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mkang39
캐나다 加人 강신봉
전 캐나다한인총연합회장, 전 토론토한인회장, 요크한국인학교 설립교장, 김치캐나다사장, 전 스코필드박사동상건립위원장,전 무궁화사랑모임창립회장, 토론토흥사단창립지부장, 대한민국국민훈장목련장, 역사문화원장

캐나다 문협회원.현 GTA한카노인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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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 이퇴계...생후 7개월에 부친을 여의고, 후실이었지만
samkang39

이황 이퇴계(李滉 李退溪) 명인전 #38

1501(연산군 7)~1570(선조4) 69세

제공: 강 신 봉


이황 선생의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 퇴도(退陶, 도수(陶수),

시호는문순(文純), 본관은 진보(眞寶), 조선 중기의 문신이요 학자이다.

 

 


경북 안동군 도산면 온혜리에서 좌찬성 이식(李埴)의 7남 1녀중 막내 아들로 태여 났다.

생후 7개월에 부친을 여의고, 후실이었지만

현부였던 생모 박씨의 가르침으로 총명한 자질을 키워 나갔다.

 

12세 때에 숙부 이우로 부터 <논어>를 배웠고,

14세때부터 독서를 하여 도연명의 시를 즐겨 외웠으며,

20대에 들어서는 침식을 잊고 주역에 몰두하다가 건강을 해쳐 병치레를 해야 했다.


27세때에 진사에 합격을 하였고, 모친의 소원에 따라 과거에

응시하기 위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이듬해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그리고 33세 때에 재차 성균관에 들어가 <심경주부>를 탐독하였다.

34세, 1534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사가 되었고,


37세 때에 모친상을 당하여 고향에 가서 3년간 복상을 하였고,

39세에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가 곧 사가독서에 임명되었다.

 

 

 

낙동강 상류 토계의 동암에 양진암을 짓고

산운야학을 벗삼아 독서에 전념하는 생활에 돌입하였다.


이 때에 토계를 퇴계라고 개칭하고 자신의 아호로 삼았으니,

그의 나이 46세 때의 일이다.


48세 때에도 여러가지 중앙관직을 받았으나

다 거절하고 지방직을 택하여 충청도 단양군수 경상도 풍기 군수를 역임하였다.


49세 되던 해에는 다시 관직에서 물러나

퇴계의 서쪽에 한서암을 짓고 다시금 구도생활에 침잠하였다.


52세에 성균관 대사성에 제수되자 취임하였고,

이후 홍문관 부제학, 공조참판등에 임명되였으나 모두 고사하고,

낙향을 하여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학문 정진에 전념하였다.

 

 

 

이 때에 자신의 아호를 도옹이라고 개칭하고

이후 7년간 서당에 기거하면서 독서, 수양, 저술에 매진하면서 제자양성에 온 힘을 기울였다.


13대 명종은 그의 학문과 인품을 높게 추앙하여

조정에 나올 것을 종용하였지만 이황은 학문에만 전념을 쏟아 부었든 것이다.


임금은 초현부지탄(招賢不至灘: 현인을 초빙하였으나 오지 않으니 한탄스럽구나!)

이란 제목으로 시를 짓고 이를 병풍에 그려 밤낮으로 처다 보았다고 한다.


이후 명종이 돌연 병사하고 선조가 즉위하였다.

그는 여러 차례 관직을 고사하였으나

끝내 거절할 수가 없어서 68세의 노구에 대제학의 중임을 맡고

선조에게 통치철학이 되는 <무진육조소>를 올렸다.

 

 

 

이후 선조에게 <논어집주>와 <주역>등을 강의하였고

마지막 봉사로 <성학십도>를 저술하여 선조에게 바쳤다.


69세에 이조판서에 제수되였으나 사양하고 낙향한 후

이듬해에 평상시대로 매화에 물을 주게 하고,

침상을 정돈시킨후 일으켜달라 하여 단정히 앉으니 조용히 그대로 세상을 떠났다.

그 때에 70세였다.


그가 죽자 선조는 3일간 정사를 폐하고 애도하면서

그를 영의정의 예로 장사를 지내도록 하였다하니

임금이 얼마나 그를 아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황 이퇴계가 지은 저서는 너무도 많다:

주자대전, 심경주부, 태극도설, 논어집, 천명도설, 연평답문,

숙흥야매잠주의 논문, 역학계몽전의, 백록동규집해, 태극무변, 등등이 있다.

 

 

 


이황은 이 같은 만학을 통해

조성 성리학의 최고봉에 이르는 한 편, 동양 유학의 한 산맥을 이룰 수 있었다.


젊어서는 학문을 위한 준비에 게으르지 않았고,

중년에는 스스로의 가치관을 실천하였으며,

노년에는 이를 바탕으로 학문을 쌓고 제자들을 길러

맹자가 말하던 인생삼락을 철저히 즐긴 사람이다.


영남학파 이황의 철학은 기호학파 이이 이율곡과 더불어

조선 500년 역사에 쌍벽을 이루는 최고봉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학풍을 따른 학자로는 당대의 유성룡을 비롯하여,

김성일, 기대승, 조목, 이산해, 이강이 황준량 등을 위시한 260여명에 달하고,


나아가서는 성혼, 정시한, 이현일,

이재, 이익, 이항로등을 잇는 영남학파 및 친영남학파파 사류 모두이다.

 

 

 

이는 조선 주리철학의 한 산맥을 형성하였으니

실로 한국 유학사상 일대 장관이 아닐 수 없다.


그만큼 이황의 산은 골이 깊고 봉우리가 높았던 것이다.

산이 높아야 골이 깊고, 골이 깊어야

넓은 강을 낼 수 있다는

이치가 바로 이황에 적합한 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