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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정(無心亭)
leed2017

 

 무심정(無心亭)이란 내 고향 경상북도 안동면 예안군 청고개 산마루에 세워질 정자 이름이다. 좀 더 자세히 얘기해 보자.

 지난해 연말 한국에 있는 조카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용인즉 안동시에서 하는 말이 예안읍에서 내 생가 역동까지 도중에 출렁다리도 있는 올레길을 하나 만들 계획인데 그 올레길 중간쯤, 그러니까 청고개가 시작되는 산마루 언저리에 정자를 하나 세우고 싶다는 것. 그러니 내가 정자 이름을 하나 지어서 붓글씨로 써 보내주면 좋겠다는 부탁이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내 머리 속에 떠오르는 이름이 하나 있었다. ‘압구정’이라는 세 글자다. 그러나 조카 말이 한문을 거쳐야만 그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정자 이름은 될 수 있는대로 피하고 싶으니 우리말이나 그에 가까운 쉬운 말로 지어달라는 것이다.

 압구정하면 생각나는 것이 서울 강남에 있는 동네 이름 압구정동일 게다. 그 이름이 지어진 것은 현대아파트 72동과 74동 사이에 있던 제7대 임금 세조의 참모 한명회의 정자, ‘압구정(狎鷗亭)’ 때문이다. 압구란 말은 친하다는 의미의 ‘친할 압(狎)’과 ‘갈매기 구(鷗)’를 합한 단어. 온 천지에 아침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저녁노을이 붉게 타는 한적한 곳에서 세상사의 번거로움과 욕심을 잊고 산다는 말이다.

 본래 한명회의 압구정은 오늘날의 여의도에 있었다. 여의도에 있던 것을 강 건너 남쪽으로 옮기고 압구정이라는 현판을 단 것은 성종 7년, 한명회가 크게 출세를 하고 난 뒤에 있던 일이다. 김종서, 성삼문, 박팽년 등의 단종 지지세력들을 제거하는데 세조를 도와 일등공신이 된 그는 탄탄대로의 출세길을 걸어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자리인 영의정까지 올랐다. 또한 자기의 두 딸을 예종과 성종에게 시집 보내서 임금의 장인이 되기도 했다.

 신숙주, 김수온, 서거정 등 당대를 호령하던 명사/선비들이 다투어 압구정에 와서 아름다운 풍광 속에 술 마시며 시(詩)를 짓던 이 정자는 그야말로 부귀영화와 세도가 더 할 수 없는 극에 이르다가 한명회가 일흔세 살 나이로 생을 마감하자 압구정 운명의 마감도 예상보다 빨리왔다.

 한명회가 갑자사화로 부관참시(죽은 뒤에 큰 죄가 드러나면 다시 무덤을 파고 관을 부수어 시체를 내거나 목을 잘라 거리에 내건 극형)의 형벌을 당하는 판국에 정자의 운명인들 온전할 리가 있었겠는가.

 한명회는 살아있을 때 자기는 갈매기와 친하며, 한적하고 고고한 인생관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그의 세욕에 찌들은 갈매기 사랑을 인정하기는커녕 도리어 비웃었다.

 예로, 야사에 따르면 매월당(梅月堂) 김시습이 압구정에 들러 한명회가 지었다는 시구 “젊어서는 사직을 붙들다가 늙어서는 강호에 누웠노라(靑春扶社稷, 白首臥江湖)”라는 구절에서 붙들 부(扶) 대신 망할 망(亡) 자를 누울 와(臥) 대신에 더러울 오(汚) 자를 바꿔 넣어서 “젊어서는 사직을 망하게 하고 늙어서는 강호를 더렵혔네”로 고쳤다고 전한다.

 이종묵이 쓴 ‘조선의 문화공간’을 보면 조선의 풍류객이요 도도한 선비 백호(白湖) 임제가 압구정에 들렀다가 “…갈매기와 친하다고 붙인 이름 정말 욕심을 잊었던가?/ 지난일 모두 아득할 뿐/ 한산한 뜰에는 풀만 수북/ 청은옹(淸隱翁)에 대한 끝없는 그리움/ 슬픔이 밀려들어 쏟아지는 눈물”이라는 시구로 한명회와 압구정을 싸잡아서 조롱한 것이 적혀 있다.

 세상에 전하는 것은 청은옹 김시습의 절개이지 한명회의 부귀영화가 아니란 말이다. 김시습 같은 지사가 뜻을 믿지 못하는 세상에 한명회 같은 속물(俗物)이 득세하는 것을 보면 눈물이 나온다는 것. 과연 임백호 다운 조롱이요 거침없는 탄식이다.

 이 세상을 다녀간 지가 500년이 넘는 한명회의 압구정을 장황하게 늘어놓는다고 해서 조카가 부탁한 정자 이름이 저절로 떠오르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압구정 이야기를 떠나서 아내와 아침 커피잔을 앞에 놓고 모든 가능한 정자 이름을 적어 보았다. 천년정도 나왔고, 안심정, 세심정, 관수정, 청산정, 백운정, 청현정, 무심정 등이 쏟아져 나왔다.

 정자가 들어설 곳은 근처에 인가가 없고 사람의 왕래가 빈번한 곳도 아니다. 인적없는 산길을 따라 한참 가다보면 청고개를 바로 눈앞에 두고 갑자기 앞이 확 트이고 저 멀리 산 밑으로는 낙동강이 굽이쳐 흐르고 강 건너 저쪽 편으로는 나지막한 산들이 겹겹이 에워싸고 있는 그런 풍광이 펼쳐진다.

 이렇게 적적한 곳에 외로이 서 있을 정자. 봄이면 꽃을 찾아 산에 오르는 상춘객이나, 올래길 산책에 나섰다가 피곤한 다리를 쉬어가고 싶은 사람들, 낚싯대를 메고 그늘을 찾는 고기잡이꾼 말고는 찾아오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쓸쓸한 정자에도 봄이면 새들이 와서 지저귀고, 하늘에 뭉게구름은 피어나겠지. 여름 소나기와 겨울의 매서운 눈바람을 맞으며 말없이 오가는 세월만 지켜보고 있을 이 무심한 정자.

 옳다. 정자 이름은 인연을 맺을 필요도, 풀 필요도 없을 무심정으로 하자. 한명회의 압구정은 수레에 실려온 고관대작들이 술잔을 들고 내려다보는 경치였겠으나 무심정을 찾는 이들은 제 발로 걸어와서 피곤한 다리를 쉬게 하려는 나 같은 필부필부(匹夫匹婦)들일 것이다. (201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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