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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뽑힌 나무(4)
minjukim

 

(지난 호에 이어)

 그로부터 바로 며칠 후에 이번에는 돌이 뒤에서 날아와 뒤통수를 명중했다. 그리고 내 목 뒤로 끈적하고 뜨거운 것이 흘러내리는 느낌을 느끼며 머리가 어지러워 잠깐 눈을 감고 있었다. 손을 머리에 대 보니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역시 같은 남자애 2명이 벌써 저쪽으로 도망가고 있었다.  나는 왜 나에게 돌을 던지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그 후부터는 남자애들을 멀리 하고 다녔다. 그리고 자존심 때문에 돌 맞은 얘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다.

 

5. 아버지의 고향으로

북한 최고의 대학을 2개나 졸업하고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엄마가 농사를 짓고 있다니, 이것은 정말 국가적인 손실이다.” 이것이 바로 엄마가 군 교육부에 제기한 진정서 내용이었다. 엄마는 너무 교단이 그리워 군 교육위원회에 찾아가 교단에 다시 서게 해달라고 졸랐는데 군에서는 아버지가 농민으로 전업하게 되면 엄마가 교단에 설 수 있게 해주겠다고 했다.

 농촌 노동력을 고착시킬 데 대한 정책에 따라 농민 직업은 자녀들에게 자동 세습되었다. 그래서 농민은 농민끼리 결혼해야 하고 도시 사람들은 농촌 사람들과 결혼하려 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농민이 되면 우리 형제들은 물론이고 우리 자손들도 대대손손 농민의 신분에서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에 엄마는 자신의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5년이라는 세월을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던 우리집에는 기쁜 소식이 생겼다. 아버지가 쌀 가공 기계를 설계하는데 어떤 성과를 냈는데 도에서 크게 평가하고 전문가가 필요한 해안 도시로 발령이 났던 것이다. 심지어 그곳은 바로 아버지의 고향이었다. ㅇㅇ시는 한류와 난류가 합쳐지는 풍부한 어장이다 보니 대규모 수산사업소들이 즐비했다. 북한에서 가장 큰 수산물 가공 기지였다. 우리는 엄마가 더는 농사를 짓지 않게 되어서 너무 기뻤고 특히 도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행복감에 휩싸였다. 우리가 이사 가는 날 마을 사람들은 모두 우리를 부러워하면서 이삿짐도 함께 꾸려주었다.

 도시에 이사 온 후 엄마는 소원대로 교단에 섰다. 집이 없어 남의 집 사랑방에서 주인 눈치를 보며 기죽어 살던 우리는 아버지 공장에서 두 칸짜리 새집을 배정받았다. 다른 집과 벽 하나를 공유하는 1주택 2세대짜리 집이었다. 평양에서 추방된 지 6년 만에 드디어 우리에게 집이 생긴 것이다. 그 집은 바닷가에서 500m도 안 되는 곳으로 갈매기 소리와 밤에도 들려오는 파도 소리에 처음에 많이 낯설었다.

 바다와 우리집 사이에는 백사장을 따라 20km 넘게 아름다운 소나무 숲이 펼쳐져 있고 여름에는 해당화가 사방에 피어나고 시원했다. 솔밭은 겨울에는 차가운 바닷바람을 막아주는 병풍 역할을 해주었고, 여름이면 오가는 사람들이 더위를 피하는 휴식처가 되었다. 우리는 여름에는 친구들과 바다에서 수영도 하고 솔밭에 핀 해당화를 따서 머리에 꽂거나, 해당화 열매를 실로 꿰어 목걸이도 만들어 걸었다. 솔밭과 백사장 사이에는 철책선이 있었는데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게 해안가를 따라 설치되어 있었다. 철조망은 15m의 거리를 두고 양쪽에 설치되고 그 사이에는 지뢰를 묻었다고 한다.

 북한은 전쟁이 일어났을 때 적군의 상륙을 저지할 군사적 목적으로 동해안에 철조망을 설치하고 모래뚝을 쌓아 올렸다. 소금이 몹시 귀하다 보니 사람들은 김장철이 오면 소금을 아껴 쓰느라 바닷물을 길어서 초절임을 하곤 했다. 우리는 소쿠리를 들고 지뢰밭을 건너서 가시철조망  사이사이를 납작 엎드려서 뚫고 나가 바닷물을 길어와야 했다. 그렇게 지뢰밭을 건너 다니면서도 지뢰가 터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곳 사람들은 두부를 만들때 바닷물을 사용했는데 그래서 그런지 두부가 정말 부드럽고 고소하고 맛있었다. 나는 여태껏 어느 곳에서도 그런 두부 맛을 본 적이 없다. 지금도 그때 엄마와 함께 장마당에서 따끈따끈한 두부 한 모를 사서 양념간장에 찍어서 먹던 그 맛을 영원히 잊을 수가 없다. 엄마는 두부를 무척 좋아하셨는데 함부로 사서 잡수질 못했다. 두부를 볼 때마다 그렇게 좋아하는 두부도 맘대로 못 잡수고 세상을 떠난 엄마를 생각하면 목이 메인다.

 내가 살던 마을에서 5리 가량 가면 넓은 모래불 공터가 있다. 일제시대부터 단오명절이 오면 씨름 경기도 하고 민속놀이를 하던 곳이었다. 그곳은 일제시기에 프로레슬링 선수 역도산(본명 김신락)이 일본에 끌려가기 전 17살 때에 시름에서 이겨 황소를 탔다는 유명한 전설도 깃들어 있다. 그리고 그다음 해 단오 때는 김신락의 형 김항락이 씨름에서 이겨 황소를 탔다고 했다. 심지어 우리는 그들과 먼 8촌이 된다고 했다.

 어느 해인가 (1988년 봄으로 기억) 역도산의 제자 안토니오 이노키라고 하는 프로 레슬링 선수가 스승의 나라에서 은퇴 경기를 하고 싶다고 하여 평양에서 경기가 열렸다. 북한 사람들은 모두가 그가 이기기를 응원했고 또 그가 이겼던 기억이 난다. 특히 마지막 결승전은 길에 다니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온 국민들이 시청했다. 또 안토니오 이노끼가 경기가 끝난 후 스승의 고향을 방문한다고 해서 난생처음 헬리콥터를 다 구경할 수 있었다. 또 처음 보는 까만 고급 승용차들이 줄지어 지나갔다. 그들은 역도산의 고향집과 그가 어릴 적에 마셨다는 우물 맛도 보고 역도산이 자주 들어 올리면서 힘을 키웠다는 바위도 구경했다고 한다.

 인민학교 3학년으로 전학을 하면서 나는 시골과 분위기가 완전히 다른 도시 아이들에게서 풍기는 기운에 그만 주눅이 들었다. 특히 시골 억양이 달라서 애들이 촌뜨기라고 놀려 댔다. 게다가 담임선생은 웃은 적이 한 번도 없는 근엄한 표정을 하고 목소리와 인상이 너무 무섭고 카리스마가 있어서 함부로 얼굴을 제대로 볼 수도 없었다. 나의 하늘을 찌르던 자신감과 공부 성적은 바닥을 치고 있었고 심지어 단순한 산수 계산조차 할 수 없을 만큼 혼이 쏙 빠져 버렸다.

 이사 와서 1주일째 되던 날 수학 시간이었다. 담임선생은 문제를 내주고 다 푼 애들부터 나와서 검열을 받으라고 했다. 선생님이 무서워 설명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아 나는 문제를 도저히 풀 수가 없었는데 제일 마지막에 아무 답이나 써넣고 검열받으러 나갔다. 선생님 앞에 서자마자 다리가 후들거려 겨우 서 있는데 문제를 훑어보던 선생님은 별안간 귀쌈을 갈겼다.

 “야! 이걸 답이라고 가지고 나왔어? 어떻게 이런 쉬운 문제도 못 푸니? 너 시골에서 이런 식으로 공부했니? 완전 꼴통이 들어왔네. 당장 다시 풀어와!” 그는 내 옷자락을 잡고 마구 흔들어 댔다. 내가 시골학교에서 폭군 선생한테서도 맞아보지 못한 매를 40명의 아이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맞아보게 된 것이다. 처음 당하는 일이라 두려움과 수치스러움에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은 심정으로 고개를 푹 떨군 채 자리에 돌아왔다.

 그날 나는 끝내 문제를 풀지 못했다. 사실 날카로운 선생님의 시선과 우연히 마주치고 나면 머릿속이 하얘지고 그때부터 온몸이 굳어져 버려 공부에 집중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시골학교에서 반애들 시험 점수까지 매겨가며 그토록 공부에 자신 있던 나는 새 학교에 전학 오자마자 꼴통으로 전락했다. 그렇게 따 돌림 당하며 두 달 정도 지났을 무렵 나의 진가를 발휘할 반전의 기회가 찾아왔다.

 해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김정일의 엄마 김정숙의 생일축하 공연 참가인원을 선발하기 위해 소년단 지도원 선생이 학급마다 돌아다니면서 한 명씩 시 낭송도 시켜보고 또 노래도 시켜보았다. 그는 새로 전학 온 나를 처음으로 지목하고 시를 읊어 보라고 시켰다. 내가 시를 읊기 시작해서 1분도 안 되어 “합격”하고 소리쳤다. 나 외 2명이 우리 반에서 뽑혔다. 소조실에 가니 각 학급에서 뽑혀온 애들이 한교실 가득 찼다. 여기서 또 테스트가 진행되었는데 나는 1등으로 선발되어 주역을 맡게 되었다. 나는 공연의 시작과 마무리 발언, 가장 중요한 2인조 그룹, 중창 종목마다 안 끼우는 데가 없을 만큼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지도원 선생은 공연 연습 도중에 애들이 실수하면 끊임없이 반복을 시켰는데 나는 항상 한두 번에 통과되었지만 다른 애들에게는 왜 나처럼 못하냐고 몰아세웠다. “도시 애들도 별거 아니네.” 전학 온 지 얼마 안 된 시골 촌뜨기가 공연에서 주연을 맡다니! 어리벙벙한 학생으로 보았던 학교 선생님들은 놀랐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수많은 질투의 시선을 느끼면서 자존감을 높아졌고 선생님도 덜 무서워졌다. 도시 학교에서 드디어 적응을 하게 된 것이다. 그 후부터 나는 인민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어느새 친구들을 휘어잡게 되었고 공부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며 교장 선생님을 비롯한 모든 교직원들이 나를 모르는 이가 없을 만큼 인기 있는 학생이 되었다.

 북한 학생들은 학교에서 공부만 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 생활을한다. 북한 사람이라면 인민학교 2학년부터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조직에 소속된 조직원들이다. 인민학교 2학년에 올라가면 소년단에 입단하는데 모범학생 순위로 1, 2, 3차에 거쳐 입단식을 진행한다. 중학교 4학년에 올라가면 청년동맹에 가입하는데 역시 모범학생 순위로 가입한다. 30살까지 청년동맹원이며 31 살부터는 노동자는 직업총동맹, 농민은 농업근로자동맹, 출가한 여성의 경우 여성 동맹에 가입하여 생활한다. 각 근로단체 조직들에서 우수분자들은 노동당에 입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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