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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보기
yeodongwon

 

신문에 나오는 내 사진이 너무 젊어보여 근황 걸로 바꿀까 하여 그쪽 전문가인 딸에게 부탁해서 여러 장 찍게 했다. 정면으로, 대각으로, 갸웃이, 미소진, 무표정, 안경 쓴, 안경 벗은, 정장차림, 수수한 차림, 더부룩한 머리, 말끔한 머리, 그렇다고 여(呂)서방이 김(金)서방이 되는 것도 아닌데 마치 성형수술을 한 가짜 얼굴 같은, 그 중 실물보다 젊게 찍힌 매력남(?)을 골라 보는데 마음에 드는 것이 없다. 늙은걸 생각지도 않고. 


사진을 찍을 때의 기본은 빛(명암)과 위치(각도)와 그리고 초점인데, 이를 비유로 말하면 빛은 품격이고 각도는 자리이고 초점은 판단력이라 하겠는데, 바른 품격으로 바른 자리에서 바른 판단을 한다면 일단은 바른 사물보기가 된다 하겠다. 


사물보기를 바르게 할 수만 있다면 내 삶 자체가 바르게 될 것 같은데 그게 쉽지가 않으니 탈은 늘 여기에 있다. 품격이 비뚤면 사물이 비뚤게 보이고, 위치가 나빠 초점이 흐리면 흐릿하게 보일 것이고, 더욱이 보일 상대가 위장 술이 능하다면 제아무리 밝은 눈도 속수무책이다. 


이렇게 같은 사물, 같은 사건도 보는 사람에 따라 달라보이고, 같은 눈인데도 때와 장소와 기분에 따라 달리 보이니 세상물정보기에 정답이 없다는 말도 맞다.


똑바로 놓고 보고, 거꾸로 뒤집어보고, 비딱하게 기울여보고, 멀리 놓고 실눈으로 보고, 상대 입장에서 보고, 술 취한 몽롱한 기분으로 보고, 화 났을 때 보고, 기분 좋을 때 보는, 그때마다 같은 사물이 천차만별 달리 보이니 세상사 그래서 재미있는지는 모르지만, 정답은 어디에서 찾을꼬? 


세상 사물보기 중 내게 가장 어려운 것이 종교보기와 이념적 가치관이다. 나의 이성을 총동원해 이어령 교수처럼 영성에까지 접근시켜 보려고 해도 고차원(?) 위치에 감추어진 절대자의 모습은 오리무중 잡히지 않고, 안전적 보수의 가치관과 뒤집어보려는 진보적 가치관 사이에 나는 언제나(젊었을 때나 늙어서나) 보수 쪽에 서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런 내가 줏대 없어 보이는가? 품격이 낮은가? 심성이 비뚠가? 내 자리 환경이 나쁜가? 아니면 내 분별력에 문제가 있는 건가? 그도 아니라면 세상보기 명제들이 사물보기 같은 수단으로는 어림없는 차원인가? 


아무튼 내 나름으로 자리매김해버린 고집으로 버티고 서있는 한, 대상이 선명히 보여지지 않을 것임은 분명하다.


성경에 기독교의 하느님께서 만물 만상을 하루하루 만드실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셨다는데, 하늘 절대자에게도 좋음과 나쁨이라는 상대가치 개념이 있다는 게 의아하지만 보기에 좋게 하려는 예술성만은 높이 사고싶다. 들꽃 한 송이도 모양 내며 피는 자연 그 자체가 예술품 전시장이니 말이다. 


저 모양들, 저 색상들, 저 소리들. 그 맛깔, 그 표정 하나 하나가 제 멋으로 있는 자연의 자태에 나는 숨이 멈출 듯 반해버리니 말이다. 


우리 속담에도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 했다. 짚신 고무신 하나를 만들어도 거기에 모양내기가 보인다. 


이렇게 우주자연이 중용적 보기 좋음의 미학으로 나를 감싸고 있는데 왜 나는 늘 미움과 악에 넘어지고, 옳고 그름의 사리판단에 돌아서서 후회하는, 서툴게 살아가고 있는지? 


사물을 동(東)에서 보면 서(西)에 있고 서에서 보면 동에 있는 것, 그래서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중요할 것이나, 서 있는 자리가 어디가 되던 보는 마음은 늘 가운데(중용)를 지킬 수만 있다면 이상적일 텐데 성인(聖人)이 되기 전에는 어려우니 대충 사물보기로 살 수밖에 없나 보다. 보통 사람답게.


한 세상 그저 그렇게 다투고 화해하며 서툴게 사는, 그게 사는 재미려니 허허하며 살아지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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