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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수기-뿌리 뽑힌 나무(12)
minjukim

 

 (지난 호에 이어)

경리 선생은 나의 반응에 많이 당황한 듯 흠칫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김ㅇㅇ 동무는 지금 당장 교직원 실로 오시오”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또 무슨 감투를 씌워 처벌을 주려고 하려는 것이 아닌가? 나 혼자 괜히 나선 것 아닌지 나는 불안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태연한 척했다. 다른 애들 모두 걱정스럽게 나를 바라보았고 내 친구들은 “왜 그랬어?”하며 나를 나무랐다. 나는 떨리지만 담담하게 교직원 실로 들어갔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김ㅇㅇ 동무. 정말 실망이오. 내 이 학교에서 경리직 30년을 해오지만 동무 같은 사람은 처음 보오. 교장선생님도 우리도 모두 동무의 가족에 대해 잘 알고 있는데 정말 이런 태도로 나올 줄 몰랐소. 내 당장 영수증을 써 줄 테니 창고에 가서 방학 기간 동무의 배급 쌀을 타가시오!” 그리고 그는 거침없이 영수증을 써주고 나서 홱 자리를 차고 사무실을 나가 버렸다.

 마침 모든 교원들이 다 사무실에 있었는데 무거운 분위기가 맴돌았고 아무도 기침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나는 남들은 다 가만히 있는데 혼자 너무 나선 것 아닌지 큰 죄를 진 것 같은 무거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뭘 잘못했는지 알 수 없어 스스로를 다독였다. “내 배급을 받아 간다는데 왜 죄인 취급을 받아야 하는가? 절대 주눅이 들 필요 없어. 다들 같이 반대를 했으면 더 좋았을 걸 왜 모두 침묵을 지킬까”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한 달용 식량은 이것저것 다 떼고 나면 겨우 12Kg정도 밖에 안되지만 우리 부모님 들처럼 비생산직종에서 일하는 고지식한 지식인들만 사는 집들에서는 큰 식량이다. 내가 그 쌀을 타가지 않으면 우리 식구들이 그만큼 쌀을 쪼개 먹어야 하므로 식구들에게 미안한 일이었다. 중요한 것은 쌀의 무게가 아니라 학교가 생긴 이래 해마다 식량을 빼돌려 맘대로 해 먹던 경리원 선생의 횡포에 맞써 내 권리를 찾기 위한 주장을 관철한 것이너무 통쾌했다.

 나는 그 길로 쌀을 타러 창고에 갔다. 창고장 아줌마는 의아해했다. “웬일이야? 왜 너만 쌀을 타가는 거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쌀을 안고 가다가 나와 아주 친한 심리학 선생님을 마주치게 되었다. “야!! 너 김ㅇㅇ. 정말 대단하다! 여태 나도 이 학교에 10년 넘게 근무하면서 아무도 방학 기간 쌀을 타간 사람이 없었어. 해마다 같은 이유로 아무도 쌀을 못 타갔는데 쌀 타는 사람 네가 처음이야. 너 진짜 배짱 있네. 우리 교원들도 방학에 쌀을 못 타가는데 아무도 경리한테 꼼짝 못해!” 교원들도 함부로 경리 선생의 심기를 건드리기 두렵고 반대할 용기가 없어서 순응한다고 했다.

 쌀을 받아서 호실에 들어갔더니 욕이나 실컷 얻어먹고 돌아올 줄 알았던 내가 쌀을 한가득 안고 들어오자 애들이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 다들 부러움과 후회를 했다. “언니는 좋겠다! 나도 언니처럼 할 걸. 역시 언니 멋있어!” 그들도 빈손으로 집에 돌아가면 눈칫밥을 먹어야 할 생각에 걱정들을 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참고 살아야 하지만 참을 게 따로 있지. 내 양식을 뺏기는 건 참을 수가 없어.” 집에 돌아가니 엄마와 언니는 너무 대단하다고 칭찬을 해 주었다. 언니는 쌀을 타온 것보다 그 거만하고 교활한 경리 영감을 보기 좋게 한방 날려준 것이 너무 속이 시원하다고 좋아했다.

 그해 5월 (50일간의) 모내기 철에는 간호진단서를 제출하고 집에서 아픈 남동생을 돌보았다. 훗날 둘째 언니가 찾아가서 50일간 내 앞으로 나온 식량을 타 갖고 왔다. 내 배급 쌀을 떼먹을 작정이었던 경리 영감은 또 한번 우리 형제들에게 골탕을 먹었다.

3. 동생아! 부디 그곳에서는…

 나에게는 3살 아래인 남동생이 있었는데 정말 총명하고 공부도 잘해 학교 교장선생님과 교원들의 칭찬을 달고 다녔다. 그래서 우리집에서는 동생이 나중에 커서 큰 과학자나 발명가가 될 것이라고 큰 기대를 했다. 그 애는 3살부터 “앞으로 커서 뭐가 될래?” 물으면 “수학, 물리학박사”라고 대답했다. 그애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있었고 항상 많은 친구들과 어울려 다녔다. 그렇게 똑똑하고 착하던 내 동생에게 청천벽력 같은 커다란 불행이 들이닥쳤다.

 그가 14살 되던 해 한식날에 아버지는 동생을 데리고 조부모님 산소에 갔다 왔다. 그는 그날 밤 심한 악몽을 꾸었는데, 남자가 나타나서 다리를 묶어 놓고 칼로 마구 자르는 꿈을 꾸었다고 했다. 그는 다음날부터 갑자기 아프기 시작했다. 다음날 동생은 엄마한테 아파서 학교에 못 가겠다고 했으나 우리 식구들은 여태 감기 한번 앓지 않던 건강한 동생이 학교에 가기 싫어 핑계를 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날 동생은 학교에서 수업 도중에 쓰러져 친구들의 등에 업혀 집에 돌아왔

다. 그는 바지가 흘러내려도 잡지도 못했고 소변보는 것도 힘들어했다. 몸은 불덩이 같이 뜨거웠고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엄마는 서둘러 동생을 데리고 시 병원에 입원했다. 그렇게 건강하고 튼튼하던 동생은 갑작스럽게 딴 사람이 되어버렸다. 병원에서 소변 검사와 엑스레이를 했는데 결과는 패혈성 심내막염, 혹은 심장판막증이라고 한다. 처음 듣는 생소하고 어려운 병명이지만 그게 왜 갑자기 동생한테 생긴 것인지 원인이 무엇인지 아무도 말해주지 못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 병이 쉽게 고칠 수 없는 불치의 병임을 짐작할 수는 있었다.

 동생은 숨이 답답하고 심장이 아프니 자꾸 가슴을 쾅쾅 두드려 달라고 했다. 일반 사람들도 아프다고 할 정도로 세차게 때려야 할 정도로 두드려야 조금 낫다고 한다. 몇 달 동안 41도 고열에 시달리며 아무 음식도 먹지를 못했다. 고열이 떨어지지 않아 입맛을 완전히 잃고 오직 찾는 것은 사이다였다. 온몸이 불덩어리라 사이다를 마시면 잠시라도 열이 떨어지는 착각을 하기 때문이다.  마침 사이다를 생산하는 공장이 병원 가까이에 있어 아버지가 사이다 만큼은 쉽게 구할 수 있었다.

 동생은 병원에 한 달 정도 입원 해 있으면서 페니실린과 마이실린 등 항생제만 매일 같이 맞았다. 음식을 못 먹고 항생제만 맞으니 통통하던 동생은 며칠 사이에 뼈만 앙상하게 남았고 얼굴이 백지장 같이 하얗게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이젠 누워서 아주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심지어 옆으로 돌아눕거나 다리를 올리고 구부리는 것조차 할 수가 없었다. 병원에서는 항생제를 맞으면 곧 나을 것이라고 하지만 전혀 그런 기미도 없었고 또 새로운 진단명인 류마티스성 관절염이라는 혼란스러운 병명이 더 추가될 뿐이었다. 동생이 왜, 어떻게 그런 병을 앓게 되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고 원인을 찾을 수도 없었다.

 드디어 시병원에서는 더 이상 손쓸 수 없으니 더 큰 도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엄마는 동생을 데리고 당장 함흥에 있는 도 병원 소아과로 입원했다. 나는 매주 토요일마다 기차를 타고 함흥

으로 갔다가 일요일에 집에 돌아왔다. 주말 이틀만이라도 동생을 돌봐 주면 엄마가 좀 편하게 쉴 수 있었다.

도 병원에서도 환자와 보호자 용으로 밥이 나오긴 하는데 그 한 숟갈마저도 동생은 먹지를 못했다. 한 호실에 있던 소아환자 엄마들이 죽이라도 한 그릇 다 먹으면 한사람이 10원씩 모아서 용돈을 준다고 했다. 엄마는 교원들 중에 제일 높은 월급인 108원을 받았는데 호실에 있는 10명이 10원씩 모으면 100원 이라는 큰돈이었지만 그래도 동생은 먹지 못했다. 그리고 함흥냉면을 너무 먹고 싶어 했는데 갑자기 우리는 함흥냉면을 구할 수가 없었다. 함흥냉면은 신흥관 식권을 따로 받아야 먹을 수가 있는데 그 식권은 권세 있는 사람들에게 빠져나가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은 먹어 보기 어려웠다.

 마침 같은 호실에 있던 아기 엄마가 친척을 동원해 함흥냉면 한 그릇을 받아와 동생을 주었는데 그는 그 냉면 한 그릇을 다 비웠다. 하지만 그렇게 자주 구할 수 있는 냉면이 아니어서 당시 우리에게 함흥 냉면은 그림의 떡이었다. 도 병원 소아과장 선생님은 우연히도 엄마의 대학 선배였다. 그래서 그 선생님은 동생을 특별히 신경 써서 잘 치료해 주었다. 수혈도 특별히 배정해서 자주 받도록 했고 항생제도 더 은 것으로 놔주려고 애썼다. 그리고 그는 아침마다 회진을 할 때면 엄마와는 러시아어로 대화를 하곤 하였다. 동생의 병 상태에 대한 심각한 이야기를 할 때면 말이다.

 하지만 그 병약한 몸에 강한 항생제를 매일 몇 차례씩 맞으니 그것들이 몸에 독이 되어 동생을 더 불행하게 만들 줄 몰랐다. 의료기구가 미약하고 오직 옛날식으로만 치료를 하다 보니 주먹구구식으로 항생제에만 매달린 것이다. 동생 옆에 누워있던 같은 또래의 남자애 엄마가 하루는 엄마에게 조용히 말을 건넸다. “내가 곁에서 그 집 아들을 지켜보니 아무래도 진짜 아픈 병은 아닌 것 같소. 무슨 귀신 병 같은 데 아무리 항생제를 써도 차도가 없기는 고사하고 점점 더 악화되고 있으니 혹시 점쟁이한테 가서 물어보는 게 어떻소? 우리 동네에 80세 되는 할머니한테 한번 만나보는 게 어때요?. 나도 내 아들과 동갑인 ㅇㅇ가 너무 고통받고 있어 정말 남의 일 같지 않소”

 그 할머니는 글을 배운 적이 없어 신문도 읽을 줄 모르지만 병이나 점을 보는 데는 귀신같이 알아 맞춘다며 당장 같이 가자고 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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