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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leed2017

 

 사도세자는 28살 때 아버지 영조가 그를 뒤주 안에 넣어 물 한 모금 안 주며 굶겨 죽였습니다. 세상에! 임금 애비가 다 장성한 세자 아들을 죽이다니. 이 끔찍한 비극이 지나간 뒤에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는 회고록을 썼습니다. 그런데 회고록을 모두 4번이나 썼습니다. 아들 정조가 임금 자리에 오르고 나서 쓰고, 정조가 죽고 나서 또 썼습니다. 왜 이렇게 여러 번 썼을까요?

 

 정조는 자기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거대한 노론세력에 보복의 칼을 빼들었습니다. 홍씨의 친정은 노론세력의 노른자. 그러니까 혜경궁 홍씨의 삼촌 되는 홍인한도 정조의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로 간 원흉으로 처형되고 바야흐로 혜경궁 홍씨의 친정이 몰락할 위기에 놓였습니다. 그러니 사가(史家)들은 첫 번째 회고록은 지나간 비극을 되돌아보기 보다는 망해가는 친정을 구하려는 정치적 성명서에 지나지 않는다고 봅니다.

 

 첫번재 회고록에서는 정조의 눈길이 무서워 사도세자가 정신병이 있다는 말도 꺼내지 못했습니다. 정신병이란 말은 정조가 죽고 나서 처음으로 회고록에 나온 말이지요. 좌우간 혜경궁 홍씨는 “하늘아, 하늘아” 하는 말로 끝을 맺었습니다. ‘하늘 말고는 이 처참하고 어이없는 일을 누가 알 수 있으랴’ 하는 자포자기의 탄식입니다.

 

 하늘은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어머니요 쉼터입니다. 착한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 하늘이 자기를 지켜주리라 믿고, 악한 사람은 하늘이 자기를 너그럽게 감싸줄 것이라 믿지요. 사형을 선고받고 형장으로 끌려가는 사람들은 걸어가다가 서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한참 우러러보다가 고개를 떨구고 가던 길을 간다고 합니다. 이들은 하늘을 쳐다보며 무엇을 생각할까요? 내 생각으로는 하늘이 자기를 버렸다고 생각할 것 같습니다. “이제는 하늘마저 나를 버리는구나. 그렇다면 가야지” 하며 스스로 체념하며  운명을 내던지는 순간이 아닐까요.

 

 우리 애국가에도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고 적혀있지 않습니까? 나는 하늘을 무서워하거나 겁내지는 않습니다. 하늘은 그냥 하늘입니다. 옛날 내가 어렸던 시절, 남의 수박밭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하나님이 내려다 보면 어떻게 하나 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질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늘은 인간의 운명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사람에 일어나는 모든 일, 태어나고 죽는 일, 사업이 잘 되고 안 되는 일, 죽음이 모두가 하늘이 정한 운명이라면 우리에게는 큰 저주의 대상도 되지만 큰 위안도 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자동차 사고가 나서 죽는 것도 운명이라면 구태여 자동차를 빨리 몰지 않으려는 노력도 할 필요가 없지요. 모든 것이 운명인데-. 운명이란 아무리 비켜가려고 발버둥을 쳐도 소용없는 일.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초인간적 위력에 의해서 지배되는 일을 내가 발버둥친다고 무슨 효과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인간의 길흉화복과 명운을 설명하려 듭니다. 그 설명이란게 꽉막힌 순환논리로 짜여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초자연적인 힘에 의해서 결정되다는 것도 받아들이기가 매우 거북한 설명이지요. 이웃을 도우며 가난하고 착하게 살던 사람이 50도 되기 전에 죽은 사람도 운명, 나쁜 짓만 골라가며 저지르고 다니던 개망나니인데도 천수를 누리며 잘살다 죽는 악인도 운명 때문이라면 우리는 그런 운명을 왜 믿고 살아야 하는지요. 정말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인도사람들은 길에서 구걸하는 거지들을 도와주지 않는답니다. 전생에 그런 운명으로 태어났으니 도와준다는 것은 그들의 운명을 거역하는 행위와도 같다는 말이지요.

 

 아무리 운명 같은 것은 필요없다고 떠들어도 우리는 운명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김방이라는 사람이 쓴 책을 보면 노자와 공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노자(老子)는 “하늘은 공평무사(公平無私)하여 언제나 착한 사람의 편을 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공자(孔子)가 아끼는 제자의 한 사람인 안연이란 사람은 착하고 학문도 게을리 하지 않고 항상 남을 도우며 가난하게 살았는데도 젊은 나이에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한편 중국의 전설적인 인물 도척(盜?)이란 사람은 죄없는 사람을 마구 죽이고 재물을 빼앗아가며 떵떵거리며 잘 살다가 천명을 다하고 편안하게 마지막 숨을 거뒀답니다. 하늘은 착한 사람을 보답한다고 했는데 젊어서 죽은 착한 안연, 천수를 누리다 죽은 악인 도척을 생각하면 하늘의 보답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를 묻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마천이라는 중국 한무제 때 역사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임금의 미움을 사서 궁형(거세)을 당하고 비극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공자의 제자 안연의 죽음이나 천수를 누리다가 죽은 도척의 죽음에 대한 사마천의 대답은 흐리멍텅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의 주장의 요지는 “선을 생각하는 사람과 이익을 생각하는 사람은 눈이 다르기 때문에 같은 잣대로 재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맹자는 “인간 세상은 불평등이 가득하다. 이렇게 불평등하단 것이 바로 천명”이라는 것. 사람의 길흉화복이 모두 서로 다르니 이 천명에 순종하라고 권합니다.

 

 이렇게 살아도 하늘은 OK, 저렇게 살아도 OK라고 한다면 하늘이 내려다본다고 겁낼 것 없지 않습니까. 혜경궁 홍씨는 남편이 뒤주 속에서 죽게된 비극 뒤에는 자기 친정 아버지 홍봉한이 있다는 사실에 말문이 막혀서 “하늘아, 하늘아”로 끝내며 두 손을 휘저었을 것입니다. 누가 이 서럽고 끔찍한 변괴를 이해하겠느냐는 절망의 표시였겠지요. 하늘을 원망했겠습니까, 아니면 하늘에 물음만 던졌겠습니까. 내 생각으로는 둘 다였지 싶습니다. 혜경궁 홍씨의 친정 아버지가 자기 남편을 죽이는데 맨 앞장을 섰던 사람이 무슨 제정신이었겠습니까? (201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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