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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수기)뿌리 뽑힌 나무(9)
minjukim

 

 (지난 호에 이어)

 북한에서 젊은 남자들은 군대에 나가기 때문에 대부분 젊은 여자들이 총을 메고 보위대 보초병으로 근무한다. 보초병이나 교통정리원 등 제복을 입는 모든 직업은 여자들이 제일 선호하는 직업이었다. 또 수산사업소라 해산물도 많이 먹을 수 있고 벌이가 꽤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군부대 기업은 인맥이 없으면 뚫고 들어가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뇌물도 많이 써야 한다.

 우리는 자그마하고 초라한 정문에 무작정 다가가 보초병에게 당비서를 만나게 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엄마는 당비서에게 딸이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보위대원으로 받아 줄 수 없냐고 다짜고짜 물었다. 그 당 비서는 보초병 한 명이 마침 결혼을 해서 후보자를 구하긴 하는데 붓글씨를 잘 쓰고 손풍금(아코디언)을 잘 치는 사람만 받을 거라고 했다.

 그 회사는 직원이 18명 밖에 안되는 신생 사업소였는데 지배인, 당비서, 창고장, 주방장, 보위대 6명 빼면 나머지는다 뱃사공 들이었다. 회사 정문 앞에는 선전용 게시판이 있는데 거기에 매일 선전선동용 속보를 써야 하고 김일성과 김정일의 생일 기념행사를 할 때는 시작과 마지막에 “김일성 장군의 노래”, “김정일 동지의 노래”, “애국가” 등을 합창하는데 아코디언 반주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큰 기대 없이 그냥 찔러본 말에 정말로 사람을 구한다니? 엄마는 급한 마음에 딸이 손풍금도 잘 치고 붓글씨도 아주 잘 쓰니 좀 받아주면 안 되겠냐고 사정했다. 나는 엄마가 갑자기 거짓말을 하는 바람에 너무 당황하여 뒤에서 엄마를 꼬집었다. 당 비서는 갑자기 화색이 돌더니 그럼 당장 나를 시험해 본다며 사무실로 데리고 갔다. 나는 그 순간부터 등골에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고 엄마를 흘겨보기까지 했다. 거짓말이 곧 들통이 나게 생긴 것이다. 사무실까지 몇 발작 안 되는 그 짧은 순간에 나는 수많은 생각들이 오고 갔다. 손풍금을 만져 본 적도 없는데, 붓을 손에 쥐어 본 적도 없는데 이제 어떡하지? 그냥 빨리 도망가고 싶었다.

 그런데 세상에!! 하늘이 도왔는지 손풍금과 미술품 도구를 보관하는 창고 열쇠를 갖고 있는 사람이 그날따라 외근을 나가고 없었다. 나는 순간 안도의 숨을 내쉬며 아쉬워하는 척을 했다. 당비서는 너무 아쉬워하며 며칠 후에 다시 와서 테스트해보고 괜찮으면 보초병으로 받아 주겠노라고 했다. 아니, 손풍금만 칠줄 알면 내가 보초병이 될 수 있다니? 해 볼 만한 일이다!

 우리는 그 며칠이라는 시간을 벌게 되어 너무 기뻐 한달음에 집으로 달려왔다. 엄마는 그제서야 나에게 고백을 하며 후회하셨다. 학교 음악선생님이 엄마에게 내가 음감이 빠르고 소질이 있다며 음악소조(서클소조)에서 악기를 가르쳐 주고 싶다고 몇 번이나 제안을 했지만 엄마가 반대했다고 한다. 엄마는 딴따라쟁이는 싫고 나를 교육자로 만들 거라고 음악선생님의 제안을 거절했다고

한다. 나도 모르게 그런 이야기가 오고 갔다는 것에 놀랐는데 나는 엄마를 나무랐다. “아니 왜 그런 얘기를 이제야 해요? 음악소조에 들어갔으면 내가 아무 악기나 다룰 수 있을 텐데 참 엄마는 나한테 물어나 보지”

 취직을 위해 나는 짧은 기간 동안 아코디언과 붓글씨 쓰는 법을 속성으로 배워야 했다. 다행히 내 친한 친구 중에 음악소조에 다니던 애가 있었는데 그의 집에 아코디언도 있었다. 나는 그의 집으로 가서 며칠만 손풍금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다. 학교를 졸업했으니 시간도 많았고 나는 그의 집에 매일 출근하여 그에게서 손풍금을 배웠다.

 드디어 며칠 동안에 행사 곡들인 김일성, 김정일의 노래와 애국가 정도는 무난하게 연주를 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한편 큰언니가 소개해준 미술원 아저씨한테 가서 매일 속보용 붓글씨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 아저씨는 매일 나한테 과제를 내주었고 나는 집에 와서 등잔불 밑에 엎드려 붓글씨 연습을 했다.

 드디어 약속한 날짜에 나는 테스트 받으러 갔고 예상대로 행사곡 4곡을 연주했다. 혼자 연습만 하다가 누군가가 앞에서 지켜보는 데서 처음으로 아코디언 연주를 하고 붓글씨를 써내려가는데 너무도 떨리고 긴장이 되어 연습 때보다 더 못했다. 당 비서는 아주 잘하지는 않지만 행사할 때마다 쓰기는 괜찮겠다고, 꽤 쓸 만하다고 고개를 끄떡였다. 면접을 위해 번갯불에 콩 닦아 먹듯이 1주일을 속성으로 배운 것이 일단 통과는 된 것이다.

 당비서는 일단 군단 노동부에서 승인이 나면 바로 취직이 될 거라며 집에서 통지를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다. 그렇게 성공적으로 면접을 마치고 내가 그토록 원하던 보초병이 된다는 생각에 기쁨과 환희에 넘쳐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렇게 기다린 것이 여름이 지나 가을이 와도 아무 소식이 없었다. 나는 거의 1주일에 한 번씩 공장에 찾아가 물었다. “저를 언제 받아 주시나요?” 내가 취직이 안 되어 배급을 받지 못해 우리는 다섯 식구의 배급 쌀로 6명이 먹고 살아야 했다. 엄마는 모자라는 밥량을 채우기 위해 밥에 무를 채쳐서 넣어 무밥도 자주했다.

 무를 많이 섞어 넣으면 일단 밥 양이 많게 보이므로 시각적으로 만족감을 느낀다. 그러나 금방 배가 고파왔고 무엇보다 온 식구가 무밥에 질리고 또 질려 제발 좀 그만해달라고 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나는 밥 먹기가 눈치가 보였고 집안청소와 설거지 등등 모든 일을 도맡아했다.

 그렇게 어느덧 12월 첫눈이 내리던 어느 날이었다. 엄마는 혼자 공장에 찾아갔는데 마침 군단 노동부장이 와 있었다. 엄마는 그를 만나러 하루 종일 정문 앞에서 기다렸다가 날이 어두워서야 노동부장을 만날 수 있었다고 한다. 저녁까지 엄마가 돌아오지 않아 몹시 걱정했는데 엄마는 기쁜 소식을 가지고 늦게 돌아왔다. 노동부장이 내일 당장 나를 만나 보자고 한다는 것이다.

 노동부장은 나를 만나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한 번도 널 받아준다고 약속한 적이 없다. 당비서 양반이 제멋대로 널 받는다고 약속했지만 우리 노동부와는 아무 상관이 없어. 그래서 얼마든지 널 무시하고 안 받아줘도 되지만 차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너의 엄마가 해준 말이 참 가슴에 와 닿아서 내 마음을 감동시켰어. 그래서 널 받기로 결심했다.” “저의 엄마가 무슨 말씀을 하셨는데요?”

 “너의 엄마는 30년 넘게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그렇게 교육시킨 많은 제자들이 당과 군부와 사회의 모든 부분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남의 자식들은 잘 교육시켰지만 정작 본인은 자식들을 잘 교육시키지 못해 대학도 못 보내고 너는 직장도 못 구해서 백수로 놀고 있는데 엄마는 당과 조국을 위해 바쳐온 자신의 인생에 대한 회한과 안타까움을 털어 놓았다. 그리고 너네 집은 지금 배급 쌀이 모자라 얼마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알고 있어. 그러니 내일부터 출근해. 이달부터 배급을 타게 해 줄게”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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