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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수기-뿌리 뽑힌 나무(10)
minjukim

 

 (지난 호에 이어)

 나는 속으로 엄마가 얼마나 혼자 마음고생을 했는지 그제야 알게 되었다. 그렇게 졸업한 지 4개월 만에 수산사업소의 보위대원으로 취직을 하게 되었다. 초창기에는 회사 이름이 인민무력부 xx수산사업소였는데 웬일인지 2년마다 이름을 바꿨다. 그리고 지배인, 당비서 이런 사람들은 다 군관 출신으로 군대에서 막 전역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를 군인 대하듯이 했으며 뭐든지 다 군대식이었다.

 보위대원 6명은 각자 고유번호가 있는 무기가 배정되고 실탄 54발과 함께 허술한 무기고에 보관한다. 모두 자기 번호가 새겨진 무기를 사용하며 1주일에 한두 번 총을 분해하여 청소도 하고 여름에는 너무 습해서 닦아 내야 한다. 2시간 내내 총을 메고 있으면 어깨가 아파 가끔은 총대를 메지 않고 설 때도 있는데 간부들 눈에 띄면 혼나기도 한다.

 나는 실탄이 장착된 38식 자동 보총을 메고 군복을 입고 정문에서 보초를 서게 되었다. 주민등록 문서에는 노동자로 등록되어 있지만 공식 업종명은 보초병이었다. 처음에는 군복을 입고 총을 메고 서 있는 것이 멋있어 보였고 출세라도 한 것처럼 뿌듯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캄캄한 밤에 혼자 근무를 설 때면 시커먼 파도가 방파제를 넘어 건물까지 바닷물을 뿌려 대면 무섭기도 하고 우울하기도 하였다. 특히 태풍이 불거나 바다 날씨가 안 좋은 날에는 바닷물이 흩뿌려져서 온몸이 젖을 때도 있었다. 어떤 날에는 밖에 지어 놓은 변소가 통째로 파도에 떠밀려갔다.

 우리 공장 건물은 바다와 불과 200m를 거리를 두고 지어졌는데 모래 위에 지어진 거라 그마저도 떠내려갈까봐 두려웠다. 1980년대 말에도 자주 정전이 되곤 했는데 정전이 되면 암흑처럼 캄캄한 밤에는 무섭기도 했고 가끔은 술 취한 낯선 남자들이 찾아와서 행패를 부리기도 했다. 한번은 당비서의 딸이 보초를 섰는데 취객이 찾아와 자꾸 주정을 부려 둘 사이에실랑이가 벌어졌다. 자고 있던 우리는 갑자기 탕탕 하는 총소리에 너무 놀라 벌떡 일어났다.

 취객이 그만 돌아가라고 하는데도 말을 듣지 않아 이 친구가 그만 공중에 대고 총을 2발이나 쏜 것이다. 바로 1km 거리에 있던 해안경비대에서 불과 몇 분만에 군인들이 달려왔다. 해안 경비대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비상상황을 통제하고 감시할 권한이 있고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는 사람들의 신원 확인과 바다에 나가도 된다는 허가증을 내주는 막대한 권한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특히 무기 사용에 대해서는 그들의 엄격한 조사를 받아야 한다.

 조용한 밤에 울려 퍼진 총소리는 바로 다음날부터 커다란 화제거리가 되었다. 당비서나 지배인은 그녀를 잘했다고 칭찬해주었고 그 후부터는 술주정뱅이들이 얼씬거리지 않았다. 보초는 2시간마다 교대를 하는데 교대할 때마다 공장 설비와 주요 상황들을 인계 받고 다음 사람에게 또 인계를 해야 한다.

 내가 보초를 서기 시작한 지 며칠 안 되어 태풍이 불어 닥쳤는데 부둣가에 있던 작은 보트 하나가 떠밀려 내려가 없어져 버렸다. 내 전에 근무를 서던 언니가 자기는 분명히 나에게 인계를 해주었다고 우겨댔고 나는 사실 본 적이 없었지만 목소리가 큰 놈이 이긴다고 결국 내가 근무태만이라는 누명을 뒤집어 썼다. 그리고 며칠 동안 욕을 엄청나게 먹었다.

 작은 보트 하나도 회사 재산이었고 그걸 사려면 비싸기도 했기 때문인데 그 태풍 속에서 발견을 한다고 해도 바닷속에 뛰어 들어가 보트를 구해 낼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 후부터는 교대 시간이 되면 꼭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곳은 갓 창건된 회사라 모든 것이 부족해 전마선(작은 보트) 몇 척으로 다시마나 홍합이나 잡아들여서는 회사에 내려진 물고기 생산 계획을 채울 수가 없었는데 갑자기 38마력이 되는 조금 큰 배가 생겼다. 그 배로 겨울에는 명태도 잡았고 여름에는 정어리를 정말 많이 잡아왔다. 또 쥐고기나 낙지, 가자미, 문어, 등등 매번 만선은 아니지만 꽤 실적이 좋았다. 배를 타고 나갔다가 7~8시간 후에 돌아오는데 뱃사공들은 점심을 끓여줄 사람이 없다고 불평을 부렸다. 남자들은 노력이 부족해 취사병으로 시킬 수가 없으니 보위대원들 6명이 돌아가며 취사병을 담당하기로 했다.

 다음날은 내가 취사 당번을 서는 날이었다. 나는 뱃멀미 할까봐 두려웠지만 정작 바다에 나가 보니 정말 좋았다. 살아있는 정어리들이 물속에서 튀어 오르고 소리도 끽끽 나는 것 같았고 막 잡아 올린 신선한 정어리로 국을 끓여 먹으면 등 푸른 생선 특유의 비린내가 하나도 나지 않고 정말 맛있었다. 비린내 나는 정어리로 어떻게 국을 끓여 먹나 생각하겠지만 아무 재료 없이 소금만 넣었는데도 너무 맛있는데 놀랐고 또 망망대해에서 많은 사람들과 둘러앉아 함께 먹을 수 있어서 더 맛있었는지도 모른다.

 심지어 뱃사공들은 정어리 회를 만들어 먹는데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정도였다. 정어리 회나 정어리 젓갈은 밥반찬으로 일품이었고 하도 많이 잡혀 싸구려 취급을 받아서 그렇지 정어리 젓갈의 맛은 남한에서 파는 그 어느 젓갈들보다 더 훌륭했다. 김장김치에 정어리를 넣어도 맛있다. 우리는 보위대 여자들끼리 주말마다 김치 파티를 가끔 하는데 겨울에 군것질 할 것이 하나도 없는 북한에서는 서로의 김치를 맛보며 소소한 행복을 즐겼다.

 우리는 서로 번갈아가며 각자 집에서 김치를 대여섯 포기를 가져와 아무것도 없이 포기김치를 손으로 쭉쭉 찢어서 먹었는데 내가 가져온 김치가 제일 인기가 없었다. 여기서 단연 최고의 김치는 바로 당비서 딸이 가져온 정어리 김치였다. 정어리 김치는 사실 나도 처음 먹어 보는데 명태를 김장김치에 많이들 넣지만 너무 고지식해서 가난하고 딸만 다섯인 당비서 가족은 명태가 비싸서 그 대신 해마다 정어리로 김장김치를 했다. 김치가 숙성되기 전에는 비린내 때문에 맛이 별로 지만 일단 숙성이 되면 가히 명태를 넣은 김치맛을 뛰어넘는다.

 뱃사공들은 집에 가져갈 생선도 각자 따로 챙겨 놓는다. 그들은 내 몫도 챙겨주었다. 그래서 보초병인 우리도 못 본 체 해주었고 외부 사람들만 단속을 했는데 워낙 빠져나갈 곳이 많아 우리를 비웃으며 다들 빠져나간다. 물론 우리도 생선을 얻어서 집에 가져가기도 하였다. 특히 가족들 중에 결혼식이나 환갑, 제사 생일 등 경사가 생기게 되면 바닷가에 사는 우리집은 당연히 생선을 책임지고 가져 가야만 했다. 잔칫상이나 환갑상에 커다란 문어와 이면수, 대형 가자미들을 소금을 살짝 뿌려 반 건조하여 보관했다가 가져간다.

 잔칫상이나 환갑상에 해산물은 절대 빠질 수 없으니 물불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 구해야만 했다. 그래도 우리집은 나 때문에 생선구경은 자주 할 수가 있었다. 어로공들은 기름 부족으로 출어일이 1년치고 몇 날 되지 않았다. 국가가 지정해준 어로공 바닷일은 “300일 출어일”이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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