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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수기-뿌리 뽑힌 나무(13)
minjukim

 

(지난 호에 이어)

 한 번도 미신을 믿어 본 적이 없던 엄마는 정신이 번쩍 들었고 더 이상 치료에만 매달릴 수만 없었고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엄마는 동생한테 자주 수혈을 해주었는데 그날도 큰 주사기로 피를 2대나 뽑아 수혈해주고 꿀물을 얼른 타서 마시고는 바로 길을 떠났다. 엄마는 어디로 가는지 언제 돌아오는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누가 물어보면 금방 돌아올 거라고 말해 주라고만 했다.

 나는 궁금증을 참고 밤새 동생을 옆에서 간호했다. 그를 업고 화장실에 갔다 오고 수시로 자세를 바꿔줘야 했으며 다리를 올렸다 내렸다 하며 그의 손과 발이 되어 밤을 새다시피 했는데 정말 엄마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다음날 아침에 평소와 마찬가지로 병원 밥이 배달되었다. 갑자기 동생은 배가 고프다며 밥을 먹겠다고 했다. 나는 물론 모두가 깜짝 놀랐다. 돈 100원을 준다고 해도 먹지 못했던 밥을 먹는다고? 갑자기 웬일이야? 그는 밥그릇을 혼자 들지도 못하고 숟가락질을 할 수도 없었는데 그날은 기어이 혼자 밥그릇을 들고 먹는다며 고집을 부렸다.

 그의 손목은 붓고 아기 손처럼 가늘고 뼈들이 변형이 되엇다. 그래서 항상 밥을 떠 먹여 줘야 했는데 그날은 혼자 밥그릇을 들고 다 먹었다. 마침 지난밤에 길을 떠났던 엄마가 막 돌아왔다. 나는 얼른 엄마한테 사실을 알렸다. “엄마 00이 병원 밥을 혼자 다 먹었어.” 엄마는 너무 기뻐했고 얼굴 표정이 너무 밝았다. 무슨 좋은 소식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는 나한테 얼른 집에 돌아가서 아버지나 동생 친구들 한테 쥐를 3마리를 잡아서 보내 달라고 시켰다. 나는 쥐 얘기가 나오자 끔찍했지만 엄마는 심각하게 그리고 소곤소곤 얘기했다. 약에 쓰일 것이니 생기는 대로 가져다

달라고…

 일단 나는 동생이 밥 한 그릇을 다 먹었다는 소식을 아버지나 식구들에게 알릴 마음에 날아 갈 듯이 집에 도착했다. 동생 친구들은 병원에 있는 동생 소식을 물어보며 안타까워하고 그리워했다. 그리고 이틀 사이에 쥐 3마리를 잡아왔다. 엄마는 침대 밑에서 남들이 보지 않을 때 쥐를 가죽을 벗겨서 동생 심장에 붙여줬다. 엄마는 토끼가죽이라고 동생을 속이고 쥐고기를 까맣게 태워서 동생한테 토끼고기라고 속이고 먹였다. 그리고 의사 선생이 회진을 할 때마다 쥐가죽을 벗겨서 감추고 끝나면 다시 붙이고 이렇게 세 마리를 붙였는데 동생은 갑자기 많은차도가 생겼다.   

 아침마다 회진을 돌던 의사 선생은 갑자기 동생이 상태가 좋아진 것을 보고 너무 의아해하며 도대체 어느 약이 효과가 있는 건지 모르겠다며 혼자 중얼거렸다. 엄마는 서둘러서 병원을 퇴원했고 며칠 후에 집으로 돌아왔다. 후에 엄마한테서 들을 얘기지만 80살 되는 할머니 집에 찾아갔는데 보위부 직원들이 그 집을 에워싸고 점 보러 오는 사람들을 통제하고 있었다고 한다. 다들 무서워서 포기하거나 돌아갔는데 엄마는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밖에서 날이 어둡기를 기다렸다가 새벽쯤 되어서 보위원들이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에 담장을 뛰어넘어 몰래 집에 들어갔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김일성과 김정일이 곧 신이고 태양이기 때문의 그 외의 아무 미신이나 종교를 믿는다는 것은 곧 김일성과 김정일을 믿지 않는다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점쟁이들은 자주 보위부에 잡혀가기도 하고 보위부나 안전부 감시를 받기도 했지만 가난하고 힘든 백성들은 일이 잘 안 풀리거나 집안에 우환이 생기면 점쟁이 들을 찾아가서 어려움과 곤난을 극복할 방법을 찾으려 하는 것이다. 그 할머니가 쥐 3마리를 잡아서 가죽을 심장에 붙이고 고기는 구워서 먹이면 곧 차도가 있을 것이라고 했는데 신기하게도 그게 효과가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그리고 1주일 안으로 병원을 퇴원하라고 했다. 더 이상 병원에 머물러 있으면 동생이 죽을 수도 있다고 했다. 어쩌면 병원에 더 있다가는 끊임없는 항생제 투여와 영양실조로 인해 동생이 죽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급하게 병원에서 퇴원한 동생은 그때부터 집에서 식구들이 서로가 번갈아가면서 동생을 간호했다. 나는 동생이랑 특별히 친했는데 많은 시간들을 내가 간호하기도 했다. 동생도 언니들보다는 나를 더 따랐다. 그러나 동생에게는 또다른 고난과 시련이 첩첩산중으로 다가왔다. 집에 돌아온 지 얼마 후 동생은 너무도 많은 항생제 때문에 간이 심하게 손상되어 간염이 왔다. 그는 또다시 감염병동에 가게 되었다.

그곳은 전염병동이라 함부로 면회를 하지 못하게했다. 간염병동은 집 근처에 가까이 있었는데 한 달 동안 아무리 치료를 해도 차도가 없어서 평양 김만유 병원에 호송되어 가기로 했다. 김만유 병원은 1982년 12월 총련계 재일동포가 평양에 투자하여 세운 병원이었다. 최신 의료 기구와 의료진으로 지방 병원보다는 훨씬 좋은 곳이었지만 빽이 없이는 함부로 갈 수가 없었다. 엄마는 평양에서 가르친 제자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도움을 부탁하였다. 많은 제자들이 당시 평양에서 꽤 높은 지위에 있었고 엄마가 편지를 보내면 고등학교 때 선생님의 부탁이라며 도와 나섰다. 그리하여 엄마는 동생을 데리고 평양시 낙랑 구역에 있는 소아병원과 2병원을 전전긍긍하던 끝에 평양의 최고 병원인 적십자병원에 입원하였다.

 우리는 평양이라 함부로 면회를 갈 수가 없었다. 아버지와 엄마는 동생 병간호를 번갈아가며 했는데, 몇 달 동안 당생활총화 보고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버지는 해임되고 직장에서 나오게 되었다. 종당에는 최고급의 중앙병원들도 동생의 병명을 진단하지 못했고, 병 차도는 없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참 미스터리 한 일이었다. 그렇게 2년 가까이 병원 침상에 누워서 병마에 시달리던 동생은 그만 모든 치료를 중단하고 집에 오게 돌아오게 되었다.

 병원에서 풍기는 알코올 냄새에 진절머리가 나고 흰색 가운을 보기만 해도 질린다며 집으로 돌아가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온 후부터 동생은 온갖 민간요법으로 별 방법들을 다 써봤지만 아무 차도가 없었다. 무리한 항생제 투약으로 동생은 성장을 멈춰 버렸고 류마티스성 로이마 관절로 손과 발은 변형이 되어 움직이지 못하였다. 그때부터 그는 장애인 아닌 장애인처럼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나는 그때 동생보다 3살 누나였지만 제일 가까웠다. 나는 그를 업고 밖에 변소에 데려다주고, 목욕도 시켜주고 밥도 먹여주고 온갖 할 수 있는 건 다했다. 남동생은 국수를 참 좋아했는데 그의 생일에 뭘 먹고 싶냐고 물으면 바로 국수라고 대답할 정도로 국수를 좋아했다. 옥수수 국수에 김칫국물을 말아서, 또는 겨울에 끓인 배춧국으로 국수 말아 먹던 내 동생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천진하게 뛰어놀며 꿈을 키워야 할 10대부터 청년이 되어서도 병상에 누워 살아가야 하는 동생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는 식구들의 안타까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는 너무 고통스러워 차라리 죽고 싶다고, 이렇게 힘들게 살 바에는 죽는 게 나으니 그냥 죽게 해달라며 울어서 식구들의 가슴을 후비었다. 엄마는 집안의 외아들을 살려보겠다고 좋다는 약을 구하려 전국을 돌아다녔다. 병원에 대한 기대를 접고 민간치료법에 능한 사람들을 찾아다니고 병이 언제 나을지 온갖 점집을 찾아다녔다. 그렇게 엄마의 무릎 관절은 닳아버렸다.

 그러나 세상은 너무도 야속하게 아무런 기적도 동생에게 가져다주지 않았다. 아들의 병 시발을 하다가 지친 부모들은 한 달을 사이 두고 한꺼번에 세상을 떠났다. 1년 후 남동생도 병마와의 싸움을 견디지 못하고 끝내 함지 안에 사뿐히 들여앉힐 정도로 뼈만 앙상하게 남은 상태에서 스러져갔다. 죽어서야 17년간의 고통에서 해방되어 부모님 계시는 저 세상에 가버린 것이다.

 한창 피어나는 인생의 꽃나이를 고통 속에서만 살다 간 내 동생을 생각만 해도 칼로 가슴을 저미는 듯 아프다. 지금도 동생 사진을 바라볼 때면 죽는 것보다 더 아픈 고통속에서 몸부림 치던 모습이 떠오르며 눈물이 앞을 가린다. 나는 중국에서 부모님과 동생이 그렇게 일찍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에서 한동안 헤어나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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