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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조국이 가르쳐 준 노래’
youngho2017

2015-04-17

‘내 조국이 가르쳐 준 노래’

 

 비가 촉촉히 내리던 늦가을, 어느 명사의 출판기념회에 갔다가 뜻밖에 색소폰 연주로 ‘기차는 8시에 떠나네(The Train Leaves at Eight)라는 곡을 오랜만에 듣게 되었다.


 이 곡은 원래 그리스 태생인 세계적 메조 소프라노 아그네스 발차(Agnes Baltsa)가 1986년 출시한 앨범 "내 조국이 가르쳐 준 노래"에 삽입되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작곡가는 유명한 영화 ‘죽어도 좋아(Phaedra•1962)와 ‘희랍인 조르바(Zorba the Greek•1964) 등의 주제곡을 작곡했던 테오도라키스(Mikis Theodorakis, 90세).

 

 


 이 가곡집은 그리스의 11개 현대 가곡들로 구성돼 있고, 가사가 모두 그리스어로 돼있어 뜻은 알 수 없지만, 그 가락은 조금도 위화감 없이 우리 감동에 깊이 파고든다. 지휘와 편곡을 담당한 스타브로스 크사르하코스의 해설에 의하면, 이 가곡집에 수록된 곡들은 모두 터키나 독일의 침략을 받았을 때 그리스 시민들이 읊은 저항의 노래라고 한다. 하지만 이 가곡집에서는 흥분이나 분노의 직접적 과시는 전혀 드러나지 않고, 서민의 자연스런 마음의 미묘한 뉘앙스가 소박하게 그려지고 있다. 그래서 처음 듣는 우리들도 무엇인가 애틋함을 감지하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이 앨범에 당신께 마실 장미향수를 주었네(I Gave You Rose-Water To Drink)라는 노래도 있다. 이 곡은 영화 페드라에 삽입된 곡으로 주인공 안소니 퍼킨스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멜리나 메르쿠리가 직접 불렀던 노래다. 원곡의 가사는 "…나는 당신께 마실 장미향수를 주었지만 당신은 나에게 독약을 주었네"인데, 진작 영화 속에서는 장미향수가 아닌 젖과 꿀을 준 것으로 멜리나는 말한다. 이미 영화의 전반부에서 이 노래를 통해 근친상간(近親相姦)의 비극적인 종말을 예고하고 있는, 잊지 못할 명장면 중 하나이다.


 또 테오도라키스의 다른 곡인 ‘5월의 어느날(Mera Mayou)이 들어있다. 감히 말하지만 이 노래에 관한 한 나는 발차보다 나나 무스쿠리(Nana Mouskouri)를 더 좋아한다. 나나가 1962년 조국 그리스를 떠난지 22년 만인 1984년, 그리스 고대 야외 음악당인 헤로드 아티쿠스(Herod Atticus)에서 귀향 라이브 공연을 했을 때, 이 애절한 노래를 부르면서 스스로 감정에 북받쳐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인 검정뿔테 안경 너머로 흘리던 눈물을 잊을 수가 없다. 마치 맑은 옹달샘에서 흘러내리는 청순함과 아름다움이 우리를 정화시키는 듯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조국 얘기가 났으니 얘기지만, 나나 무스쿠리도 발차보다 19년 전인 1967년 그리스에서 군사쿠데타가 일어나자 프랑스에서 망명 아닌 망명생활을 시작했고, 곧바로 그리스 음악만으로 꾸민 "내 조국의 노래"라는 음반을 냈다. 거기에 삽입된 그리스어로 부른 원곡 중 한 곡을 우리말로 번안하여 부른 것이 트윈 폴리오(송창식•윤형주)의 하얀 손수건이다. 그리스의 유명한 작곡가이자 그녀를 정상급 가수로 키워준 하지다키스(Manos Hadjidakis, 1925~1994)가 작곡한 곡이다.


 “헤어지자 보내 온 그녀의 편지 속에 곱게 접어 함께 부친 하얀 손수건. 고향을 떠나 올 때 언덕에 홀로 서서 눈물로 흔들어 주던 하얀 손수건. 그때의 눈물자위 사라져 버리고 흐르는 내 눈물이 그 위를 적시네.” 70~80년대에  청바지, 통기타 그리고 생맥주로 상징되는 이른바 ‘청년문화’가 유행할 때 우리의 정서와도 딱 맞아떨어진 이 곡은 당시 젊은이들에겐 가뭄에 한줄기 단비와도 같은 위안이자 역설이었다.


 그리스의 가곡들은 우리와 비슷한 서정이 어려 있고, 마치 어렸을 때 걸었던 시골길을 다시 걷고 있는 듯한 낯익음이 있다. 그리고 마치 시골집 툇마루에 걸터앉으면 한여름 나무숲 사이로 서성이는 서늘한 바람소리 속에서 숱한 노래와 이야기가 들려오는 듯한 그런 분위기이다.


 그런데 우리 가수들이 번안하여 부르면 훨씬 따뜻하고 그리운 애수가 스며드는 것 같다. ‘하얀 손수건’이 그렇고 조수미가 부른 ‘기차는 8시에 떠나네’도 그렇다. 단순히 가사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들으면 원곡보다 더 애절하다. “아름다움은 슬픔이 찾아가는 마지막 피난처”라고 했던가. 어쩌면 아리랑 같은 한(恨)과 그를 승화시킨 살풀이가 우리의 숨결이 되고 속눈물이 된 까닭일까….

 

 


 아그네스 발차는 1944년 그리스의 레프카스섬에서, 나나 무스쿠리는 1934년 크레타섬에서 태어났다. 열 살 차이가 난다. 발차나 나나 모두 아테네 음악원에서 클래식 성악을 배웠다. 그러나 발차는 1964년 부카레스트에서 열린 조르쥬 에네스코 콩쿠르에 나가 우승하고 1965년 졸업 후 마리아 칼라스 장학금을 받아 독일 뮌헨에서 계속 공부하여 클래식의 외길로 접어들었다.


 발차의 공연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비제(Georges Bizet, 1838~1875)의 카르멘(Carmen)이다. 돈 호세 역에 특히 호세 카레라스와의 호흡은 전례 없이 훌륭한 듀엣으로 기억되며 전 세계로부터 극찬을 받았다. 1980년 그녀는 비엔나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 음악인으로서의 최고 영예인 캄머쟁거린(Kammersangerin) 타이틀을 수여받았으며, 1988년부터 이 오페라 하우스의 명예 회원이 되었다.


 반면, 나나는 중퇴하고 아테네의 자키(Zaki) 나이트클럽에서 노래하다 하지다키스에게 발군되어, 그의  창작곡으로 1959년 그리스 음악 콩쿠르 및 1960년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지중해 음악 콩쿠르에 출전하여 모두 우승했다. 그 다음해 하지다키스가 그리스 민요를 바탕으로 편곡한 아테네의 흰 장미(White Roses from Athens)라는 노래를 독일어로 불러 백만 장 이상이 팔리자, 이 타이틀은 그 후 나나 무스쿠리의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특히 1967년은 나나에겐 역사적인 해였다. 33살의 나이에 가수들의 명예의 전당이라는 유명한 파리 올랑피아 극장에서 첫 공연을 실현했던 것이다. 그 때에도 줄곧 함께 해온 그리스 3인조 밴드 아테니언스(The Athenians)가 어김없이 반주를 맡았다.

 

 

 


 나나 무스쿠리는 때론 허스키한가 하면 때로는 어두운 알토 같기도 하고, 또 어떤 땐 천사같은 콜로라투라 메조소프라노로 변하는 천상의 목소리로, 클래식, 샹송, 영화음악, 종교음악, 발라드, 포크송, 록 음악 등 숱한 장르의 노래를 15개국 언어로 불렀다. 그녀는 1959년 가수로 데뷔한 이후 1,500여 곡을 450만 장의 앨범에 담아 4억여 장의 음반 판매 기록을 세웠다.


 그리스의 두 국보(國寶) 여성은 이렇듯 다른 길에서 그들의 조국을 빛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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