDP가 2000달러를 넘은 것은 6년 뒤인 1983년. 그 해 세계에서 세 번째로 64KD램이 개발됐다. 반도체 산업이 날개를 달게 되면서 이후 전자산업과 IT(정보기술) 산업이 한국경제를 이끌게 된다. 모래 성분에 불과한 실리콘 덩어리가 한국인의 손으로, 인간의 지식과 감정을 담아내는 도구가 된 것이다. 1986년은 한국의 수출이 수입을 처음으로 넘어 49억 달러의 무역수지 흑자로 전환된 해로 기록된다. 5차 5개년 경제개발 계획을 마무리 짓던 해였다. 1인당 GDP는 2,643달러.


 영화 국제시장은 아마 여기까지 이어지는 것 같다. "아버지 내 약속 잘 지켰지예? 이만하면 내 잘 살았지예? 근데 내 진짜 참 힘들었어예." 그렇다. 67달러의 절대빈곤에서 3,000달러를 일궈 이제 3만 달러의 풍요시대로 이어가게 한 한강의 기적은 신이 준 선물이 아니었다. 가난할 땐 태어나선 안 될 후손들을 위해 가난을 이긴 아날로그 세대들의 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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