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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의 신비(상)
yeodongwon

 
 
 

계절의 변화가 예년 같지 않아, 4월의 봄 꽃들이 비실비실 제 색을 내지 못하는데도 5월의 뒤뜰 텃밭에 심지도 않은 상추 몇 포기가 그래도 제철이라고 파릇파릇 순을 돋아내고 있다. 작년 어미 상추가 죽어가며 떨어뜨린 씨앗에서 새끼상추가 싹을 틔운 것이다. 콩 심은 데 콩 나듯 상추씨앗에서 상추 나는 종자 대물림 순환질서에 감탄하며 이 글을 쓴다.


생물이 생물이기 위해선 숨을 쉰다. 탄생은 숨쉬기를 시작했다는 뜻이고 죽음은 숨쉬기를 멈추었음을 의미한다. 그 죽음과 탄생 사이에 질긴 씨앗의 역할이 있기에 생명체의 영원성이 가능해진다. 분명 씨앗(DNA)은 살아 있는 생명이다.


어느 날 지구촌에 생명체가 등장한다. 이 생명체는 영원히 사는 독립적 개체의 사건이 아니라 씨앗이라는 매체에 의해 삶과 죽음을 반복하며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나는 종족이음을 마치 지푸라기를 이어 꼬여지는 새끼줄처럼 시간 속에서 역사를 만들며 엉키어 영생(영원한 생명)하고 있다. 이 유전적 생명체(DNA) 출현사건은 경이 그 자체다.


씨앗이 탄생전의 상태로서 생물이 생물이기 위한 모든 기질정보(DNA)를 기억하고 죽음과 탄생 사이를 이어주는 생명체영생방정식에 ‘나’라는 개체를 대입해 보면 내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가가 분명해진다.


나는 엄마 아빠의 씨앗사랑의 사단으로 탄생(생산)되어 기존의 생명체들에 얽혀 영원히 이어질 생명체에 참여된 단세포임을 알게 된다. 물론 탄생과 죽음이라는 단세포의 운명에 불과하다 해도 영원히 숨쉬는 생명체 새끼줄에 없어서는 아니 될 한 올의 지푸라기 역할로 말이다.


한 생명이 한번의 출현(탄생)으로 영생하지 않고 음양질서의 기(?)를 받은 씨앗이라는 매체(媒體) 역할에 의해 닮은꼴(DNA)로 대를 이어 영생케 한 이 절차방정식(과학적)이 자연의 섭리이든 절대자의 구상이든 참으로 환상 그 자체다.


그렇지 않은가? 단 한번의 탄생으로 영생케 해버리면 얼마나 지루하고 싱거워 살맛이 나겠는가? 암수(陰陽)를 동류동수(同流同數)로 섞어 서로 얽혀 사랑하며 대를 이어 아기자기 재미있게 살아가라는 퇴화를 방지하기 위한 하늘의 은총이라고. 


그런데 어떤가? 이 하늘절대질서에 또 다른 과학이 개입 유전조작으로 개판을 놓고 있으니, 천인공노할 일이다.


우주만상엔 이유 없이 존재하는 것이 없다는 것, 그리고 완벽한 질서로 운행되어 그 질서를 거역하면 어떤 식으로든 벌을 받게 된다 것, 그래서 피조물인 나는 그저 이 자연질서에 순응해 살면 된다. 


많이 먹으면 배탈이 나고, 남을 미워하면 내 맘이 먼저 아파오고, 마구잡이로 쓰면 공해로 찌든다. 그래서 나는 그저 다만 이 자연이치에 순응 조심 또 조심 ‘짠돌이’로 살려고 하는데 그게 남 보기에 이중성만 들어날 뿐 잘 안 된다. 


씨앗과 잉태는 개체생물의 탄생과 죽음을 전제로 한 생물체 대물림을 위한 산물임이 분명하고, 하늘이 씨앗과 열매를 만들었다 함은 죽음을 염두에 둔 절차인데 죽음이 이 열매를 따먹은 죄값(원죄)이라는 논리는 내 머리로는 아리송하다.


그건 그렇다 해두고, 이렇게 씨앗은 죽음이 남긴 닮은 꼴의 미련이며, 끈질긴 생명력이고 그만의 절대몫(DNA)이다. 이는 생명체의 영원성을 위한 탄생과 죽음과 씨앗이라는 삼위가 맞물려 돌아가게끔 설계된 하늘작품의 증거라고 나는 믿는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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