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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J
leed2017

 

 한국 E여대에 가있을 때였습니다. 성탄절이 가까와 오는 계절, 창밖은 이미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오후 4시 아니면 5시쯤이었지 싶습니다. 혼자 연구실에 남아 서류정리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방문을 노크하는 방문객이 하나 있었습니다. 문을 열고 보니 학부 학생으로 보이는 학생 하나가 문을 밀고 들어서서는 의자를 하나 끌어당겨 털썩 앉더니 다짜고짜 “장학금을 신청하려는데 추천서를 써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낯선 학생이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편의상 J라 하겠습니다. “내가 너를 전혀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추천을 하느냐, 또 언제까지 추천서를 써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J의 대답이 지금 당장 써 줄 수 있으면 제일 좋고 아니면 내일 아침 10시까지라고 대답하는 게 아닙니까.

 나는 “지금 타이핑 할 조교가 모두 퇴근했고 내일 10시까지 내야 한다니 이렇게 빨리 독촉하는 법이 어디 있느냐”며 나무래는 말투로 말했더니 J는 갑자기 눈물을 펑펑 쏟으며 흐느끼다가 나중에는 마구 큰 소리로 우는게 아닙니까.

 “이거 큰 일 났다” 싶어 나는 그 음산한 초겨울 날인데도 얼른 일어나서 사무실(북미에서는 사무실, 한국에서는 거창하게 연구실이라고 합니다) 문을 활짝 열어재쳤습니다. 만약 문을 열지 않았다가는 모두 다 퇴근한 텅 빈 복도에 여인의 흐느껴 우는 소리가 나면 이 광경을 목격한 사람의 추리 결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또 내가 뭐가 되겠습니까?

 나는 일부러 목소리 볼륨을 필요 이상 크게 늘여서 “이렇게 급한 부탁을 해오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야단을 쳤습니다. 엘리베이터로 6층에 내린 사람도 내리자마자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나는 이 일이 있은 후 다른 원로 교수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그 교수의 말이 J가 자기 학년에서 공부로 이름을 날리는 학생이랍니다. 이름을 날리고 아니고는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요. 학교에서는 우등생, 사회에서는 열등생이란 말이 떠올랐습니다. 속으로는 어떤 사내가 J를 덥썩 물었다가는 그 녀석도 평생 “사모님 비위 맞추느라 고생좀 할끼다”는 비웃음이 나왔습니다.

 한국에서 길에 나서 보면 학생 J를 닮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것 같습니다. 이 성급함은 학문 세계에서도 어느 정도 퍼져 있다고 해도 말이 되는 것 같지요.

 연구기관에서 대학에 연구하라는 연구비 지원에도 나타납니다. 연구란 아무리 물적, 재정적, 인적자원이 풍부하다 해도 연구계획서에 따라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하여 보고서를 쓰기까지는 아무리 빨라도 2, 3년 정도의 시간이 걸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E대학에 있을 때만 해도 연구비를 지원하고 자료를 수집하고 있는 중에 벌써 보고서 내라고 독촉이 옵니다.

 그래서 나는 엉터리 보고서를 조작한 적도 몇 번 있었습니다. 그때 나는 한국에서는 “양심적인 연구는 멀었구나” 혼자 결론짓고 말았습니다. 이 경우에는 제도가 부정직을 배양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성급함이 문제를 일으킬 경우가 많을 것 같지마는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성급한 기질이 ‘욱’ 하는 충동성과 만나는 날이면 엄청난 에너지를 뿜어내는 법. 좀 지나친 논리의 비약인지는 모르지만 소위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던 경제발전도 이 ‘욱’ 하는 성급성이 충동성과 결합되었을 때의 힘의 여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나도 알고 보면 J못지않게 성질이 대단히 급한 사람입니다. 나는 시골 구석에서 자란 놈이라 모든 것이 남들에 비해서 느릿느릿, 나쁘게 말하면 느려 빠지지만 좋게 말하면 여유만만입니다. 모든 일에 성급하고, 조바심을 내고, 마음을 졸이는 면이 있으나 남들은 여유만만으로 봐 주는 것 같습니다.

 젊었을 때는 그 급하고 불같던 성질은 이제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나보다 천성이 더 너그럽고 여유로운 아내 미석도 “요새는 이동렬이와 사는 맛이 난다”고 할 정도로 내가 느긋해졌다고 합니다.

 성탄절이 가까와 오니 J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궁금한 생각이 듭니다. 나이를 대충 꼽아보니 J가 올해로 못되도 서른다섯은 되었을 나이겠는데요. (202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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